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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리에 속한 자 (요 18:28-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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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를 돌아보면 한 가지 신기한 일이 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이단들이 등장했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에 주목했고, 그 가르침의 한 부분을 매우 강조하며 실천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도 결국 이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빌라도는 종교지도자들이나 유대인 무리들보다는 훨씬 예수님 편에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석방하기 위해 고민하며 나름대로 무척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자기의도와는 반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고 맙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이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다가도 결국 빌라도처럼 되지는 않을까를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빌라도의 관점에서 본문을 따라가면서 이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28절부터 보겠습니다. 종교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내린 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 총독부로 끌고 갔습니다. 사형 집행 권한이 있는 빌라도의 힘을 빌기 위함이었습니다. 더럽힘을 받지 않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했기에 이방인이 거하는 총독부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의식적인 정결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자신보다도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종교적 행위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에는 거짓이 가득하여 예수님을 죽이려 하면서도 의식적인 정결에 신경을 쓰는 위선자가 되었습니다.

빌라도는 꼭두새벽부터 불쾌한 기분으로 그 거룩하신(?) 유대인 나리들을 만나러 관정 밖까지 나와야 했습니다. 빌라도는 무엇 때문에 고소했는지 의례적으로 한 마디 물은 후, 유대인들의 법대로 재판하라고 떠넘겼습니다. 마태복음(27:18)에 의하면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시기심 때문에 예수님을 넘겨준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한 번 척 보고도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할 만큼 빌라도는 상황 판단력이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심하고 사형 집행권을 얻기 위해 찾아온 유대인들은 순순히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떠넘기기에 실패한 빌라도는 다시 관정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불러 일대일로 심문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3),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35).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단지 정치적으로 어떤 소요를 일으킬 만한 사람인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주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해 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6). 알쏭달쏭해진 빌라도는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왕이심을 밝히고, 어떻게 하면 빌라도도 그 나라에 속할 수 있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37) 예수님은 빌라도가 주님의 나라와 그 나라에 속하는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말씀해 주셨습니다.

빌라도는 심문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왕 앞에 꿇어 엎드려야 할 것 같은 입장에 처했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심문해봤자 기분이 좋을 리가 없게된 셈입니다. 빌라도는 진리라고? “진리가 무엇이냐?”(38)하며 퉁명스럽게 한 마디 던지고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유대인들에게로 다시 나갔습니다. 아마 그는 예수님을 현실성 없는 몽상가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신비한 위엄을 갖추기는 했지만, 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었고, 당장 십자가에 넘겨질지도 모르는 판국에 진리 따위를 운운하고 있다는 것을 한심스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정치적인 위험성은 없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는 심문 결과를 유대인들 앞에 선포했습니다.

무죄라고 판정했으면 곧바로 석방하는 것이 재판관으로서 진리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진리를 좇아 공의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진리를 행하는 것보다는 당면한 문가 정치적인 소요로 확대되지 않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총명한 빌라도는 사형판결을 바라고 새벽같이 찾아온 유대지도자들의 뜻을 그냥 묵살해버리면 마찰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고려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예수님을 죄인으로 접수한 후에 유월절 특사로 방면하는 묘책을 고안해 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시기로 예수님이 넘겨졌다면, 무리들은 예수님의 석방을 요청하리라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빌라도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이 무리들을 매수해서 정치범이었던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요청하게 했기 때문입니다(마 27:20).

결국 빌라도는 자기 꾀에 넘어갔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무죄한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 했습니다(19:1). 채찍질은 여러 가닥의 가죽 줄 끝부분에 뾰족한 뼈 조각이나 쇠 조각을 달아놓아 때릴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오게 하는 무서운 고문이었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가시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혀 왕처럼 꾸며놓은 다음 때리며 희롱했습니다. 그런 후에 빌라도는 만신창이가 된 예수님을 다시 무리 앞에 데리고 나왔습니다(4). 이정도로 때렸으면 무리들이 만족할 줄로 생각했습니다. 처참한 예수님의 몰골을 보면 무리들도 생각이 바뀌어져서 동정표를 던지리라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은 마치 피 맛을 본 이리떼들처럼 더욱 거세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소리 질렀습니다. 집요하고도 무서운 그들의 외침에 빌라도는 질려버렸습니다.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6) 빌라도는 더 이상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는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그가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계속 흘러갔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했다는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로마의 신화에서는 흔히 반신반인 같은 신의 아들이 땅에 나타나기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정말 초자연적인 존재라면 그런 존재를 처형함으로서 화를 자초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님께 “너는 어디로서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이상 대답하여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는 자존심도 상하고 화도 났습니다. 그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벌벌 떨었을 것입니다. 무죄한 자들은 자기의 죄 없음을 주장하면서 빌라도에게 풀어주기를 간청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기세등등했던 사람도 채찍에 맞고 난 이후에는 기세가 꺾이고 목숨을 애걸했을 것입니다. 모두가 빌라도의 권세를 스스로 알아보고 설설 기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의 권세를 전혀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질문하면 순순히 답변하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빌라도는 자기에게 있는 막강한 권세를 광고해야만 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술 더 떠서 권세의 근원에 대한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11).

빌라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궁지에 몰렸습니다. 죄 없는 자는 석방하겠다는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갈등하는 빌라도를 보고, 무리들은 빌라도를 협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무리들은 빌라도에게 매우 위협적이고 자극적인 언어들만 골라서 사용했습니다. 당시 황제 티베리우스는 적수에 대하여 잔인하고 의심 많기로 악명이 높은 자였는데, 빌라도는 여러모로 황제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잘못하면 정치적 생명이 끝장날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서자, 빌라도는 드디어 재판석에 앉아 정식 판결을 내릴 준비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피 흘리는 예수님의 처참한 모습을 보이면서 “보라 너희 왕이로다”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대제사장은 빌라도의 정치적 약점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그 약점을 끝까지 물고 늘어졌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 주니라”

빌라도를 생각할 때마다 ‘진리’를 외면하고 ‘실리’를 추구하다가 하나님 나라에서 ‘격리’되고 만 인물이라고 평가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두려워지는 것은 우리도 언제나 진리보다 실리를 선택하고자 하는 유혹에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총명한 인물이었습니다. 상황 판단이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도 뛰어났습니다. 짧은 순간에,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만큼 창의성도 뛰어났습니다. 12절은 그가 예수님을 놓으려고 힘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호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진리 되신 주님을 대면하고서도 그 분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알았다면 그는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실리를 좇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리를 알았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청할지라도 공의롭게 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대세에 휩쓸려 가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진리를 알았다면 현실적으로 많은 손해가 있을지라도 기꺼이 감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현실적인 유익을 따라 판결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에게는 진리이신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진리이신 예수님의 소리를 듣고 그분께 속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끝까지 자기의 정치 생명에 관심을 두다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사의 수많은 이단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 호의적인 생각을 가졌지만 근본적인 관심이 예수님보다는 다른 것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윤리에 기초하여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통은 항상 예수님 자체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그분이 왕이심을 알고 그 분께 복종하기에 힘썼습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비슷할지라도 ‘관심의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가 신앙의 형태를 결정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37)라고 하셨습니다. 진리에 속한 자는 실리를 좇고 대세를 따르기보다 왕이신 주님을 알고 그 분의 말씀에 복종하는데 관심을 둡니다. 언제나 진리에 속한 사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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