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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합니다. (고전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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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오직 한 가지의 죄만이 있을 뿐이며, 그것이 이 세상의 특징이기도 하다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길보다 내 멋대로 택한 길을 가려는 독선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 독선은 오직 하나님만이 거할 수 있는 중심에 자기를 대신 갖다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온 우주를 전염시킨다고 합니다. 그것은 모든 동물들이 각자 자기 식욕을 채우는 데만 급급하여 공동의 선을 생각할 수도 생각하지도 않는 정글과 같다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속에는 그 같은 이기심이 열 배나 강한 독성이 도사리고 있다합니다. 어떤 개인도 그것에 대해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합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적의를 품도록 만드는 것이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속한 죄며, 인간은 그것에 의해 사랑의 마음을 상실한 채 하나님은 물론 이웃 사람들에게까지 원한을 품고 살아간다합니다.(템플)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이기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이기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어느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낙후된 마을 발전을 위한 주민총회가 열렸습니다. 좋은 착상들이 많이 나왔으며 그 중 결정된 사항은, 자기 집에 두 대 이상의 마차를 가지고 있는 주민은 한 대씩 마을을 위해 기부하자는 것과, 말과 마차를 보관할 창고가 있어야 하니까 헛간을 둘 이상 가진 사람은 그 중 하나를 마을에 내놓자는 제안이었는데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습니다. 이렇게 일사천리로 마을 공동재산이 불어나고 있던 중 그 마을에서 가 장 가난한 주민이 머뭇거리면서 부끄러운 낯으로 일어나 "나는 마을을 위해 바칠 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닭 두 마리가 있을 뿐인데 그 중 한 마리를 내놓아 마을 발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은데 닭 두 마리 이상 있는 주민들은 한 마리씩 내놓기로 하면 어떻겠는가?"라고 제의했습니다. 막상 표결에 붙이자 만장일치로 찬성하던 사람들이 닭 두 마리이상 가진 사람은 한 마마리 씩 내자는 제안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나타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마을 주민들 중에 말이나 마차를 내놓아야 할 만큼 많이 가진 사람은 몇 안 되었지만 닭은 누구나 한 마리 이상 다 갖고 있었던 때문이었습니다.

  부자의 이기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난 당신과 같은 가난한 사람들을 모욕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도 잘 알다시피 앞으로 20년이 지나면 세계의 인구는 현재보다 50% 가량 더 늘어날 것입니다. 당신은 이 문제에 대비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가난한 사람이 일을 하다말고 부자를 쳐다보았습니다. "아니, 어린아이들을 싫어할 만한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전 아이들을 좋아하는데요!" "나도 애들을 좋아해요. 하지만 자원은 한정돼 있기 때문에 이런 추세로 인구가 계속 증가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단 말입니다." "아하, 그러니까 문제는 인구가 아니라, 자원이군요." "바로 그거요"라고 말하며 부자는 가난한 사람이 제대로 이해하자 얼굴에 기쁜 모습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손을 놓고 가난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구조절 문제와 자원문제를 다같이 해결해야겠군요." "그래요. 물론이죠"라고 부자는 좀 당황스러워 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가난한 사람은 부자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난 당신을 모욕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도 잘 아시다시피 당신처럼 전 세계 인구의 30%를 차지하는 부자들이 전 세계 자원의 90%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디럿스바이블)

키 큰 사람에 대한 키 작은 사람의 이기심도 있을 수 있습니다.

유명한 조각가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좀 색다른 빌딩을 디자인했습니다. 플로리다에 있는 한 대학 캠퍼스에 도서관을 세웠는데 천장을 아주 낮게 설계해서 6피트 정도 키가 큰 사람이라면 머리를 천장에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머리를 부딪혔던 사람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건물을 왜 그렇게 지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이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이 설계한 건축물의 특징인데, 그는 키가 큰 사람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은가요! 다른 친구를 자신의 키에 맞추려고 하지 않는가요? 그를 자신에게 맞추려고 하지 않는가요? 남편과 아내, 부모님과 자녀들 그리고 친구들은 서로를 다시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가 표현하는 사랑이란 다른 사람들은 가지고 깎고 다듬어서 그 사람이 어떠해야 한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모습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아가페 사랑이라고 부른 사랑은 아닙니다. 아가페 사랑이란, 다른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 다른 사람의 삶을 인정해주는 사랑,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차이점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 합니다.

자녀를 위하여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 합니다.

빅톨 위고의 소설 "나인티 쓰리" 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쟁 직후 숲을 지나던 병사들이 굶주려 지친 엄마와 세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대장이 빵 한 덩어리를 던져주자 엄마는 지체 없이 빵을 세 조각으로 나누어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 젊은 병사가 저 여자는 배가 안 고푼 모양이지? 라고  중얼거리자 대장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게 아니야 어머니이기 때문이야. 그렇습니다. 엄마의 사랑이 이기심을 극복하게 한 것입니다.

  가족을 위하여 자기의 유일을 구치 아니 합니다

시장보는 부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해본다는 어떤 분의 글이 있습니다. 어떤 부인들은 별거 아닌 것 같이 보이는 것을 살려고 몇 바퀴를 돌면서 여기저기를 다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모습이 답답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 시간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다 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 시간만은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시간만은 나의 생각 나의 입에 맞는 것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 남편이 좋아하는 것 내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만을 생각하며 그것을 찾아서 시간이 가는 줄도 다리가 아픈 것도 잊고 이렇게 빙빙 돌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깨끗한 마음이고 얼마나 행복한 시간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 합니다.

  어느 존경스러운 사역자가 이렇게 말했다합니다. "나의 회중 가운데에는 나이가 많은 할머니가 한 분 계십니다. 그분은 이제 귀가 멀어서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들을 수가 없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예배 때마다 늘 일찍 와서 꾸준히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난 그녀가 왜 이렇게 열심히 참석을 하는지 궁금하여 그 이유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지요. '목사님 말씀을 들을 수는 없지만 난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곳에 나온답니다. 난 이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시는 동안 우리 하나님께서는 성경 본문에서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을 가르쳐 주신답니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답니다. 이곳에 오면 나는 가장 좋은 회중들과 함께 있게 되고, 또 하나님의 임재가 더욱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그분의 성도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요. 나는 혼자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만족할 수 없습니다.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나의 의무이자 또한 특권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삶은 사람의 말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서도 예배에 늦게 오는 자들, 또는 전혀 예배에 참석조차 하지 않는 자들에게 진정 엄숙한 경고와 책망이 되었습니다! -아빈.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 하는 사랑의 실천이 결국은 자기에게 유익이 됩니다. 

  우리는 일본에 유명한 주부작가 미우라아야꼬 여사를 잘 압니다. 하지만 이름이 알려지기 전에 아야꼬 여사는 남편의 수입만으로는 생활이 매우 어려운 가난한 가정 주부였습니다. 이렇게 생활이 어렵다보니 적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조그만 구멍가게 하나를 차렸습니다. 그리고는 오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면서 친절히  봉사한 결과 점점 장사가 잘되었답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트럭으로 물건을 들여와야 할 정도로 가게가 잘 되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자기 아내가 바쁘게 일하는 모습을 보고는 안쓰러운 마음에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우리 가게가 이렇게 잘 되는 것은 좋지만 이 주위에서 사는 사람들이 다 어려운 사람들인데 우리가 잘되므로 다른 구멍가게들이 안 되면 어떻게 하느냐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이 부인이 그것을 깨닫고는 곧 시정하여 자기의 가게의 물건을 줄일 뿐 아니라 어떤 물건은  아예 갖다 놓지도 않았답니다. 그렇게 하여 손님들이 없는 물건들을 찾을 때에는 그 물건은 저 가게에 가면 있습니다 하고는 손님을 나누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하고 나니 이 미우라아야꼬 여사에게는 시간이 좀 생기게 되었고 그  결과 틈틈히 펜을 들어서 글을 썼는데 그래서 완성시킨 작품이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소설이 "빙점"이라는 소설입니다. 이기주의에 매여 있는 사람에게 창작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저 돈만 벌고 자기만 살겠다고 바둥거리는 거기에 무슨 심오한 생각이 있겠으며 무슨 창작의 능력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때 비록 구멍가게를 하며 바쁘게 생활하는 가난한 한 가정주부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에는 심오한  생각과 영감이 있어서 이 같은 좋은 작품을 내어 놓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만 가진 게 없어서 주지 못한다고 그럽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없어서 못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되는 사람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머니에 가진 돈이 없었습니다. 이들이 그렇다고 그냥 지나쳤습니까? 아닙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외쳤습니다.  이들은 내게 무엇이 없는가 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이 있는가. 나는 저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를 생각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반드시 줄 것 을 찾아내는 법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어느 누가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이의 인격을 존중하고 그의 요구를 곧 나의 요구로 생각하며 그가 원하는 것을 내가 하면서 한없는 보람과 기쁨을 느끼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사랑의 속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전 생애를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참된 신앙의 사람들은 어느 누구의 강요도 없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예수님의 고백을 본받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해 본 사람만이 참된 사랑을 말할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뿌리박은 이기심을 극복하고 하나님과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주님의 섬김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제자들을 섬기기 위해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들의 먼지 묻은 발을 씻기시는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고난의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 53:3-5)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주님의 기도 속에서 주님이 그렇게  기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를 사랑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셨다면 인류의 구원의 희망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주님에 섬김과 희생의 정신을 배울 때 우리는 참 사랑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부자로 살지 못하여도 좋습니다. 그리고  건강하게 오래 살지 못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신비를 한 번은 알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은 결코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랑을 함께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돈이 없어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지 못해서 괴로운 것입니다. 참 사랑의 뜻을 알아서 사랑의 능력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모두가 되도록 합시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를 사모할 때 자기의 어떤 유익을 위해서만 구하고 있었습니다. 은사를 주신 궁극적 목적은 형제를 섬기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참된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줄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없어서 주지 못함이 아니고 주고자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합니다. 자기의 유익이라는 말은 단순히 자기의 유익이라는 뜻만이 아니라 자기의 것이라고 하는 강한 소유의지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구치 아니하며의 구한다는 말 역시 강력한 표현으로 어디에서 찾을지도 모르면서도 기필코 찾고자 열심히 구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자기의 유익을 구한다는 그 자체를 잘못된 것이거나 죄라고 정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참된 사랑이란 이기심을 뛰어넘어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광을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주석가 렌스키는 만일 인간에게서 이기심이라는 병만 고쳐진다면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삶에 자리가 바로 에덴  동산이 될 것이다 고 말했습니다.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은, 벌써 독생자와 함께 모든 것을 받아 가지고 나옵니다.  욥과 같이 "주께서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라고 합니다(욥 13:15). 그는 사람에게 무엇을 받으려고 행하지 않고, 사람에게 무엇을 주려고만 행합니다. 그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이유는, 자아가 없어진 까닭이 아닙니다. 자아라는 것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아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는 자아입니다(행 20:35).

  한가위를 맞아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는 사랑을 실천 해 봅시다.

  각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이기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의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속에서 오히려 유익된 역사가 임하게 됩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본받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모두가 됩시다.
(강성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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