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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는 자 (요 20: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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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우리의 고유명절인 추석입니다. 추석이 주일로 겹치게 된 것이 아주 오랜만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고, 우리 교회 성도들도 고향을 찾아 여러 곳으로 흩어졌습니다. 어느 한 여성 포탈 사이트가 추석을 맞이하여 “추석, 이런 사람이 제일 싫다”라는 설문을 조사했습니다. 5위가 눈치 없이 떠드는 조카, 4위가 자기식구만 챙기는 새 언니와 형부, 3위가 일거리를 주는 상사, 2위가 결혼을 재촉하는 사람, 그리고 마지막 1위가 보너스를 안주는 사장님, 이렇게 선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 면에서 공감이 갑니다만 사실 추석에 추한 모습은 이런 것만이 아닐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추석에 함께 하지 않고 혼자 따로 지내는 사람입니다. 함께 해야 할 시간에 혼자 있는 것이 추한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추석이나 크리스마스와 같은 명절이 오면 온 가족이 함께 모입니다. 함께 여행도 하고, 함께 보냅니다. 그런 시간이 혼자 남게 되면 적잖은 어려움이 생깁니다. 오래 전 상영되었던 영화, 홈 얼론(Home Alone)은 그것을 대표적으로 알려줍니다. 온 가족이 여행을 떠나는데 아이가 혼자 남게 되어 생기는 에피소드를 아주 코믹하게 만들어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함께 해야 하는 때에는 함께 해야 합니다. 그것이 더불어 사는 인간 삶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사랑을 갖는 공동체의 모습이요, 또한 그것이 신앙인이 가질 공동체의식입니다. 함께 해야 할 순간에 함께 하지 못하면 교감을 가질 수 없고 그래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도마’라는 제자는 모두가 함께 해야 할 때 하지 못하여 곤욕을 치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일 먼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곳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함께 하지 못한 것이 도마에게는 부활을 믿지 못하는 병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런 도마를 위해 주님은 다시 오셨습니다.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이 가져야 할 모습입니다. 믿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여기에서 믿음에 대한 몇 가지 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주님이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여기 도마의 말과 주님이 강조하는 말씀에서 우리는 이 귀한 진리를 찾습니다. 도마의 말과 모습을 잘 분석하고 생각해 보면, 도마가 지금 부활이 아니라 주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이미 예수님이 활동하실 때 있었던 일입니다. 주님은 나인성에 사는 과부의 아들을 살렸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셨습니다. 이 일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한 사람이 주님의 제자요 도마입니다. 특히 십자가 사건 바로 1주일전에 주님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심으로서 주님의 부활을 암시해 주었습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던 인물이 도마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도마의 모습은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지 못하니까 죽음도, 부활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도망가고, 배신한 것입니다.

  이런 도마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9절에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 주님은 여기에서 도마에게 부활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부활하신 주님이 그 앞에 서 계신데 부활을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또한 이 말씀에서 주님은 ’나‘라고 말하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도마에게 부활만이 아니라 주님 자신을 믿으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마만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성경을 대하는 모든 자들에게 동일하고 권면합니다. 주님의 그 어떤 것보다 주님 자체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주님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고도 믿는 것,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을 분명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믿을 대상이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14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것이 성경에서, 주님의 말씀에서 가장 귀하게 우리에게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믿을 대상은 오직 하나님, 주님뿐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대상을 알고 오직 그 대상만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세계는 나름대로 믿음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 사회가 비록 불신으로 가득 찬 세상일지라도 사람들은 오늘도 믿고 삽니다. 건물을 믿고 여기에서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교통신호를 믿고 걷고 운전을 하는 것입니다. 아내와 남편을 믿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평생 의부증, 의처증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지 못하면 살수 없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리켜 일반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무엇을 믿는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믿는 대상에 따라 내 삶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돈을 의지하는 사람은 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권력을 의지하는 사람은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믿고 의지하면 실망하게 됩니다. 과연 사람이 믿을만한 대상입니까? 시편 146편에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고 말합니다. 이사야 2장에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사랑할 대상이지, 믿고 의지할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조상을 존중합니다. 사랑하고, 기억하고, 업적을 기릴 뿐이지 결코 조상을 믿지는 않습니다. 조상이 우리를 책임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어떤 신도 믿지 않습니다. 어떤 우상 앞에 절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요,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가 믿을 대상은 하나님이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 주님뿐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하나님, 기도하면 응답하시는 하나님, 손을 내밀면 잡아주시는 하나님, 바르고 참되게 살면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오직 하나님, 오직 주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잘 믿고 의지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24절에서 도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이 말에서 보는 것처럼, 도마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의심이었습니다. 의심이 생겨서 자꾸 보아야겠다고 말하고, 의심이 생기니까 남의 말도 귀담아 듣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리 남이 그렇게 믿어도 의심이 있으니까 믿음이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입니다. 도마의 행동은 한마디로 의심 병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는 자가 되어, 믿음으로 살고, 믿음을 키우고, 믿음의 능력과 역사를 보아야 하는데, 이 믿음의 삶에 가장 큰 방해거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의심이라는 것입니다. 의심이 믿음의 적입니다. 의심하면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주님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에 가질 믿음의 자세는 의심부터 없애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주님의 능력이 임합니다.

  하루는 주님이 바다위로 걸어온 적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으로 생각하고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안심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의심이 많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만약 주님이시라면 자기를 물위로 걸어오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물위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말씀에 따라 물위로 걸었습니다. 그러나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여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의 손을 잡아 이끌며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의심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기에서 그의 의심을 믿음이 적은 것과 연관시켜 말씀하고 계십니다. 결국 베드로의 의심이 능력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의심은 신앙이 아닙니다. 의심하는 순간 믿음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곧 의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의심을 버리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의 자세도 의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지혜를 구하면 주실 것에 대해 말씀하면서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의심하면 믿음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의심하면서 기도하면서 어떤 것도 응답 받을 수 없습니다. 결국 의심은 두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문제가 두 마음입니다. 두 마음을 품는 순간, 우리는 믿음의 자리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의심을 버리고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믿음으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삽시다. 그곳에 능력과 역사가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셋째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주님께서는 여기에서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를 잘 알려주었습니다. 물론 성경의 모든 것을 믿어야 하겠지만, 특히 믿어야 할 것을 암시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은 곧 회복을 의미합니다. 죽음에서의 회복, 고난에서의 회복, 모든 것의 회복, 바로 그것을 믿는 것이 가장 귀한 믿음입니다. 주님을 알고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우리의 신앙에 회복이 가장 귀한 신앙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에게서 우리는 그들이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의 모습이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회복시키고, 부활시키고, 완전히 원상복귀 시키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던 사람들의 모습에 이것이 빠지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많은 고난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잘못해서도 고난을 당하였지만, 자기의 잘못이 없는데도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은 뒤 곧바로 왕의 자리, 영광의 자리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동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갔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 속에 다윗은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잊지 않고 높여주셨습니다. 왕권의 위기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맨발로 머리를 가리우고 울면서 예루살렘으로 떠나야만 했던 다윗이었지만, 하나님은 마지막에 다시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욥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당하는 고난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고난이었습니다. 경건하게 살고, 믿음으로 살던 그에게 찾아온 시련으로 그가 얼마나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결국 다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처음 것의 두 배를 받았습니다. 욥기는 42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1장, 2장만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마지막까지 가야 합니다. 성경의 초점은 마지막입니다. 하나님은 욥을 완벽하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런 회복의 하나님을 믿고 살았기에 시편의 많은 시는 회복을 주제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특히 다윗의 시 가운에는 회복을 노래하는 시가 중심에 깔려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60편은 회복의 대표적인 시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모든 세대를 향해 선포합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나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해마다 오늘과 같은 추석이 오면, 가정의 제사문제로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가족을 만나는 것이 즐겁고, 함께 하는 것이 좋은데, 제사 때문에 형제와 말다툼이 일어나고,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추석이 분명 즐거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에게는 힘든 날입니다. 차라리 추석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도 들게 합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에도 예배를 드리고 그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회복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회복시키고, 가정과 민족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하면서 맡겨야 합니다. 좋은 날이 올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싸우거나 대립하지 마시고, 조금 참고 기다리십시오. 하나님께서 뭔가 하실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는 회복이 주제입니다. 성경의 모든 역사와 사건과 인물과 이야기는 회복으로 순환되는 것을 봅니다. 결국 모든 것의 회복이 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이 우리의 마지막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회복의 가장 멋진 현장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좋지 않은 별명을 가진 인물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허물 많은 사람으로, 요한과 야고보는 우뢰의 아들로 기억됩니다. 도마는 의심 많은 도마로 늘 따라 다닙니다. 원래 도마의 별명은 ‘디두모’입니다. 이 말은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쌍둥이가 많지 않던 때에 도마는 쌍둥이로서 사랑을 받았는데 언제부터인가 의심하면 늘 도마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도 요한도 도마도 결코 모두 별명으로 일생을 마치지는 않았습니다. 이들도 모든 것이 회복되었습니다. 도마는 믿음 없는 자였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난 뒤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성경과 기독교역사에서 주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자가운데 가장 먼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다짐하다가 인도에서 순교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여러분, 믿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주님만을 믿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제 모든 의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과 회복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귀한 말씀을 마음에 담고 한 주간도 승리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서 해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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