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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 (요 12: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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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이라는 고사가 있습니다. 어느 부자 집에 무남독녀가 있었는데 혼기가 되어 혼담이 들어왔습니다. 동쪽에 있는 집인데 아주 부자였습니다. 사돈은 마음에 드는데 신랑감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또 서쪽에 사는 집에서 혼담이 들어왔는데 집은 가난하고 세상적으로 별로 알려지지 않은 집인데 신랑감이 아주 훌륭하고 마음에 듭니다. 그래서 부모가 이 딸아이의 혼처를 어디로 정해야 할까 고민에 빠졌습니다. 사돈을 봐서는 동쪽 집을 택해야 되겠고 신랑감을 봐서는 서쪽 집을 택해야 했습니다. 딸아이를 불러다가 물었습니다. "얘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딸아이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밥은 동쪽 집에 가서 먹고, 잠은 서쪽 집에 가서 자지요"라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르지만 하나이다

  신앙생활은 이 원리가 통하지 않습니다. 교회와 세상은 완전히 이질화되어 있는 개념입니다. 동쪽 집과 서쪽 집이 서로 다르듯이 교회와 세상은 다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교회와 세상을 둘 다 넘나들어야 됩니다. 오늘은 교회에 모였습니다. 또 내일부터는 세상에서 엿새동안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를 출입하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동가식서가숙처럼 그렇게 넘나든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전혀 성립되지 모순에 빠지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분리될 수 없듯이 교회와 세상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교회에 왔지만 이 예배시간에 세상의 것을 가지고 와야 됩니다.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고 하나님의 그 축복의 열매를 가지고 주님 앞에 와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 한 것을 안고 오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예배 중에 받은 은혜를 안고 가정으로 직장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교회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세상이 있고 세상 안에 교회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진리를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룻기 1장 16절에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이방 여린 룻은 시모인 나오미를 따라오겠다는 신앙적인 고백을 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하나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룻은 유대인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유대인의 백성이 곧 나의 백성이 된다고 하나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죄인은 하나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완전 성결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으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와 나는 하나가 됩니다. 그것을 고백하는 예식이 세례식입니다. 세례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되었다' 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교회는 이질적이지만 성령 안에서 하나됨의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하나님과 유대인의 하나님은 분명히 이질적인 것 같지만 유대인과 이방인의 한계를 벗어나서 하나님 안에서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나 있는 곳에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도 나와 함께 있으리라 너희가 그 길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 도마가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그 길을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주께서 엄중하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도마야 길을 염려하지 말아라. 내가 길이다, 진리를 찾지 말아라. 내가 진리다, 네가 살려고 다른 길로 가지 말아라. 내가 생명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강조하셨습니다. 그 선상에서 예수님은 요한복음의 메세지를 연결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주목하라

  본문 26절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통해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은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부터 16장까지를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날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때 계속 나오는 강조점은 '나'입니다. "나를 따르라" "너희들은 염려하지 말고 나를 따르라" "너희들이 나를 섬기고자 하느냐 나를 따르라"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따르라" "너희들이 천국에 이르기를 원하느냐 나를 따르라 내가 곧 길이니라" 예수께서 자기에게 주목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마다 나를 따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는 시간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다른 것을 주목하지 마십시오.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목하십시오. 우리가 월례회를 할 때에도 예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회의를 할 때에도 예수님을 회장으로 인식을 하고 회의를 진행하십시오. 믿는 사람들이 회의를 할 때 예수님은 간 곳이 없고 다른 문제를 가지고 속상해진다면 그것은 믿는 사람의 회의가 아닙니다. 우리가 월례회를 하고 제직회를 하고 당회를 하는 것은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긴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있는 거기에 나를 섬기는 자가 있다. 나 있는 곳에 너희를 있게 하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는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있는 거기에 너희들도 있으라" 예수 있는 곳에 무엇이 있길래 주께서 그렇게 강조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계시는 거기에 우리도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환경을 보면 우리가 관광을 갈만한 매력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 여러분이 예수님이 사시는 곳이 얼마나 신기한 지 가 보고 싶습니까? 볼 것 없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보십시오. 그 분이 나실 때 마굿간의 구유에서 나셨습니다. 거기에 화려함과 찬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목수 집에서 목수 일을 배우면서 자랐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도 화려한 집에서 하신 것이 아니라 들로 산으로 회당으로 그리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 가셨는데 예수님이 찾아간 곳은 고관이나 부자들을 찾아가신 것이 아니라 병든 자, 귀신들린 자, 창기와 세리와 버림받은 사람들, 고난에 처한 사람들, 유대인들이 멸시한 그 사람들을 찾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계신 곳에 우리도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내가 있는 거기에 너희도 오라 내가 있는 거기에 너희도 있으라" 

  예수는 생명이다

  설악산에 단풍놀이를 가신 분들이 귀신들린 자, 병든 자, 가난한 자, 세리와 창기들이 기다리고 있는 설악산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보고 따라오라고 하시는데 예수가 계신 그 장소는 환경적으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으라고 하십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생명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대접받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필요로 하는 곳에 가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꼭 있어야 될 그 자리에 주님은 가십니다. 거기에 우리도 함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필요로 하는 그 자리에 가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의도하시는 그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배경을 염두해 두고 설교를 들으셔야 됩니다. 지금 예수님은 아주 분주하게 전도를 하시는데 유대인들이 반대를 하는데도 주님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아죽이려는 음모를 하고 있는데도 주님은 지금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왜 주님이 유대인의 박해가 눈앞에 보이는데도 쉬지 않고 자기를 증거하고 있는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나를 믿으라" "나를 따르라" 왜 주님은 자기가 죽을 위기를 알면서도 이 말씀을 계속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죽어 가는 인생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한 주님의 생명의 사역입니다. 구원의 문제입니다. 이 땅 위에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를 거역하는 그 백성들에게 "내가 곧 길이니라 진리니라 생명이니라 나를 믿으라 나를 따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을 우리 모두가 나누고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전도폭발훈련에 보면 예문으로 이런 말씀이 인용이 됩니다. "당신이 오늘 이 자리에서 죽어도 천국에 갈 확신이 있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예, 확신이 있습니다" 이렇게 답하는 사람도 있겠고 머뭇거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대답에 따라 다음 말이 이어집니다. "예, 천국에 갈 확신이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하면 "무슨 근거로 그런 확신을 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예, 성경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3장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일서 5장12절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있기 때문에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성경의 약속대로 나는 확신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도들의 신앙형태가 다 다르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들은 이 말을 할 가 없습니다. 전도폭발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성구를 인용할 줄도 모릅니다.

  예수와의 충돌을 일으키는 사람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의 상황에 보면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지금 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더 좁게 말하면 예수님과 제자들과도 충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이 도저히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자들마저도 주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 대목이 많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복음을 전하러 길을 가는데 날 때부터 소경된 불쌍한 소경을 만납니다. 제자들은 말하기를 "주여, 이것이 본인이 죄가 많아 소경이 된 것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예수님은 "부모의 죄도 본인의 죄도 아니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니라"고 말씀하시고 침으로 흙을 이겨 눈에 발라주고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셨는데 그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이와 같은 결과를 두고 유대인들이 반응하기를 그 소경을 보고는 성경에 "믿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소경된 자가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보느냐 라며 못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네가 어떻게 해서 눈을 떴느냐?" "예, 예수라는 사람이 이렇게 해서 눈을 떴습니다." "그래, 그가 어디 있느냐?" "어디에 있는 줄을 모릅니다. 어쨌든 그 분 때문에 제가 눈을 떴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발끈합니다. "네 눈을 뜨게 해 준 그 사람은 죄인이야. 안식일을 범했어. 안식일날 이 일을 했어. 이 예수를 그냥 둘 수가 없어" 하고는 예수님을 찾아다닙니다. 이 눈 뜬 이 사람의 부모를 찾아가서 "이 애가 당신 아들이 맞소?" "맞습니다." "이 애가 본래 소경된

애인가?" "맞습니다. 그런데 눈을 떴습니다." "그 눈을 띄워준 예수가 지금 어디 있소?" "나는 모릅니다. 본인한테 물어보시오" 그래서 다시 본인을 붙잡고 물어봅니다. "얘, 네가 눈 뜬 게 맞지? 네가 그 아들이 맞지?" "맞습니다" "네 눈을 띄워준 그 예수가 어디 있느냐?" "저는 모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요한복음 9장 25절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그 사람이 죄인인지 아닌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것입니다." 내가 눈을 떴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는 기적을 일으켜도 믿지 못합니다. 이 소경의 눈을 띄워준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범한 죄인으로 몰고 가서 잡아죽이려고 하는 이 유대인의 행태를 여러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전혀 믿지 못하고 있는 이런 상황의 사람들을 상대하여 "내가 천국에 이르는 길이니라. 내가 영생의 길이니라. 내가 너희들이 믿을 진리니라. 내가 영원한 생명이니라. 나를 믿으라" 이렇게 주님이 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의 위협이 있는데도 복음이 증거될수록 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이 일어나고 38년 된 병자를 일으키는 기적을 일으키는데도 유대인들의 마음은 점점 굳어져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전혀 가까이 가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현실문제를 풀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생명이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그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지금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이것은 유대인들을 잘 되게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메시야를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영생을 얻으라고 주님이 목숨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이 문제는 그냥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구원의 확신을 가진다는 이 문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일을 해야만 확신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혼동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마땅히 할 일을 못하기 때문에 '아, 나는 확신이 없는가 보다'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될 그 일을 안 하면 믿음이 성장하는데 지장이 옵니다. 기도를 게을리 하고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살지 않고 선한 일을 행치 아니하면 내 믿음의 성장에는 그것이 해가 됩니다.

  시체를 살린 것이 구원이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구원은 그리스도인으로 할 일을 등한히 하기 때문에 확신이 없고 할 일을 하기 때문에 확신에 이르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구원의 문제는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면 우리는 구원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행위를 가지고 구원에 연결을 하기 때문에 '나는 할 일을 하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평가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할 때 성경에 우리를 가리켜서 "죄와 허물로 죽은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기절상태가 아닙니다. 구원받으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어떤 대목에 가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사렸습니다. 무덤 안에 있는 나사로를 살렸습니다. 이렇게 극화를 해 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릴 때 "나사로야, 너 준비운동 좀 할래? 너 눈 한 번 떠봐. 내 말 들려? 오른팔 올려봐. 왼팔 올려봐. 오른다리, 왼다리 올려봐. 엎드려 봐. 허리 펴봐. 걸어나올 만 하지? 이제 걸어나와 봐." 예수님이 그렇게 살린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가 어떤 상태 가운데 살렸습니까? 죽어있는 시체를 주님이 일으켰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에서 구원받았다는 말입니다. 적당하게 구원받을만 할 때, 선한 일을 하고 있을 때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불교를 비롯한 범신론의 사상은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면 신의 경지에 이른다고 가르칩니다. 마음을 잘 다스리면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범신론의 철학입니다. 맹자의 성선설과 성악설 가운데 성선설은 인간에게 본성적으로 선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교철학 가운데 인간은 근본적으로 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의가 있거나 선한 일을 했거나 구원받을 만한 조건이 있는 상태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와 허물로 죽은 시신을 살렸다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시체들입니다. 시체를 살려낸 것이 구원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영적으로 시체들입니다. 예수님이 와서 소경의 눈을 띄어주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메시야임을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유대인은 모르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시체입니다. 우리가 혼돈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이미 살아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살아난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에 이른 사람입니다. 산 사람은 움직입니다. 산 사람은 느낍니다. 느끼는 것은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에 대하여 의심하지 말기 바랍니다.

  살았기에 느낀다

  우리가 병원에 치료를 받으려 갑니다. 살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더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치료를 받으려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병원 갈 때마다 오늘 살아야 된다고 한다면 죽은 사람이 어떻게 병원에 갈 수 있습니까? 죽은 사람은 병원에 갈 수가 없습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오면서 구원받아야 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교회에 올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일날 단풍놀이를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절벽을 타다가 떨어질 수도 있겠다고 마음이 듭니다. 예수님을 비난하고 교회를 비난하는 소리가 듣기 싫을 것입니다. 그 소리가 듣기 싫다면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안에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지 못하면 솔직하게 교회에 오면 위축이 되고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내가 충성을 해야 하는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할까?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죽은 시체는 그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잘 믿어보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움직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솔직히 이런 비유를 해 봅시다. 건강한 시체와 아주 중병이 들어있는 사람과 누가 힘이 있습니까? 죽은 호랑이와 애완용 강아지와 누가 힘이 더 셉니까? 호랑이 입에도 들어가고 위에도 올라갈 수 있는 강아지가 더 힘이 셉니다. 죽은 알렉산더보다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가 더 셉니다.

  여러분, 우리는 산 자입니다. 살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살았기 때문에 예배를 드립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의심을 합니까? 믿음이 자라는 문제와 구원받는 문제는 다른 것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잘못하기 때문에 구원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자라지 않은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믿음이 자라는 것은 회개하고 용서받고 연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못한 것은 회개해야 됩니다. 그것은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해지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믿음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해지기 위해서 할례를 하는 것이지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맺는 말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자입니다. 감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느낌이 옵니다. '내가 이렇게 생활해서는 안 되는데' '좀 더 노력을 해야 하는데' 하는 감각이 옵니다.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산 자는 느낍니다. 산 자는 촉각을 가집니다. 전신마취가 되어 있는 사람을 보고 '눈을 떠보아라. 귀에 들리냐' 라고 한다면 통하지 않습니다. 마취에서 깨어나는 것이 문제입니다. 생명에서 깨어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죄인 될뻔한 상태에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죄인으로서 구원받았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에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 생명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들에게 생명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명이 교회 위에 위임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으로 인하여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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