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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와 함께 하는 예수님의 비유연구 12> 소출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눅 2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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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지주와 소작농민

지금은 드문 일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소작농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소작농 제도란 많은 땅을 가진 지주가 농부들에게 땅을 떼어준 후 거기서 나는 소출에서 일정 분량을 소작료로 내도록 하는 제도인데 이 소작료를 올리느냐 마느냐를 놓고 지주와 소작농 사이에는 해마다 팽팽한 줄다리기가 벌어지게 마련이고 정 안 되겠으면 소작농들이 단합하여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는 소작쟁의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비유도 당시 흔히 있었던 부재지주와 소작농민들 간의 소작쟁의 문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9절과 10절을 함께 읽습니다.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예수님 당시에 유대 땅에는 이렇게 부재지주들이 많았습니다. ‘부재지주’란 말 그대로 그 동네에 안 살면서도 현지에 땅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지요. 예수님 당시 많은 지주들이 자기 땅을 소작인들에게 맡겨 농사짓게 하고 자기는 먼 나라에 가서 편안히 살면서 일정한 때가 되면 종을 보내 약속된 소작료를 받곤 했던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지주도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자기는 먼 나라로 가서 삽니다. 이제 소작료를 받기로 약속한 때가 되어 종 하나를 농부들에게 보내 소작료를 받아오게 했는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농부들이 약속한 소작료를 주기는커녕 지주가 보낸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즉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일종의 소작쟁의를 한 것입니다. 본문에는 주인이 소작인들에게 소출의 몇 퍼센트를 받기로 계약했는지 안 나오지만 농부들은 분명 이 소작료에 불만을 가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트라이크를 일으키고 소작료를 받으러 온 종을 마구 때린 후 빈손으로 돌려보낸 것이지요. 물론 농민들이 높은 소작료 때문에 억울한 심정으로 이렇게 행동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결코 농민들의 행동을 정당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의 행위가 정말 잘 못된 것이고 심판 받아 마땅하다고 평가합니다. 까닭이 무엇일까요?

비유의 의미

그것은 이 비유에 나오는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포도원은 무엇을 뜻하는가? 선지자 이사야가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민족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사 5:7)고 말씀한 것 같이 성경은 종종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도나무나 포도원으로 비유합니다. 오늘 비유에서도 포도원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뜻합니다. 그러면 이 포도원을 만든 주인은 누구인가? 당연히 하나님이시지요. 또 소작료를 받기 위해 주인이 보낸 종들은 누구인가? 구약의 선지자들을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종을 때리고 주인의 아들을 죽인 악한 농부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즉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불순종했으며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대적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지도자들, 특히 그중에서도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율법학자, 서기관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제 이 비유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주 명확해집니다. 주인이 포도원을 가꾸어 농부들에게 맡긴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이끌도록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맡기십니다. 그냥 맡겨놓기만 한 것이 아니라 농부가 포도원을 잘 지키고 가꿔서 종이 찾아오면 소작료를 줘야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잘 이끌어 하나님만 경배하고 순종하게 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타락해서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고 죄악에 물들어 살아갑니다. 그 가장 큰 책임은 지도자들에게 있기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경고하고 정신 차리게 하려고 누구를 보내십니까? 바로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같은 선지자들을 보내 경고하신 것입니다. 소작료를 내야 하는 것처럼 너희에게 큰 책임이 있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빨리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가르치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도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선지자들의 경고를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그런데 이런 지도자들의 파렴치한 행동을 보면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오늘 비유에 보면 주인은 첫 번째로 보낸 종이 실컷 두들겨 맞고 빈손으로 돌아오자 어떻게 했습니까? 참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농부들은 두 번째 찾아온 종도 때려서 빈손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난번 종보다 훨씬 더 심하게 굽니다. 첫 번째 온 종은 ‘심히 때리고 거저’ 보냈는데(10절) 두 번째 종은 ‘심히 때리고 능욕해서 거저’ 보냅니다. 능욕한다는 말은 심한 모욕을 주는 것을 뜻합니다. 이 정도 되면 참을성 많은 주인도 화날 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주인은 또 한 번 꾹 참고 세 번째 종을 보냅니다. 하지만 농부들은 그 종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습니다. 그냥 돌려보낸 것이 아니라 아주 심하게 내쳐서 쫓아냅니다. 농부들의 행동이 점점 더 파렴치해지고 잔인해지지요? 그러면 주인은 어떻게 했을까요? 이번에도 참습니다. 몇 번 참은 것입니까? 삼세번 참은 것입니다. 우리말에도 삼세번이면 할 만큼 했다는 뜻인 것처럼 세 번 참았으면 정말 참을 만큼 참은 것입니다. 정말 대단한 참을성을 가진 주인입니다.

그래서 세 번 참은 주인은 이번에는 누구를 보냅니까? 13절에 보면 포도원 주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주인은 이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세 번이나 종을 보냈지만 다 때리고 능욕하고 돌려보냈는데 이번에는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보자. 설마 그 농부들이 내 아들에게까지 그렇게 대하겠느냐고 생각한 것이지요.

오늘 이 비유에서 세 번이나 참는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도 정말 잘 참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배신하고 불순종하지만 정말 길이 참으십니다. 그들을 깨우치게 하려고 선지자를 보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에게도 불순종할 뿐 아니라 선지자를 핍박까지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또 다시 선지자를 보냅니다. 그런데 그 선지자도 핍박하고 모욕합니다. 다시 한 번 선지자를 보냈는데 이번에는 때리고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불순종하고 죄악에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무나 길이 참고 또 참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선지자들을 보내도 보내도 안 되니까 맨 마지막에는 어떤 방법을 택하신 것입니까? 이번에는 그 사랑하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신 것 아닙니까? 설마 아무리 불순종하는 저들이라도 내 아들까지 순종하지 않으랴 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여지없이 깨지고 맙니다.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을 보고 “이 녀석이 주인의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고 모의하고 실제로 그 아들을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입니다(14~15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성문 밖으로 끌고 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건을 뜻합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머릿돌로

이제 주인은 더 이상 참지 않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까지 죽였는데 어떻게 참습니까? 그래서 주인은 직접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게 됩니다(16절). 물론 무서운 심판을 뜻하는 것이지요. 비유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런데 16절 뒷부분에 보면 이 비유를 듣고 사람들은 공포에 떨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무슨 뜻입니까? “제발 그런 끔찍한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이지요.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게 무서운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주님의 비유는 현실로 나타납니다. 실제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그에 대한 진노와 심판을 면하지 못합니다. 1차적으로 이 심판은 주후 70년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처참하게 함락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2천년 간 유랑생활을 하게 됨으로써 성취됩니다. 또한 궁극적으로는 마지막 때 종말과 심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또한 그 포도원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처럼 유대인들은 구원의 특권을 빼앗기고 처참한 심판과 멸망을 경험하며 그 구원의 특권은 다른 사람, 즉 이방인들에게 주어져서 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도 이렇게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주님은 이 비유를 마치면서 조금은 이상한 말씀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17절을 봅니다.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이 말씀은 시 118:22을 인용한 것입니다. 게다가 마지막 18절은 더 이상한 말씀이 나옵니다.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어느 건축자가 돌을 구했는데 도저히 못 쓰겠다 싶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건축자가 그 버려진 돌을 가져다가 집을 짓는 데 가장 소중한 모퉁이의 머릿돌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한 건축자의 잘못된 판단으로 버려진 돌이 다른 건축자에 의해 너무도 소중하게 쓰였다는 이 말에서 돌을 버린 어리석은 건축자는 앞의 비유에 나온 악한 농부들, 즉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입니다. 건축자가 돌을 버린 것처럼 지도자들은 선지자도 버리고 예수님도 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버림받고 비참하게 죽음 당한 예수님을 머릿돌, 즉 먼저는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초석으로 사용하시고, 나아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귀하고 귀한 초석으로 사용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머릿돌은 구원하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 심판하는 일도 하십니다. 18절에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진다고 했습니다. 마치 항아리 같은 것이 돌 위에 떨어지면 산산이 부서지는 것처럼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인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이라는 머릿돌 위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지고 깨어지는 철저한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반대로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가루로 만든다고 합니다. 앞에서는 돌은 가만히 있는데 지도자들이 스스로 그 위에 떨어져 깨지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지도자들이 제 스스로 파멸의 길로 가고 제 무덤을 파는 모습이지만 이번에는 돌 자체가 그들 위에 떨어져 가루로 만드는 모습입니다. 훨씬 더 강도가 높고 무서운 심판을 뜻합니다. 이 심판을 당하게 되면 가루가 되듯 형체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한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마지막 재림 때 종말 때 일어날 사건을 뜻합니다. 마지막 종말 때가 되면 정말 자기 스스로도 멸망의 길로 가지만 아예 머릿돌이신 예수님이 그들 위에 떨어져 그들을 가루로 만들고 철저하게 부수어 놓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악한 농부는 누구인가?

이제 마지막으로 이 악한 농부들이 누구를 뜻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들은 설명 드린 것처럼 어리석고 완악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입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은 당시의 이스라엘 지도자들만 들으라고 이 비유를 들려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비유에 나오는 악한 농부들은 바로 어리석은 우리들 자신을 뜻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 자신일까요? 그것은 이 악한 농부들의 죄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이 농부들의 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누가 그 포도원의 주인이며 상속자인지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스스로 주인이 되려고 한 죄입니다. 즉, 오늘 내게 있는 모든 소유와 능력은 하나님이 내게 맡긴 것이며, 모든 소유주는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스스로 소유주가 되려고 하는 착각과 교만이 문제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고, 내가 주인이 되려는 어리석은 욕심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에 선악과를 따먹었으며, 하나님과 동등해 지고 싶어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인간이 자기 본분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자리를 침범하려 할 때 그 교만을 가장 미워하십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사명이 무엇인지 망각한 죄입니다. 농부들이 할 일은 자기가 소작을 맡은 포도원을 잘 관리하고 소출을 풍상하게 하며, 때가 되면 적절한 소작료를 바치는 것인데 이 사명은 바로 오늘 우리의 청지기 사명을 뜻합니다. 농부들은 욕심과 착각 때문에 이 청지기 사명을 망각한 죄를 지은 것입니다.

농부들은 정당한 소작료를 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오늘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소작료를 받느냐 마느냐 하는 것보다 주인과 소작인의 관계가 어떻게 유지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잘 유지되는가 하는데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작료를 잘 낸다는 것은 주인과 소작인과의 관계가 좋다는 말이고, 소작료를 거부한다는 것은 주인과 소작인과의 관계가 비정상적이며 단절되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주인이 세 차례나 종을 보내고 자신의 아들까지 보낸 까닭은 소작료 몇 푼 아까워서가 아니라 자신과 소작인인 농부들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유지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개시켜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왔으며, 예수님도 무슨 못 받은 빚을 징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어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하나님이 관심 있는 것은 몇 푼의 소작료가 아니라 우리와 올바른 관계성을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농부들은 그깟 몇 푼의 소작료가 내기 싫어서, 자신의 것도 아닌 포도원을 차지하겠다는 허황된 꿈으로 주인이 보낸 종을 죽이고 아들까지 죽이면서 주인과의 관계를 무참하게 파괴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까지 올바른 관계를 거부하고 은혜를 불순종으로 갚은 자들에게 주어질 것은 파멸과 심판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주 설교한 므나 비유를 혹시 오해한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이 므나 비유에서나 오늘 악한 농부 비유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너 얼마 벌었냐? 빨리 소작료 내라”도 아니고 “너 나한테 갚을 것이 있지? 빨리 갚아”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와 아름다운 관계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 올바른 관계가 형성될 때에만 우리는 그분의 참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열두 번에 걸쳐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악한 농부의 비유뿐 아니라 지금까지 살펴봄 모든 비유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 비유에 나오는 죄인, 혹은 악한 자들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들을 통해 대체적으로 당시의 종교지도자였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등을 책망하셨지만 사실상 그 완악한 죄인들은 바로 나고, 그 비유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비유를 제대로 들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바로크 시대 네덜란드의 위대한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십자가에서 내림>이라는 그림에는 죽음 이후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 중에 예수님의 한쪽 팔을 붙들고 있는 파란색의 조금 색다른 옷차림을 한 남자가 등장합니다. 이상한 것은 이 남자가 그의 또 다른 그림에도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세우는 장면을 그린 그림에는 이 남자가 주님의 발아래 엎드려 울고 있는 병사로 등장합니다. 이 남자는 다름 아닌 렘브란트 자신을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렘브란트는 자신이 바로 그 십자가 처형의 현장에 있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객관적으로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십자가의 현장에 내 자신도 서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나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군중들 중에 나도 들어 있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조롱하던 사람이 바로 나며,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병정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들은 예수님의 비유들은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네가 바로 그 회개해야 할 죄인이라고, 네가 바로 그 어리석은 자라고 말입니다. 19절에서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이 비유가 자신들을 가리키는 줄 깨달았지만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악한 농부라는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비유의 당사자가 우리임을 깨달아 속히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어, 우리는 그분의 종도 아니고 소작농도 아닌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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