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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떠나서 가라 (창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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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나서 가라고 하는 이 개념은 성경에 아주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모세에게도 이런 형식의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너는 이곳을 떠나 바로에게로 가라"는 말씀입니다.
  첫째, 믿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왜 떠나야 되느냐, 무슨 준비를 하고 떠나야 되느냐, 안 떠나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저 믿고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떠난다는 개념은 성경에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로 청산하는 의미입니다.
  모세가 죽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30일 동안 애곡을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주신 명령을 보면 "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더불어 일어나 요단을 건너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울고 있지 말고 이곳을 떠나서 요단을 건너가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머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떠난다는 개념은 청산입니다. 청산하지 않고 떠나면 다시 회기하기 쉽습니다. 정구공에 고무줄을 매서 치면 그 공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그와 같이 청산할 것을 청산하지 않고 떠나면 그것이 다시 우리를 얽어매는 올무가 되어서 아무런 결과가 없는 헛수고가 되기 쉬운 것입니다. 

  둘째로 떠났다는 것은 회개의 모습입니다.
  내가 바로 회개했다는 것은 바로 떠났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의 내용을 보면 떠나는 일을 분명히 하지 않고 떠난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마음속에 벌써 씻어 내어버려야 될 것을 씻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정신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청산이 안 된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의미

  어떤 이는 필승 코리아를 상징적으로 적용했는데 성공을 하려면 이렇게 해야 된다는 열 세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그 중에 두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하나는 고향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야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필자가 하는 말은 우리가 태어난 고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연, 학연 이런 것에서부터 떠나라는 것입니다. 지연, 학연에 내 삶의 가치나 행복을 두고 거기에 의지하여 생존하려고 몸부림치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목포고등학교 출신과 목포해양고등학교 출신이 너무 다르다, 대구공고와 대구상고출신이 너무 다르다, 경남고등학교와 경남상고 출신이 너무 다르다, 육사출신과 해사, 공사출신이 너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거 대통령하고 연관있는 이야기들입니다. 목포고등학교 출신과 목포해양고등학교 출신들이 너무 다릅니다. 다른 지방 사람들이 볼 때 목포에 있는 학교니까 같겠지 싶어도 지연이나 학연을 따질 때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경남고등학교와 경남상고는 서로 이웃에 있는 학교입니다. 그러나 문민정부 시절에 그 두 학교는 너무 달랐습니다. 우리 사회가 지금 청산이 안되고 있다는 데서 큰 몸살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친일파부터 아직 청산이 안되고 있습니다. 그것뿐입니까? 우리 사회의 온갖 과거의 찌꺼기들이 청산이 잘 안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떠날 것을 떠나지 못하면 아직도 출발이 안된 것입니다.  떠날 것을 못 떠나고 있기 때문에 분명한 출발이 안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의미

  히브리서 11장 8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는 말은 믿음으로 떠났다는 말입니다. 믿고 떠나는 것은 상당히 맹신적인 것 같지만 최고의 방법입니다. 믿음에는 방법과 원리가 그 안에 다 있습니다. 믿고 떠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믿었다는 것입니까? 자기를 불러준 자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순종했고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같다는 것입니다. 갈 바를 모른다는 것은 맡기고 간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보면 어리석은 여행을 하는 것 같지만 그는 믿고 떠났습니다. 고향을 떠나라고 한 어떤 명사가 충고했던 그 이야기는 의미가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사고들, 사변들, 여러 가지 삶의 형식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출발점이 분명한 떠나는 아름다움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살기를 바랍니다.

  둘째, 비전을 보고 떠나야 됩니다.
  아브라함이 갈 바를 모르고 떠났는데 아브라함은 사실상 이 명령을 두번째 받았습니다. 첫번째 명령은 갈데아 우르에서 받아서 떠났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의도하는 자리에 머물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란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런데 떠난 사람은 머물면 안됩니다. 하란에 머물면 안됩니다. 하란이라는 이 말의 의미는 '지체'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은 하란이 아니라 가나안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지금 하란에 머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창세기 12장에서 두번째 명령을 받은 것을 보면 우리가 아브라함을 너무 높이 평가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하면 우리는 어쩐지 기가 죽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하면 굉장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적어도 창세기 12장의 이 말씀을 받을 때에 아브라함은 불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떠나라고 했을 때에 고향을 떠났는데 하란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가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란에 머물러 있는 아브라함은 지금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하란을 넘어서야 되는데 하란을 넘어서지 못하는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번째 명령으로 네가 고향을 떠났으면 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데 가지 못하고 중간에 머물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이것도 또한 우리들 신앙생활에 나의 자화상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큰 죄는 범하지 않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늘 부족한 것은 계속 떠나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계속 성숙하지 못하고 침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란에 머물러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내 신앙생활의 자화상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란에 머물라고 아브라함을 부른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떠밀려 가는 삶

  창세기 12장 5절에 보면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보면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라함이 결국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좋아서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게 아니라 떠밀려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 같은 사람도 믿음이 성숙해지기 전에 떠밀려서 억지로 가나안 땅까지 왔다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기어코 여기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여러분, 발악하면서 떠밀려 오렵니까? 그냥 순종하면서 오렵니까? 하나님은 이것에 대한 계획이 다 완료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란에 머물고 있어도 하나님은 기어코 아브라함을 가나안까지 이끌고 가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그 분의 뜻은 이미 확정되어 있습니다. 나를 통해서 무언가 일하시겠다는 그 분의 뜻은 확정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망 다니다가 붙잡혀 오렵니까? 하란에 머물러 있으면서 끌려오렵니까? 하란에 머물러 있는 아브라함이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오는 것은 최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란에 머물지 말고 계속 왔어야 했는데 하란에 머물러 있는 이 아브라함을 지금 끌고 약속의 땅에 온 것입니다.

  그 이후를 보면 아브라함은 이 가나안 땅에서 흉년을 피하여 애굽으로 가게 됩니다. 바로 왕에게 가서 아브라함은 또 실수를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삶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서 적응이 잘 안된 것입니다 애굽에 갔지만 바로 궁중에서도 적응이 안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방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바치는 그 자리까지 가기 전에 심각한 방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종 하갈과 불륜을 저지른 기사도 성경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아주 정직한 책입니다. 믿음의 위인이면 그런 불륜기사는 감추어 주어야 되는데 우리가 수치스럽습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믿음의 조상인데 이 아브라함을 보면 가나안 땅에 갔는데도 거기에 적응이 안됩니다. 애굽에 가서도 바로 왕 앞에서 거짓말을 하게 되고 조카 롯과 헤어지고 아들을 못낳는 그 갈등을 이기지 못하여 여종 하갈과 불륜을 저질러서 하나님이 의도하지 않는 이스마엘을 낳는 아브라함의 신앙생활을 검토해 보십시오. 우리가 본받을 게 별로 없습니다. 우리보다도 실수를 더 많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아브라함의 방황 속에서도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여러분, 떠나는 것도 중요한데 떠났으면 가야 됩니다. 간다는 개념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은 적응을 말합니다. 떠났으면 가서 잘 살라는 것입니다. 떠나서 가라는 말씀은 출발을 분명히 하고 가서 성공하라는 말입니다.

  적응하는 삶

  '필승 코리아'의 성공의 비결 중 또 한 가지는 섞어찌게를 잘 만들라는 것입니다. 어디가든지 적응을 잘 하라는 것입니다. 모두와 어울릴 줄 알라는 것입니다. 끼리끼리만 어울릴 줄 아는 것은 이 시대의 성공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가나안에 가서도 적응이 잘 안됩니다. 애굽에 가서도 적응이 잘 안되고 있습니다. 가정생활에도 적응이 안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출발점은 이루었다 할지라도 적응이 잘 안 되는 신앙생활 속에서 방황하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건져내서 옮겼다는 것은 건져낸 그 자리에서는 떠나야 되고 옮긴 그 자리에서는 적응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의 나라에서 우리는 적응을 해야 합니다. 불의의 나라에서 의의 나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순간에서 영원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옮겨 주셨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이 두 가지 개념이 살아있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분명히 떠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지금 가서 적응하고 있는가 이 두 가지 면이 함께 균형을 이루어야만 신앙생활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연관이 있습니다. 분명히 떠나지 못하면 분명히 가지 못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하루에 약 1,700명이 출생을 하고 약 700명이 죽는다고 합니다. 그 700명 속에 나도 언제나 포함될 수 있다는 종말론적인 의식을 가져야 됩니다. 하루 700명씩 이 세상을 떠나가는 그 사람들 속에 나는 해당이 안된다, 앞으로 20년 후, 50년 후의 일이다 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700명이 이 세상을 떠나가는 이 수치 속에 나도 언제나 포함될 수 있다는 종말론적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을 떠날 때에 후회없이 떠나도록 준비된 삶을 살아야 됩니다. 주께서 부르시는 그 놀라운 계획 속에서 그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됩니다. 분명하게 떠나야 됩니다. 그래야 영원한 나라에 영광스럽게 입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죄 문제가 해결이 안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입성을 못할 것입니다.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이런 운명을 맞이할 사람들이 있음을 주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말론적인 개념은 일상적이기도 하고 결정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사소한 육신의 일도 스타트와 결말이 분명해야 합니다.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기 바랍니다. 떠나는 것이 분명하고 가는 것이 분명한 하루의 삶을 살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 생애가 분명히 떠나서 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저분한 떠남

  아브라함의 생애는 떠나서 가는 면에 양면성이 있습니다. 그가 깨끗이 떠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가 갈데아 우르를 떠난 것은 고향을 떠났지만 영적인 면에서 그는 아버지가 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은 하란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 데라는 불신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얽매인 것과 무거운 짐을 가진 아브라함이 육신은 떠났지만 영적인 면에서 떠나지 못한 영적인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델은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 속에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 하나씩 청산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한 대목만 가지고 본다면 포기했을지 모릅니다. 떠나라고 했는데 같이 가는 아버지는 여전히 우상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떠나라고 했는데 하란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여종과 불륜을 저질러서 아들을 낳은 아브라함의 모습만 보면 당장 하나님이 계약을 취소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22장에 가면 아브라함은 마침내 하나님이 의도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집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볼 때는 가나안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애굽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일 수 있지만 언젠가는 하나님이 독자 이삭을 거뜬히 바치는 아브라함의 모습으로 우리를 끌고 가셔서 기어코 그 영광을 한번 받고야마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설정되어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모리아산까지 우리를 끌고 갑니다. 네 아들 독자 이삭을 내게 바치라는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응답해 주는 그 자리까지 가기 전에는 우리를 놓지 않습니다. 기어코라도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기어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셔서 후사를 잇게 하신 하나님, 그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다루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4장에서는 그것이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아브라함의 은혜와 약속이 이루어진다고 증언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나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이 뜻을 이룬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적용되는 원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떠나서 가되 아브라함처럼 방황할 것을 생략하기 바랍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방황하다가 결론에 가서는 마침내 모리아산에 갈 수 있으니까 적당히 방황하자는 이런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방황하고 실수하는 것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성경에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을 본받으라고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실수와 방황은 우리의 생애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을 거울로 삼고 생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떠나서 바로 가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맺는 말

  "떠나서 가라"는 이 구별과 완성이 우리의 삶 속에, 우리의 사역 속에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섞어찌게를 만들라는 것은 떠난 후에 적응하라는 것입니다. 떠나서 간 그 자리에서는 섞어찌게를 해야 합니다. 세상과 더불어 섞어찌게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떠나서 믿는 자 끼리 섞어찌게를 하라는 것입니다. 영적 구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모든 일에 우리 자신들이 적응을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 하란이 너무 많습니다. 머물러 있고 지체하고 있고 되돌아보고 있는 하란이 너무 많습니다. 하란을 떠난 아름다운 출발과 주님이 의도하시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아름다운 삶의 적응이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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