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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섬김의 축복 (막 10:3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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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에서 자란 사내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깥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는 길이 없었고 돈도 없었습니다. 오직 거대한 산과 울창한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아이는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러더니 도끼를 한 자루 가져와서 날을 갈고 다듬었습니다. 엄마가 물었습니다.
  "왜 도끼 날을 세우고 있니?"
  "나무를 베서 길을 만들 거예요."
  "길을 만들어서 뭘 할 건데?"
  아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바깥 세상으로 나갈 거예요."
  엄마는 마음이 아프면서도 아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아이는 숲 속에 길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벤 나무를 팔아서 여비를 모았습니다. 아이가 떠나기 전에 엄마가 물었습니다
  "얘야, 다시 돌아오겠니? 집에 돌아올 때 길을 잘 찾아올 수 있겠니?"
  아이가 엄마 손을 꼭 잡고 대답했습니다.
  "꼭 돌아올게요. 제가 낸 이 길을 따라서요."
  아이는 그렇게 떠났습니다. 아이가 떠난 후, 다른 사람들도 도끼 날을 세워 나무를 벴습니다. 그들은 사방팔방으로 길을 내고 바깥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른이 된 아이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산밑으로 왔을 때는 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산은 거의 벌거숭이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느 길이 자신의 떠나왔던 길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모든 길이 그 길인 것 같았고, 또 아닌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고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나무를 심느냐, 아니면 베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나무를 베려고 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나무를 심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드뭅니다. 심지 않으면 언젠가는 벌거숭이가 되어 나무를 베지 못합니다. 한계가 옵니다. 심는 사람이 많으면 모든 것이 풍성해지고 넉넉해집니다. 섬김은 계산하지 않고 심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들만 있으면 세상은 너무나도 삭막하고 쌀쌀합니다. 기쁨과 감동이 없습니다. 섬김의 나무를 많이 심어 섬김의 숲과 삼림을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섬김의 감동과 축복을 체험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좌우편의 영광을 구하는 야고보와 요한
  본문 37절"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제자들이 이해한 메시야 왕국이란 몰락한 다윗의 왕권을 회복시키고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는 지상적 왕국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왕권을 예수가 수립했을 때 권력의 제2(우편)와 제3(좌편)인자가 되게 해달라는 간청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의 관심은 예루살렘의 입성과 함께 당하는 수난과 죽음에 있었고 야고보와 요한의 관심은 메시야적 왕권의 영광에만 있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인데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이 차지할 영광에만 심취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어느 지방에 이유 없이 이사를 자주 다니는 유대인이 하루는 랍비를 찾아와서 "랍비여! 나는 환경이 좋은 동네를 찾아 이사를 자주 다니는 습관이 있는데, 내가 이사를 가는 곳마다 그곳은 내가 뿌리를 내리고 살 수 없는 인간답지 못한 사람들이 가득 모여 사는 형편없는 동네만 만나게 되는데, 어디로 이사를 가서 살아야 될지 그곳을 저에게 꼭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정말 어질고 순박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소박한 동네로 이사가서 그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꼭 한 번 살고 싶습니다."라고 하소연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랍비는 유대인에게 "글세? 내가 그대에게 추천 할만한 곳이 별로 없을 것 같네!"라고 답을 했습니다. 그때 유대인은 랍비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럼, 저 산 넘어 동네에는 참 좋은 사람들만 부락을 이루고 산다고들 하는데 그곳은 어떨까요?"
  "이보게 그 동네에는 제발 이사 가지 말게! 그 동네는 곧 형편없는 동네로 변하고 말 것일세!"
  지금은 비록 소박하고 어진 사람들만 있어서 이웃끼리 음식도 나누면서 다정한 정을 이어가며 살아가지만 이젠 조금 있으면 서로가 서로를 시기하고 의심하고 헐뜯는 사악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선생님은 그 동네를 아주 잘 알고 계십니까?"라고 묻자,
  "아니. 잘 알지는 못하지만 자네가 만약 그 곳에 이사를 간다면 아마 그 동네는 머지않아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며 싸우는 형편없는 동네로 변하게 될 것만은 내가 확실히 알지!"라고 대답했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 예화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글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평온하고 소박한 이웃들이 나로 인하여 분쟁과 소요가 없었는지, 내 생각만 옳고 나의 주장만 최선책이라고 지금껏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지나온 삶의 도정을 다시 한 번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고집스런 말과 행동들이 상대의 가슴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는지에 대해서도 자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우리들이 치러야 할 대가와 십자가는 지지 않고 이익과 영광만을 요구하는 야고보와 요한의 모습으로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마땅히 최고의 칭찬과 대접과 자리와 박수는 내가 받아야 한다고 교만하지는 않습니까? 섬기지는 않고 좌우편의 영광만을 주장했던 야고보와 요한이 바로 여기에 있는 '나'이었음을 고백하고 회개하면서 섬김의 자리로 돌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분히 여기는 열 제자
  본문 41절"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야고보와 요한을 제외한 나머지 열 제자들이 두 제자의 좌우편의 영광을 구하는 이야기를 듣고 분개하는 장면입니다. 제자들간에 심각한 갈등과 분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열 명의 제자들이 분히 여긴 이유는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례한 요구를 했다기 보다는 자신들도 야고보와 요한처럼 똑같은 권력에 대한 야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열 명의 제자들이 분노를 하였으나 야고보와 요한보다 더 나은 것이라고는 하나 없이 똑같이 권력의 노예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표현을 하고 안하고의 차이일 뿐 마음은 똑같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분노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를 분히 여길 수 있겠습니까? 인간에게는 분노할 수 있는 의와 자격이 없습니다. 또 다른 죄를 지을 뿐입니다.

  독일의 "뉴른 베르크"라고 하는 도시에 두 친구가 살았습니다. 이 둘은 모두가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집 모두가 가난하여 공부를 지속할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한 사람이 제안을 했습니다.
  "야! 네가 먼저 공부를 해라. 그러면 내가 돈을 벌어서 학비를 댈게! 그리고 대학 졸업 후에 네가 돈을 벌면 내 학비를 대줘."
  둘은 서로 굳은 약속을 하고 친구는 그림공부를 열심히 하고 또 한 친구는 돈을 벌어서 학비를 대주며 살아갔습니다. 그림을 계속했던 친구는 그림 실력이 놀랍게 발전하여 어느새 그가 졸업할 즈음엔 그의 그림이 한 두 점씩 비싼 값으로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졸업을 앞둔 친구는 자기를 위해서 희생하며 식당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졸업을 알리려고 찾아갔습니다. 마침 그 친구는 식당 한 구석에서 졸업을 앞둔 친구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제 친구가 졸업을 하게 된 것을 감사 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친구의 뒷바라지를 위해 여러 해 동안 식당 일을 하다보니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손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림을 못 그려도 괜찮으니 제 친구는 앞으로 위대한 화가가 되게 해 주세요!"
  친구를 위해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는 "기도하는 손"을 바라본 순간 그는 마음 속에 견딜 수 없는 감동과 고마움이 넘쳐났습니다. '나를 위해 기도하는 저 천사와 같은 친구의 손을 그려보자'라고 생각하고 그는 늘 갖고 다니는 가방에서 화선지를 꺼내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앨버트 뒤-러(1471~1528)의 "기도하는 손"이라는 작품으로 세계 모든 액자 상점에서 그림 액자나 조각 모양으로 상품화되어 기독교인들에게 지금까지 꾸준히 팔리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모습은 아마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일 것이며, 친구까지도 경쟁의 상대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많은 생각들을 갖게 하는 작품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열 제자들처럼 분노의 적대감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앨버트 뒤-러처럼 이해하고 사랑하고 기도하는 사람들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성숙으로 변화되어야 할 여러가지 분노가 우리 마음 속에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의 야고보와 요한을 사랑하고 기도하고 섬기는 성숙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신 예수님
  본문 45절"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가 이 땅에 성육신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고 섬기기 위함임을 밝힘으로서 따르는 사람들에게 섬겨야 하는 당위성을 제시하셨습니다. '섬기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노스'는 '분주히 먼지를 일으키고 다니는 자'란 뜻을 가지고 있어 결국 최선과 최고의 봉사를 아낌없이 쏟아 붓는 심부름꾼이라는 강한 인상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생명을 바쳐 죄인을 해방시켜 주는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몸값으로 자신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최고의 값을 치르셨습니다.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좌우편의 영광을 구하는 야고보와 요한, 분히 여기는 열 제자와는 대조를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과 구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은혜를 우리가 구원받았고 이 대속의 은혜로 우리가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은혜인 것입니다.

  40여 년 간 동독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습니다. 반면 서독은 자유민주주의 노선을 따랐습니다. 어느 날 동베를린 사람들이 한 트럭이나 되는 쓰레기를 서베를린 쪽으로 버렸습니다. 서베를린 사람들도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할 수 있었지만, 쓰레기 대신 캔에 담긴 음식, 빵, 그리고 우유 등을 차곡차곡 동베를린 쪽으로 쌓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쌓은 물건의 맨 위에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사람은 각자 자신이 가진 것을 주게 됩니다." 만일 배고픈 어떤 사람이 당신을 괴롭힌다면, 그에게 빵과 버터를 줍시다. 이는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빵과 버터를 주는 동시에, 그 빵에 잼을 발라서 줍시다. 이는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사랑이며 진정한 기독교입니다.

  소가 가장 무서워하는 말은 '소피보러 간다'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사탄이 가장 무서워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된 인간을 위해서 대속물이 되신 것입니다. 여기에 사랑과 능력, 죄사함과 구원, 영생과 천국이 있습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목숨을 대속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고 찬양하고 마음껏 전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좌우편의 영광을 구하는 야고보와 요한, 분히 여기는 열 제자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영광과 분노를 버리고 예수님처럼 섬기며 사는 섬김의 축복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김 정 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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