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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곱 교회 순례(5): '사데교회' (계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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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데 교회: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

<名生實死>
매천야록(梅泉野錄)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호가 매천인 황현(黃玹, 1855-1910) 선생이 조선말의 상황을 야사 형식으로 기록한 책입니다.
매천야록은 나라 전체가 망국으로 치달리던 가장 불우한 시대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담고 있기에 매우 귀중한 책입니다.
그래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매천야록이
"우리나라 최근세사의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습니다.

매천야록을 읽어보면 이조말 우리나라의 모습은 이름만 살아있지 실상은 죽어 있었습니다.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열강은 우리나라를 삼키려고 연신 혓바닥을 날름거리는데,
임금과 신하들은 무능했고 생산성 없는 당쟁에 휘말려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매천야록 곳곳은 이와 같이 소리 없이 죽어가는 나라의 모습을 예리한 필치로 적고 있습니다.
매천 선생은 나라가 죽어가는 것이 물론 외세의 침략 때문임을 지적하지만,
그 일차적인 책임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국가는 필시 스스로 자기를 해친 연후에 남이 치고 들어온다."
(國必自伐而後人伐之)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남이 치기 이전에 먼저 내부로부터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가장 염려해야 할 것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국가뿐만 아니라, 개인, 교회, 가정, 사회 전반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병원의 중환자실에 가보면 분명 살아있다고는 하나 죽어가는 환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서 맥박은 뛰고 있지만 실상은 죽은 환자들이지요.

오늘 소아시아의 7교회들 중에 다섯 번째인 사데 교회가 바로 이런 교회였습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였습니다.
도대체 사데 교회는 왜 이 지경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사데 교회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도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사데는 주전 6세기 경부터 발달한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주후 1세기, 신약시대에 와서는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쇠퇴했습니다.
물론 사데에는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도 있었고, 이방 여신 시벨레(Cybele)를
섬기는 신전도 있었지만 사데 교회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사데 교회에는 에베소 교회를 괴롭혔던 니골라당도 없었으며,
서머나 교회를 훼방했던 자칭 유대인들의 회(會)같은 것도 없었으며,
버가모 교회를 그릇된 방향으로 몰고 갔던 발람같은 거짓 선지자들도 없었으며,
두아디라 교회를 성적 방종으로 유혹했던 이세벨같은 이단도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사데 교회는 외부로부터 큰 핍박을 당한 적이 없는 그저 평범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사데'하면 가장 유명한 것이 양모(羊毛) 산업이었습니다.
한 때 섬유 산업이 크게 일어나 크게 번성했던 도시가 사데였지요.
오늘 사데 교회에 주신 말씀에는 유독 옷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은
사데가 이와 같은 섬유산업이 발달된 도시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데 교회는 왜 죽어가고 있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사데 교회를 평가하시는 분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소아시아 7교회를 날카롭게 진단하시는 의사는 예수님이십니다.
자기 스스로나 외부에서 보기에 건강한 교회라고 할지라도 주님이 보시는 눈은 다릅니다.
몇 교회 빼고 대부분의 교회들이 예수님 보시기에 병든 교회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내리교회도 주님께서 우리교회를 어떻게 진단하고 계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사데 교회를 통하여 주님께서 오늘 우리 내리교회에 주시는 교훈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데 교회의 虛와 實>
사데 교회의 단점
여러분, 사데 교회는 이름은 살았으나 왜 실상은 죽은 교회가 되었을까요?
본문 1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제가 볼 때 이 짧은 구절 속에 사데 교회가 죽어 있는 이유가 들어 있습니다.

제일 먼저 사데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중요합니다.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렸던 것처럼 교회마다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각각 다르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 교회의 아주 특수한 상황과 관련된 주님의 모습이라는 사실에서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를 책망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입니다.
'일곱'은 완전수요, 성수(聖數), 천수(天數)로서 충만성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곱 영은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일곱 별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주의 종들, 즉 말씀의 충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사데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은 성령을 충만히 주시는 주님이시요,
하나님의 충만한 말씀을 대언(代言)하는 주의 종들을 굳게 붙들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름만 살아있고 실상은 죽어가는 사데 교회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여러분, 사데 교회를 향한 주님의 모습을 묘사한 뒤 곧바로 무슨 말씀이 나옵니까?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주님께서 아시는데 이름만 살았지 죽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데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불꽃같은 눈동자로 살피시는 주님은
성령 충만과 말씀 충만을 붙들고 계시는 주님이 아닙니까?
따라서 사데 교회가 이름만 살아있고 실상은 죽은 신자들로 가득찬 이유는
성령이 충만하지 못했고 말씀이 충만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교회가 이름만 살아있고 실상은 죽어 있는 교회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성령이 충만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데 교회가 죽은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성령이 살아서 역사하지 못했습니다!
주의 종들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이 되지 못했습니다!

겔 37: 1-14에 보면 에스겔이 본 놀라운 환상이 나옵니다.
에스겔은 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이리저리 나뒹구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가 마른 뼈처럼 생명력을 잃고
도탄과 절망에 빠져있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환상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 말라 비틀어져 죽어 있던 뼈들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거대한 군대 조직과 같은 강건한 생명체로 바뀌어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해서 마른 뼈들이 힘줄과 살과 가죽을 얻어 생명체로 변화될 수 있었습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생기(生氣)가 그 마른 뼈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생기'는 히브리어로 'ruach,' 즉 '영'(spirit), 혹은 '바람'(wind), 혹은 '호흡'(breadth)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실 때 불어넣었던 생명의 숨결이 바로 생기였습니다.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마른 뼈다귀 속에 들어가니 마른 뼈들이 살기 시작했습니다.

둘째로,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서로 연락하여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마른 뼈들이 살아난 것은 '성령 충만'과 '말씀 충만'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죽은 영혼들이 살아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서,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마른 뼈들이 즐비합니다. 
교회밖, 세상에만 마른 뼈들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그저 습관적으로 교회만 왔다갔다할 뿐, 이름만 그리스도인이지
아무 체험도 감동도 없이 실상 죽어 있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배를 드려도 은혜가 없고, 말씀을 들어도 도무지 감동이 오지 않습니다.
찬송을 불러도 웃음도 없고 눈물도 없습니다.
그저 메마른 뼈다귀들처럼 무미건조할 뿐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가 이름만 살아있지 실상은 죽은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진짜 전도해야 할 곳은 교회밖, 세상이 아니라 교회안이라는 말은 옳습니다.
그저 습관적으로 형식적으로 교회에만 왔다갔다할 뿐,
구원의 체험도, 성령 체험도, 심령골수를 쪼개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도 체험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부터 먼저 전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를 향하여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라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내리교회는 이런 교회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생명력이 넘치는,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고, 말씀의 능력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는 세력, 하나님의 말씀을 좌절시키는 장애물들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개구리를 죽이는 방법은 미적지근한 물에다 넣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솥에 물을 끓이되 너무 뜨거우면 개구리가 금방 뛰쳐나오기에 솥뚜껑을 닫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온도를 약하게 해주면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이 때 솥뚜껑을 닫은 뒤 점점 온도를 높여 죽게 합니다.

교회가 병들고 죽어가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충만과 말씀 충만을 방해하는 인간적인 전통과 풍습이 서서히 우리를 죽게 만듭니다!
누구 말대로, 강가에 매어놓은 배 위에 아이들이 놀고 있는데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밧줄이 풀려 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어마어마한 폭포수 밑으로 들어갑니다.

오늘 우리 내리교회도 혹시 이런 교회가 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혹시 마른 뼈다귀처럼 죽어가는 교회는 아닌지 반성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어가는 사데 교회가 다시 살아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 2-3절을 보세요.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죽어가는 사데 교회에 주님은 세 가지를 부탁하십니다.
첫째로, 깨어나 지금 막 죽어가는 사람들을 굳건히 하라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교회는 자기도 모른 채 잠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잠에서부터 깨어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자기의 신앙이 왜 죽어 가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언제 어디서부터 성령 충만, 말씀 충만이 사라졌는지 알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주변을 둘러봐 죽어가는 형제 자매를 깨워 굳건히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둘째로, 주님으로부터 받고 들은 가르침을 되새겨서 굳게 지키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되새겨서 다시 굳건히 지키고 잘못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셋째로, 만일 이렇게 해도 깨어 있지 않으면 주님께서
도적같이 오셔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도적같이 오신다는 것은 전혀 예고 없이 갑자기 나타나 준엄하게 심판하신다는 경고이지요.
우리가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 살아있는 성도가 되지 못하면
주님께서 도적같이 오셔서 우리를 심판하고야 마실 것입니다!

사데 교회의 장점
그러나 사데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책망만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사데 교회에도 희망이 있었습니다.
다 잠들어 죽어가는 가운데에도 깨어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사데 교회의 희망이요 자랑입니다.

본문 4-5절 말씀을 보세요.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사데 교회에는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데는 유명한 양모 산업지대였습니다.
특별히 검은 양모 염색 산업으로 유명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사데에 사는 사람들은 주로 검정색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이런 가운데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은 금방 표시가 났는데 노예들이 흰 옷을 입었습니다.

사데 교인들 대부분도 검정색 옷을 입고 다녔을 텐데 오직 몇 사람만이
노예나 입고 다니는 흰 색 옷을 입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은 바로 주님의 종들이었습니다!
흰색이 순결을 상징하듯이, 흰 옷이 노예들이 입는 옷이듯이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은 주님께 순결을 바치는 주님의 종들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사데 교회의 남은 자들이요, 깨어 있는 자들이요, 살아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과 함께 다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사데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기는 사람, 즉 깨어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세 가지를 약속하신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흰 옷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흰 옷을 입으면 눈이 부시도록 청초해 보이고 존귀해 보이지 않습니까?
주님의 의로 충만해서 존귀와 영광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이지요.

둘째로,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좋은 일일 경우 자기 이름이 명부에 올라가 있지 않으면 서운합니다.
하물며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구원받은 성도들의 명부에
우리의 이름이 지워져 있으면 얼마나 서운하겠습니까?
깨어 살아 있는 신앙 생활을 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끝까지 보증해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그 이름을 시인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사람을 분명히 알아서 반가워하는데 상대방은 나를 몰라볼 경우 얼마나 서운합니까?
하물며 내가 아는 척을 하는데도 상대방은 계속 고개를 흔들며
도무지 모른다고 부인할 경우 얼마나 부끄럽고 당황스럽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성령과 말씀으로 충만하여 살아 있는 신앙생활을 하면
세상 끝날에 주님께서 우리를 인정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 자신이나 세상 사람들이 아닌 주님이 인정해주시는 신앙이 진짜 신앙입니다.

<죽었으나 산 사람, 살았으나 죽은 사람>
소록도에는 한센씨 병, 즉 나병을 앓는 환우들이 모여 삽니다.
일제 시대에 문을 연 탓에 초대부터 5대에 이르는 원장이 모두 일본인들이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정반대 되는 원장이 두 사람 있었습니다.
2대 원장 하나이(花井善吉, 1921-1929)는 한국의 풍습과 전통을 존중했고
무엇보다도 환우들의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주었습니다.
민족 감정을 초월해 한국 나환자들을 사랑과 정성으로 극진히 돌보아 주었습니다.
하나이 원장이 아직 살아있었을 때 환우들이 직접 돈을 모아
창덕비를 세우고자 했지만 본인이 고사해서 못 세웠습니다.
그러다가 하나이가 과로로 순직하자 그 이듬해
소록도 환우들이 자발적으로 송덕비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4대 원장 수호(周防正秀, 1933-1942)는 달랐습니다.
나환자들에게 벽돌 굽기, 가마니 짜기, 숯 굽기 등의 강제 노역을 시켰고,
도주하는 자들을 감시하기 위하여 엄동설한에 바위 낭떠러지에 순찰도로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수호 원장은 욕심이 끝이 없어서 환자들의 3개월 간의 임금을 강제로 거두어
3.3 미터 높이의 동상을 세우기에 이르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달 20일을 '보은 감사일'로 정해 환자 6000 여명을
자신의 동상 앞에 모아 놓고 절을 시키곤 했습니다.
결국 수호 원장은 동상이 세워진지 2년 후에 자신의 동상 앞에서 비참히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하나이 원장은 죽었으나 산 사람이었고, 수호 원장은 살았으나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신앙의 이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들이 많고, 죽었으나 산 사람들이 많습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교회들이 많고, 죽었으나 산 교회들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사데 교회와 비슷한 점이 없는지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인들은 없는지요?
그런 가운데도 여전히 깨어서 살아있는 성도들은 있는지요?
이런 분들이 주변에 잠들어 있는 분들을 깨우고 굳건히 해서
우리 교회가 성령과 말씀으로 충만하여 살아있는 교회,
하나님의 진리와 능력으로 충만한,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김 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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