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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 (롬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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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정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고통이 이렇게 그치지 않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그치지 않는 바울의 고통은 아마도 먹고사는 그런 유의 고통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잘 입기 위해서, 잘 살기 위한 고통이 아닙니다. 바울이 지니고 있었던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은 우리가 부정적으로 보아서는 해석이 잘 안됩니다. 우리들에게 아주 부정적인 고통이 많습니다. 없어도 될 고통이 우리에게 불가피하게 지금 많이 다가옵니다.

  사람마다 이렇게 고통이 있는데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는 고통은 두 가지 성격이 있습니다. 하나는 영원한 것을 위한 고통입니다. 또 하나는 신령한 것을 위한 고통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통은 육신을 위한 고통의 문제가 아니고 영원한 것, 신령한 것을 위한 고통입니다. 그런데 이 고통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면 동족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목숨을 건 소원

  본문 1∼3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골육의 친척은 유대인을 말합니다.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서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나는 원하는 바이다 라는 말입니다. 자기 동족의 구원을 향한 열정이 내가 그리스도에게 끊어질지라도 그것을 감수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은 동족 구원에 대한 열정이 깊었습니다. 그가 선교를 하면서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지만 그 골육의 친척이 구원받는 것을 나는 원하는 바이다 라고 했는데 여기 원한다는 동사는 시험적으로 원한다, 기원적으로 원한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냥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내가 한 번 시험을 해보고 싶다, 내가 그리스도 앞에서 끊어지는 저주를 받아 사망에 이를지라도 내가 동족의 구원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2장 32절에 보면 모세도 동족의 사죄를 위해서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목숨을 건 소원입니다. 목숨을 걸고 동족의 구원을 원하고 있는 바울의 복음의 열정입니다. 이것을 분석해 보면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애에 머물지 않습니다. 바울이 자기 동족이 구원받는 것을 그토록 원하는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복음을 사랑하는 복음애가 더 앞서는 것입니다. 민족보다도 복음이 더 중요하다, 이 복음을 모르는 자기 민족을 위해서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 끊어지는 희생이 있다 할지라도 이 귀한 복음을 통해서 자기 민족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 대한 메시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에 관한 이런 메시지가 자주 나오지 않습니다. 또 나오더라도 일반론적인 구원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복음이 말하는 구원,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는 구원의 본질에 대해서 바른 이해를 가져야 믿음의 확신에 이르고 믿음의 기쁨을 누리게 되고 구원받은 자의 삶의 성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시체가 살아난 것이 구원이다

  우리는 죽은 시체로서 살아난 존재입니다. 내가 예수믿고 구원받았다는 말은 죽은 시체가 살아 일어났다 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영적으로 적용된 게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 완전히 죽은 존재인데 죽은 시신이 벌떡 일어난 게 구원이다 이렇게 기독교의 구원을 접근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무엇 때문에 동족을 믿게 하는 그 일에 목숨을 거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무엇이 부족해서 자기 민족이 예수 믿고 구원받는 거기에 그렇게 집중하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동족이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모함을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도와주지는 않을지라도 방해는 말아야 되는데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바울을 이단자로 모는 것입니다. 유대주의 자들이 볼 때는 바울이 복음의 적이고 율법의 적입니다. 바울을 죽여야 우리가 갖고 있는 율법이 보전이 된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저놈을 죽여야 된다고 알려주는 게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이 원수, 유대인을 향해서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너희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기 바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목숨을 거는 구원, 바울이 그토록 부르짖고 있는 구원이 얼마나 소중하길래 그렇게 말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움은 우리가 감히 접근 못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우리는 불가해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이 이렇게 말한다는 신학은 말할 수 있는데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 자체는 우리가 설명할 수도 없고 연구할 수도 없고 분석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 하면 그런가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지 하나님의 전지전능이 어떤 것인지를 분석하지 못합니다. 구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은 죽은 시체를 살린 것인데 그것을 우리가 본질적으로 이해를 못합니다. 왜 하나님이 나 같
은 것을 구원시켰는가? 그것은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에 대해서 부질없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특히 이단자들이 구원에 대해서 아주 묘하게 접근을 합니다. 이단은 구원에 있어서 예수님 외에 다른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말고도 구원에 이르는 방법이 있다고 제안합니다. 신학적으로 세대주의가 있습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성경 해석을 잘못하는 게 아주 많습니다. 이단자들도 세대주의 이론을 많이 빌려서 사용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대주의자들의 이야기를 그냥 따라가면 큰일납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가 맞는 것 같구나 싶지만 성경하고 맞지 않습니다.

  세대주의 구원론은 잘못이다

  세대주의자들은 구원에 대해서 이런 논법으로 이야기합니다. 구약에는 율법이 있고 신약에는 복음이 있다, 구약시대의 사람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았고 신약시대의 사람들은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이렇게 구분을 시킵니다. 이처럼 세대주의자들은 구분을 잘합니다. 역사도 일곱 단계로 구분해서 지금은 마지막 천년기에 들어섰다, 그러니까 지금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할 것이다 라고 적용합니다.

  이 사람들은 구원을 설명할 때 이렇게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를 주시고 그것을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선악과를 안 먹으면 구원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으므로 구원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구원을 누리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실패한 이 인생을 하나님이 구원시키기 위해서 구약의 율법을 주셨다, 그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이 율법을 행하는 일을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받게 했다 이렇게 설명합니다. 구약이 있고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 이후에는 하나님이 복음을 우리에게 주셨다, 에덴동산에는 선악과가 있고 구약시대에는 율법이 있고 예수님 시대는 십자가가 있고 예수님 이후는 복음이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선악과를 통해서 인간이 실패하니까 율법을 주셨다, 율법으로 실패하니까 십자가를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게 하셨다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이것은 성경적으로는 안 맞는 것입니다. 여러분, 에덴동산이 있고 모세시대가 있고 십자가가 있고 하는 것은 역사 속에서의 순서입니다. 그런데 순서는 두 가지 순서가 있습니다. 하나는 계획순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순서가 있습니다. 쉽게 예를들면 교회건축을 하겠다 하면 계획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건축을 할 때 제일먼저 계획해야 될 것은 부지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부지를 확보하는 이 계획은 하지 않고 설계부터 한다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부지를 어떻게 확보할 것이냐, 어느 정도 건축을 할 것이냐에 따라 설계를 하고 감리를 하는 계획순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시행해보면 계획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시간순서라고 합니다. 그런
건축이 많습니다.

  땅을 파보니까 밑도 끝도 없는 구렁텅이가 나온다든지 생각지도 않은 암반이 나온다든지 이렇게 될 때는 계획에 차질이 옵니다. 시행하는 시간과 계획한 것과는 안 맞아떨어집니다. 사실 우리가 건축허가를 받아서 시행한다고 해서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땅을 파보면 다른 사태도 일어나고 민원도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중장비도 동원해야 되는 등 계획순서와 시간순서가 안 맞는 게 많습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로 실패하니까 율법을 동원하고 율법으로 실패하니까 십자가를 동원해서 우리를 구원시켰다고 설명한다면 하나님의 전능성과 신비성과 그의 영원하신 능력에 대해서 모독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한 가지를 실패하니까 또 다른 계획을 주시고 실패하니까 또 다른 계획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창조때부터 하나로 묶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한 가지 방법, 영원토록 불변한 방법으로 창조때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는 구원계획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기독교의 구원계획을 모릅니다.

  처음부터 예수가 구원이다

  하나님은 시작과 끝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면 빛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으라고 하면 그 과정은 어떻든 간에 결과는 있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실패했기 때문에 다시 한다는 게 아닙니다. 선악과를 우리 조상들이 안 따먹었으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구원의 상태가 그대로 유지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차이가 무엇입니까? 한 가지 차이밖에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안 따먹고 하나님 말씀만 지켰으면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와서 십자가를 지는 일은 필요 없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죄 값을 속죄해 주심으로 우리가 구원에 이르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구원에 이르는 것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은 별개가 아닙니다. 다 같은 것입니다. 에덴동산에도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에덴동산의 구원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22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데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에덴동산에 또 다른 나무가 있었는데 그것은 생명나무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하신 하나님이 다른 실과는 안주고 굶어죽도록 하신 게 아니고 너는 생명나무 실과를 먹고 영생하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 영생했으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조상이 생명나무만 먹지 않고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한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사는 것도 생명나무 실과를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생명나무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이것을 신약의 요한계시록에서도 그대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늘나라 가면 식생활이 있을까요? 하늘나라 가도 신령한 식사가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 때문에 맛보지 못했던 생명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에서부터 영생은 생명나무로 하나님이 설정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영생하는데도 생명나무 실과를 먹어야 됩니다. 이 생명 자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생명입니다. 에덴동산에도 생명나무 실과를 먹어야 영생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천지창조 때부터 똑같이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외에는 구원받을 이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게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게 결론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시작과 끝을 함께 소유하신 분입니다. 구원의 방법도 에덴동산부터 영원까지 영생의 길은 생명나무 열매란 말입니다. 생명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영생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제가 아는 닥터 한이라는 분은 최고 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5년간 유학을 한 의과대 교수요 누구 앞에서도 당당한 한 사람의 의료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암에 걸려 죽음을 맞이할 때 제가 옆에서 보았습니다. 명문대학 나오고 유학 갖다 오고 박사라는 이런 것이 죽음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죽음 앞에서 벌벌 떨던 그의 영혼이 안정을 찾고 편안하게 그 죽음을 맞이하는데는 오직 예수이름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 외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이 진리를 바로 인식한 바울은 그 복음이 너무 귀해서, 동족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는 그 사실이 너무 안타까워서 내가 차라리 저주를 받을지라도 너희들은 예수 믿고 구원받기 바란다는 게 지금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에서부터 예수님의 생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 예수님의 구원의 방법은 항상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세 시대도 다윗 시대도 어느 시대도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의 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제사제도에 나타난 구원

  구약의 제사방법을 보십시오. 양이나 암송아지나 염소를 가지고 와서 그 제물 위에 안수하고 죽여 피를 흘려서 그 제물을 단에 올려 불살라 속죄제를 드림으로 죄 사함을 받은 제사법입니다. 그런데 대신 죽는 이 짐승이 내 죄를 용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짐승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 중 어느 것이 귀합니까? 어떻게 짐승의 생명이 사람이 죄를 씻을 수가 있습니까? 값으로 따져도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구약이 제사법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죽은 이 짐승의 피가 너의 죄를 용서한다가 아니고 이 짐승이 앞으로 너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너의 죄 값을 치를 메시야를 상징하는 그 고백적 계시를 눈으로 봄으로서 마음으로 믿게 하는 것입니다.

눈으로는 지금 양이 죽어서 피를 흘리는데 마음으로는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실 메시야를 믿게 하는 방법이 제사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양을 죽여서 속죄를 받는 게 아니라 이 양이 나를 위해서 대신 죽듯이 내 죄를 대신 속죄하실 메시야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게 제사라는 것입니다.
  제사제도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인식은 죄 값은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양과 염소가 내가 지은 죄 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죽어야 된다, 즉 죄 값은 죽음이다 라는 것을 고백하는 게 제사법입니다. 그리고 그 죄 값은 내가 지불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대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하는 것이 짐승들이 대신 죽지만 그 짐승이 백만마리가 죽어도 한 사람 인간의 죄를 속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의미상 메시야가 우리의 죄 값을 대신 해결함으로 우리는 죄 용서함을 받는다고 하는 속죄의 사상을 가르쳐 주는 구약계시가 제사법이라는 것입니다.

  구원 이후에 필요한 믿음

  그러므로 바울이 그토록 자기 목숨을 담보하여 외쳤던 복음의 전도, 이것이 오늘 교회가 위임받은 사명입니다. 우리가 바울의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예수를 믿어야 된다는 것, 내 친구이기 때문에, 내 가족이기 때문에 하는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복음으로 인하여 당신이 믿고 구원을 받는다면 내가 차라리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아 끊어질지라도 나는 그것을 원한다, 복음을 전하는 사명은 목숨을 담보할 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바울이 우리 앞에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측면으로 믿음을 첨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자는 구원받은 자의 의무가 따릅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선물로 주셔놓고 받았으니까 그냥 조용히 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구원받고 나서 우리 믿음이 강해져야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열정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외침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복음이 증거되는 이 사역을 위해서 교단적으로 교회적으로 한국교회 전체가 새로운 인식을 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 믿음이 강해짐으로서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한 확신과 즐거움이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자는 후자로 말미암아 확신에 이르는 것이고 후자는 전자를 확신의 자리로 이끌어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학시험을 쳐서 합격을 했다고 하면 이 합격한 것이 내게 복이 되고 유익하려면 합격한 이후를 잘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합격을 해놓고 공부를 못하든지 낙제를 하든지 불미스런 일로 퇴학을 당하면 합격한 자체가 욕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으면 믿음으로 살아야 우리가 받은 구원이 내게 더 기쁨이 되고 확신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헌금도 예수 믿고 난 이후에 일이 잘 되기 때문에 감사하는 율법적인 감사가 아니고 우리 감사의 근거는 내가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은데 근거를 두는 신앙적인 감사를 해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됨으로 인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맺는 말

  그러므로 우리의 희생도 수고도 봉사도 그 뿌리는 전부 구원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전을 건축한다고 하면 내 개인의 구원에다 출발점을 두어야 하고 내가 받은 이 구원을 우리 교회를 통해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증거하는 이 복음사역을 위해서 성전건축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성전건축은 세상 집을 짓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지 크리스찬의 행동의 근거는 구원에 두어야 합니다. 구원받은 이 은혜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은데서 살아났는데 그것을 잊어버리면 됩니까? 죽은데서 살아난 그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의 구원은 완전히 죽은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그 기쁨을 우리가 가져야 복음을 말하는 것도 의미가 달라집니다. 내가 받은 구원에 대한 긍지가 있고 기쁨이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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