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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이 전도하면 되잖아~! (딤후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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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전에 <기독교사상 9월호>를 받아 든 저는, 여느 때처럼 목차 페이지를 먼저 펼쳤습니다. 맨 윗줄에 적힌 어떤 제목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표지 이야기 / 사형수들의 큰 누님 김혜원 권사!> 그 때서야 표지 모델도 보지 않고 책 안으로 들어와 버린 것을 알게 된 저는 얼른 겉표지에 실린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묘한 감정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대단한 미인은 아니셨지만, 웃는 모습이 묘한 매력을 지닌 분, <큰 누님>이라고 부르기엔 좀 나이가 들어 보이시는 분, 나를 보고 미소 지으며 무어라 말씀하시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이셨습니다. 사연이 가득 담긴 듯한 그 분의 눈빛을 가슴에 담고, 얼른 <사형수들의 큰 누님>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페이지마다, 그 분의 사진이 한 장씩 실려 있었습니다. 지난 30년 세월을 하루같이, 교화위원이란 직함을 달고, 사형수들의 친구요 누님이요 어머니로 살아온 김 권사님, 그래서인지 모두 일곱 장의 사진 중, 네 컷의 배경은 교도소였습니다. 그러나 사진으로 뵙는 고희의 김 권사님은, 너무도 여리고 너무도 평범한, 그래서 동네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할머니의 모습이셨습니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늘 반듯한 모범생이었던 김혜원 권사님, 그 분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꿈에 그리던 학교 강단에 서게 되었습니다. 수도여고의 영어 교사가 된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변호사인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되었고, 자녀도 넷을 두게 되었습니다. 기본이 셋이요 은혜 받으면 넷이라, 이 분은 은혜 받은 분이셨습니다. 하여튼 이 분은 어느 모로 보나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의, 그러나 특별할 것 없는 아내요 어머니였습니다. 그녀가 마흔이 되기까지는 말입니다.

그런데 김 권사님이 마흔 되던 해,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75년 10월 9일, 모든 조간신문들은 희대의 살인마 검거 소식을 1면 톱뉴스로 실었습니다. 이 보도의 주인공은 총 아홉 차례의 범행을 저지리면서 모두 17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 김대두였습니다. <한번 살인을 하고 나니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느껴졌고, 범행 때마다 별 소득이 없어 계속 일을 저질렀다!>고 태연하게 말하는 김대두의 모습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는 나하고는 직접 상관없는 저 먼 나라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살인마가 김 권사님의 일상을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연쇄살인범 김대두, 그가 평범한 중산층 주부요 널리 알려진 교회의 집사였던 한 중년 여성의 삶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도저히 만날 수 없는 두 사람이 묘한 인연으로 만나게 된 것인데요, 김 권사님으로 하여금 살인범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 준 계기는 다음 주일 교회에서 들은 설교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담임목사님은 살인범 김대두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우리 사회의 윤리 부재현상과 시민들의 도덕 불감증을 개탄하셨습니다. 그 때를 회고하는 김 권사님의 고백입니다.

<그 때 제가 느낀 것은 교회가 이렇게 성장하고 번창하는 가운데 이런 끔찍한 살인마가 이 사회에 태어났으니, 교회에게도 일정정도의 책임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어요. 그저 비난하고 개탄만 할 게 아니라 책임의식을 가지고 회개하고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죠. 그 순간, 내가 먼저 한 사람의 크리스천으로서 사회악에 대하여 무언가 행동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지요.>

# 2
연쇄살인범이 김 권사님의 일상 속으로 파고 들어오게 된 두 번째 계기는 어느 날 남편이 무심코 던진 한 마디 말 때문이었습니다. 그 날도 여느 때처럼 남편과 함께 아침을 먹던 중이었습니다. 자연스레 살인범 김대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살인범의 고향과 남편의 고향이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김 권사님의 입에서 남편의 심기를 건드리는 발언들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니, 저 흉악범의 고향이 당신 고향과 같다고요? 당신 고향에서 저런 살인범이 나왔다고요? 여보, 나 이제 시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무어라 대답해야 해?>

검사 출신의 변호사 남편, 해서 누구보다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 그랬던 그가, 희대의 살인마와 동향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지금 자기 아내에게 추궁 아닌 추궁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힐난하듯 다그치는 아내의 소리가 듣기 싫었던지, 남편은 서둘러 출근하면서 한 마디 툭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아, 그럼 당신이 그 녀석을 전도하면 되잖아~!>

그 순간 남편의 그 한 마디가 김 권사님의 마음에 와 꽂혔습니다. <당신이 전도하면 되잖아~!> 사실 그 무렵 김 권사님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마흔 고개를 넘으면서 느끼는 무력감과 좌절감의 병의 원인이었습니다. <김혜원, 너도 별수 없구나, 그렇지 뭐, 애 넷 놓느라 강단도 떠났으니, 이제 너의 인생에서 더 바랄 것도 없지 뭐, 그래, 이렇게 남편 뒷 바리 하다가 죽는 거야 뭐! 인생이란 게 별건가 뭐~!> 정말 그런 것 같았습니다. 이젠 내 인생에 죽음 밖에는 더 기다릴 것이 없는 것처럼 여겨져 아주 허망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주부우울증>이었지요.

그런데 그 날 아침, 퉁명스럽게 내 던지고 간 남편의 한 마디가, 무기력 증에 빠져있던 그녀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당신이 전도하면 되잖아~!> 거기에 얼마 전 성경 공부 시간에 들었던 목사님의 한 마디가 그녀를 더욱 자극했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한 생명에게 희망을 줄 수만 있다면, 그 보다 값진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그 순간 김 권사님은 하나님 앞에 다짐했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전하겠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는 김 권사님의 고백입니다. <김대두 씨를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만 할 수 있다면, 나 자신도 긴가민가하던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믿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어찌 해야 할지 막막했어요. 며칠 동안 마냥 기도만 했지요. 그러다 어느 겨울 추운 밤, 그에게 편지를 써 보내기로 했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라고 했지요. 답장이 올 거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는데, 열흘 만에 응답이 왔어요. 그렇게 만나게 된 살인범 김대두, 그러나 알고 보니 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지요. 죄를 후회하고, 용서를 빌고, 그러면서도 고독을 호소했지요. 이것이 시작이었어요. 그 분의 답장이 제 반 평생을 교도소에 잡아매둔 질기고 질긴 인연의 끈이 된 거지요.>

우편번호도, 번지수도 알 수 없어, 그냥 <서울구치소 김대두씨 앞!>이라고만 적어 보냈던 편지가, 열흘 후 답장으로 돌아왔고, 그 날을 시작으로 김 권사님은 오늘 이 시간까지 30년을 사형수들과 함께 살아오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살인범 김대두와의 인연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이듬 해 1976년 12월 18일, 그는 큰 누님 같은 김 권사님에게 <출소자들에게 갱생의 길을 열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 3
그동안 김 권사님이 만난 사형수들 중에는 노름빚을 갚기 위해 어린 제자를 유괴 살해한 파렴치한 교사, 남편을 청부살해하고 시어머니마저 독살하려 했던 철면피 여인, 자기 집 앞마당에 사체를 매장한 냉혈한 살인마, 그리고 가정 파괴범 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겐 공포의 대상인 저들이 김 권사님께는 모두 동생이요 아들딸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녀는 사형수들의 누님이었고 어머니였습니다.

<범죄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처한 가정과 사회의 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지요. 물론 그들의 범행은 천번 만번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만, 그러나 저들을 그냥 그렇게 죽도록 놓아둘 수는 없습니다. 저들이 주님을 만났을 때, 때 묻지 않은 선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해서 야수처럼 날뛰던 과거의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사랑으로 충만한 순결한 영혼만이 죽음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래서 저들의 죽음이 더 안타깝습니다.> 최근 고희를 맞이하면서 펴낸 책, <하루가 소중했던 사람들>에 적어 놓은 김 권사님의 고백입니다.

그래서일까요? 1997년 12월 30일, 형 집행으로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스물아홉의 한 사형수는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제목은 <어머니>입니다.

      문득 새벽녘에 눈을 떠 사방을 둘러볼 때 슬픕니다.
    아침에 일어나 머리를 감고 면도를 해도 슬픕니다.
    머리 빚을 때나 속옷을 갈아입을 때도 슬픕니다.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을 수 없어 슬픕니다.     

    웃을 때와 찡그릴 때도 슬픕니다.
    어머니께 이런 나의 모습을 보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밀린 빨래를 볼 때 어머니 정성이 더욱 그립고
    배색을 받아 앞에 두고 어머니의 음식 솜씨를 그리워합니다.
    철장 안에서 철들어 가족이 소중함도 알았습니다.

<나는 어느 순간에 형장의 이슬이 될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담당 간수의 발짝 소리에도 식은땀을 흘리곤 했다던 사형수 강인철, <오늘도 살았으니 내일도 살고 싶다!>고 소원을 빌던 스물아홉의 꽃다운 젊은이 강인철, 한 순간의 실수로 사형수가 되었던 그는 김 권사님을 만나 한글을 배웠고, 그렇게 배운 한글로 성경도 읽고, 찬송도 부르며, 시도 쓰고 일기도 썼습니다. 주 안에서 거듭난 사형수는 마침내 날마다 엄습하던 공포와 불안을 걷어내고, 예수님이라는 큰 빽이 있어 든든하다고 고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에게 내일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형무소에서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열매가 다 둥글 듯 나이가 들면 둥글게 포용하고, 사랑하고, 관조하게 되나 봐요. 열매처럼 둥글게 살면서, 모든 것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그 다음엔 뚝 떨어지는 것, 내 남은 인생의 역할이 아닌가 싶어요!>

이렇게 말하며 오늘도 환하게 미소 짓는 사형수들의 큰 누님, 김혜원 권사님, 그 분의 얼굴은 분명 천사의 얼굴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얼굴처럼 말입니다.

기독교 사상 9월호의 표지 모델, 김혜원 권사님! 그 분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사형수의 유언으로 끝을 맺고 있었습니다.

<전과자들에게도 꿈은 있습니다. 어두운 그늘에서 사는 이들이기에 그 꿈은 더욱 간절하고 큽니다. 그러나 우리의 꿈은 늘 세상의 냉대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부디 우리 사회가 출소자들에게 보다 따뜻한 관심을 가져 주시고, 갱생의 길을 열어주십사는 것입니다. 하나 또 있습니다. 교도소에서 초범자와 재범자를 분리 수용하여, 죄를 배워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같이 불행한 젊은이가 다시는 없기를 바랍니다.>

# 4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험난한 세파를 살면서 길을 잘못 들어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일입니다. 교회는 영혼을 구원하는 방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혼을 살리는 일에 부르심 받은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복음,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오늘 주신 본문 디모데 후서 4장 2절을 보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너는 항상 힘써 말씀을 전하라 하십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곧 무시로 전하라는 거지요. 언제나 전하라는 거지요. 항상 힘써 전하라는 거지요.

늘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전하는 목적이 영혼의 구원이라는 점입니다. 전도의 목적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세상은 다 포기해도 우리 주님만은 결코 포기하지 못하시는 그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오늘도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고 계신 것입니다. 우린 바로 그 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해서 우리 주님,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동광교회를 여기 대치동 언덕 위에 세우시고, 지난 24년 동안 인도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 역시 구원의 복음을 전하여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기본입니다. 기본 명제에 투철하지 못한 교회, 존재의 이유와 근거를 상실하게 됩니다. 우리의 원초적인 사명, 그것은 구원의 복음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 여기 동광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나 쉽게, 그리고 너무나 자주, 이 기본 명제를 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원초적 사명에 투철하지 못하다는 뜻이지요. 그리고는 <전도란 나와 상관없는 먼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전도>라는 단어, 부담스러우니 저리 치워 달라고 합니다. <전도하라!>는 말만 듣지 않으면 교회 다닐 만 할 거라고 말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그런데요, 오늘 이 아침,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전도하면 되잖아~!> <아니, 당신이 전도해야 되잖아~!> 우리 주님의 이 음성 함께 듣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면 됩니다. 대화와 토론이 필요한 일 아닙니다. 신학적 담론이 필요한 일 아닙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힘써 전하라 하신 그 말씀에 그저 아멘하고, 나가서 전하면 됩니다. 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바로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 후서 4장 1절을 보면,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는 이 명령을 가리켜 엄한 명령이라 하십니다. 어길 수 없는 명령이요, 반드시 복종해야 하는 명령이라는 뜻이지요, 더 중요한 사실은, 1절과 3절을 볼 때, 때가 되었다는 겁니다. 무슨 때?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할 때! 종말의 때! 심판의 때! 그러니 어서 가서 복음을 전하여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라는 겁니다.

우린 이 점에서 분명해야 합니다. 우린 이 원초적 명령에 철저해야 합니다. 엄한 명령을 어기는 자, 그 때에 구원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해서 사도 바울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럼요,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은 이를 어길 경우 화가 돌아오는 엄한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이 엄한 명령을 잘 수행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가장 중요한 것, 2절이지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을 쓰면 됩니다. 때와 상관없이 항한 힘쓰라는 말, 전도 자체를 나의 습관으로, 또 나의 삶으로 만들라는 뜻이지요. 무시로 전하라, 그건 전도가 나의 습관이 되게 하라는 명령 맞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전도의 결실을 얻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군요. 내가 복음을 전하여 한 영혼도 구원하지 못함은, 어쩌다 전도하기 때문입니다. 무시로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 해도 어쩌다가 수술실에 들어가 메스를 들면 수술에 성공하기 어려운 법, 해서 무시로, 항상,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힘써 말씀을 전하라 하신 것입니다.

전도는 나의 습관이어야 합니다. 전도는 나의 생활이어야 합니다. 전도하러 나가는 일이 특별한 연중행사가 아니라, 그저 습관처럼 오늘도 내일도 그저 나가서 전하면 됩니다. 그런 분들, 자나 깨나 전도에 관심합니다. 내 인생 최대의 관심사가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전도는 나의 삶입니다.

또 하나 복음을 전하라는 엄한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덕목이 있으니, 2절의 맨 뒤, <오래 참음>입니다. 그럼요, 구원의 도를 전하는 전도 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아야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 김 권사님이 30년을 하루 같이 오래 참으며, 세상이 다 등을 돌려버린 사형수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했던 것처럼, 해서 저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듯이, 우리도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30년을 참는 오래 참음으로 참고 또 참아야 합니다. 오래 참음 없이 영혼 구원의 결실을 보기란 불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는 평생을 오래 참으며, 오직 전도만을 위해 살았던 전도 인 중의 전도 인이었습니다. 그에게 한 가지 근심이 있다면, 어떻게 하면 복음의 말씀을 잘 전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감옥에 갇혀서도 그의 일념은 전도였습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그의 일념은 전도였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그의 일념은 오직 전도였습니다. 풍랑 속에서도, 심지어, 순교하는 순간에l도 그의 마음속엔 전도에 대한 열정뿐이었습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올인 했던 인물, 그래서 우린 지금까지 사도 바울을 사랑합니다. 전도는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 5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 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관련하여 한 말씀만 더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 4:5 / (읽기) / 먼저 전도인의 일을 하라 하십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너의 직무를 다하라 하십니다.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표시하시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대목인데요, 우리가 전도인의 일을 할 때에 놓치지 말아야 할 것, 나에게 맡겨진 직무에 신실하게 임하라는 겁니다. 너의 직무를 다하라! 전도한답시고, 나에게 맡겨진 기본 직무에 소홀해선 안 된다는 뜻이지요. 전도를 핑계 삼아 기본 직무를 유기하지 말라는 거지요. 자기 직무도 다하지 못하는 자가 구원의 복음을 맡아 전할 수는 없다는 거지요. 자기 직무도 책임지지 못하는 자가 한 영혼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거지요.

뒤집으면 나의 직무를 다하는 것이 전도인의 일을 완수하는 지름길이라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직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 그것이 전도의 첩경이요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그 모든 직무를 성실하게 다한다는 것,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신 말씀, 5절의 전반부,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라!>는 겁니다. 모든 일에 근신하라! 근신하라는 말, 헬라어로 본디 술을 절제하라는 뜻인데요, 삼가 모든 일에 조심하라는 뜻이지요.

근신이 필요한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 다음에 있습니다. 고난을 받아라! 무슨 뜻인가?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 영혼을 구원하는 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지요. 고난의 길이라는 거지요. 한 달에 네 다섯 번은 교도소를 찾아가야 하고, 저들의 호소를 다 들어줘야 하고, 저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하는 쉽지 않은 길이라는 거지요. 그러니 근신하고 고난을 수용하며, 자기 직무를 다하여, 전도인의 일을 완수하라는 거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가을의 문턱에 서서, <당신이 전도하면 되잖아~!> <당신이 전도해야 되잖아~!>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무시로 힘써 말씀을 전하고, 오래 참음으로 근신하며, 고난을 수용하고, 주어진 직무를 다하여 마침내 사도 바울과 같은 전도 인이 되라는 주님의 음성 함께 들었습니다.

이 말씀 함께 받으며, 마지막으로 나에게 주어진 직무를 성실하게 다함으로, 전도인의 모범이 되신 한 분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분은 평생, 초등 교육에 헌신하신 분으로,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교회에서, 당신에게 주어진 직무를 소리 없이 감당해 오신 분이십니다. 이 분의 신실한 모습이 세 딸의 가슴에 감동으로 남았습니다. 하여 세 딸 모두 믿음을 대물림하며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데요, 그 중 둘째 따님이 어제 결혼했습니다.

사위 감은 자기 스스로 고백하듯,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동광의 딸을 만나 이렇게 고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신랑의 고백 / (읽기) / 이 아름다운 고백을 가능케 한 배후에는 신부의 아버님이 계셨습니다. 자기 직무를 다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또한 자기 직무를 다하는 딸의 모습에 감동된 무신론자 청년이 주께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인데요, 결혼을 앞두고, 그 딸이 아버지께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 딸의 고백 / (읽기)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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