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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알지 못한 계획 (렘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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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전하기 원하시는 말씀이 어떤 것일까 기도하던 중에 본문 말씀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벧후 1:10)고 했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다시금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레미야는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나 요시야 13년(B.C. 627)부터 시드기야 11년(B.C. 586)까지 약 40년 동안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 시대의 유다는 도덕적, 영적 상태가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백성들과 관리들뿐 아니라 제사장들조차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우상을 좇았습니다. 그 사회는 회복의 소망이 없고, 단지 심판과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4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한 사람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은 갑자기 부패한 시대를 뒤엎는 혁명적인 방식으로 역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조용히 한 사람에게 당신의 말씀이 임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나 동일한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열 명의 사사, 사무엘, 마리아, 세례 요한, 12사도들이 부름 받았을 때도 어둡고 힘든 때였습니다. 각 시대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에게 당신의 말씀이 임하게 하셨고, 말씀을 통해 그에게 두신 하나님의 놀라운 뜻과 계획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한사람을 구별하시고 하나님 역사의 특별한 일을 위해 쓰셨습니다.

로마가 심각한 도덕적 부패로 멸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거스틴에게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는 말씀으로 임하셨습니다. 온갖  미신과 신비주의로 오염되었던 중세의 암흑 속에서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말씀으로 루터에게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한 사람에게 말씀으로 임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당신께서 두신 뜻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도 예레미야 시대와 다를 바 없습니다.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2003년에 304.9천 쌍이 혼인했고, 167.1천 쌍이 이혼했습니다. 1일 평균 835쌍이 혼인했고, 458쌍이 이혼한 셈입니다. 또 2003년 사망자의 사망원인 조사에서 암, 뇌혈관 질환, 심장질환, 당뇨에 이어 5위가 자살이었습니다. 특히 20-30대의 사망원인은 질환이나 사고보다는 자살이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상실하게 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지리라는 기대감조차 주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암울한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뜻과 계획을 발견하고, 그 뜻대로 살아갈 사람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어떤 뜻을 두셨습니까?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5) 열방의 선지자란 세계 만민에게 하나님의 말씀, 그분의 뜻과 계획을 선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시골 제사장으로 조용히 살아갈 예레미야를 그 시대 전체의 운명을 예언하는 역사적이고 세계적인 인물로 이미 세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한 사람에게 두신 뜻과 계획은 너무나 크고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캄캄한 밤중에 점화된 작은 불꽃과 같아서, 가장 절망적인 밤에도 희망의 빛이 됩니다. 어둠속에서 외롭게 고민하고 갈등하는 사람의 앞길을 밝혀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슬픔과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위로를 줍니다. ‘귀차니즘’으로 얼어붙어 있는 마음을 활짝 열고 밝은 햇살을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암울한 세상에 살지라도 모든 역경들을 넉넉하게 이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말씀을 체험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의 단맛에 빠져 그 유익을 즐기도록 부르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께서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말씀을 도피처로 삼아 편하게 살다가 죽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부르실 때는 언제나 원대한 꿈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한 아이의 아비로 살기 원했던 아브람을 열국의 아비로 삼으셨습니다. 라헬이라는 한 여인에게 마음이 빼앗겨 있던 야곱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목동으로 지내던 다윗을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소심한 기드온을 큰 용사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생각이나 계획보다 더 위대한 생각과 계획을 가지고 부르십니다. 그것이 부르심의 특징입니다.

사실 예레미야가 열방의 선지자가 된 것은 자기 소원이나 자기 선택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꿈이나 이상이 아니었고, 자기 노력의 결과도 아니었습니다. 사람이나 단체가 지지해 주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일방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가끔 ‘그 때 ○○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다른 삶을 살고 있을 텐데’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 순간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미 부르실 사람들을 향한 위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구체적으로 부르시고 인도하셔서 자신의 뜻을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부르심은 불가항력적인 은총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예레미야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6) 당시 예레미야는 20세였습니다. 시골 제사장이 되려고 해도 10년은 더 기다려야 합니다. 열방의 선지자가 되기에는 너무 어렸고 경륜도 부족했습니다.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미성숙했습니다. 시대 문제를 분석하여 해법을 제시해 줄 수 있는 통찰력도 없었습니다. 가진 권세나 능력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열방의 언어도 제대로 구사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가슴을 뛰게 했지만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자기 모습을 보니 슬펐습니다. “하나님 보십시오.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 저는 아직 너무나 어립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7)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모태에 조성하신 이유는 열방의 선지자로 쓰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예레미야의 존재 목적입니다. 만약 예레미야가 열방의 선지자로 살기를 거부한다면 그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의미가 없는 삶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담스러워하는 예레미야에게 어떤 자세로 부르심을 감당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스스로 아이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접할 때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적당한 인물이 아니라고 변명합니다. 모세도 자기는 입이 뻣뻣하고 둔하여 말에 능치 못한 자라며 변명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고 꾸짖으셨습니다. 자격과 조건을 이유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입니다. 언제나 변명할 것을 찾으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 조건을 변명하다보면 20년이 더 지나 40세가 되어도 ‘이 나이에 무엇을 시작하겠습니까?’라고 변명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부르실 때는 환경과 자격에 관한 모든 변명을 버려야 합니다. 부르신 하나님께서 감당할 수 있는 힘도 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예레미야 스스로 숨은 능력을 개발하여 실력을 발휘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원하시는 것은 순종입니다. 자기를 온전히 비울 때는 아주 쉽지만, 자기 욕심과 자기 계획이 많을 때는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것이 순종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이’라는 것이 오히려 장점이 됩니다.

선지자는 자기의 계획을 따라 자기의 지혜로 자기의 사상을 전하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전령’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를 비우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가라하시는 곳으로 가고 전하라 하는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자기 꿈과 자기 계획과 다를지라도 순종해서 하나님의 꿈과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는 것입니다. 낮은 곳으로 가라 하면 낮은 곳으로 가고, 높은 곳으로 가라 하면 높은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 때에 나머지 문제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사람마다 능력에 차이가 있었지만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지난 목자 생활을 돌아볼 때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가장 필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많고 적음을 떠나 순종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굵고 짧게 사는 인생’에 대한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적게 먹고 가는 똥 싸다가 죽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도 그저 한평생 소박하게 살려고만 할 뿐, 특별이 어떤 분야에서 탁월하고자 하는 욕심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 부부는 마음이 잘 맞습니다. 그러나 일련의 힘겨운 사건들을 겪으면서 그는 자기가 만족할 수 있는 소박한 삶보다 훨씬 위대한 삶으로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존감이 낮았던 그는 늘 자신에 대해서 미련하고 약하다는 평가를 했기 때문에 리더로서 영향력 있는 삶을 살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였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입니다’(경상도 버전).

그런 그에게 고린도전서 1:27-28절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그는 하나님은 이 말씀 앞에서 ‘나는 아이라’고 변명하며 불순종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눈물을 쏟으며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비록 자기는 한없이 부족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전적으로 자신의 삶을 맡기고 그 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살기로 하였습니다.

이것은 저의 이야기이지만 여러분의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이 시간 환경조건이나 인간조건을 변명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굳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순종임을 믿습니다.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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