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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등에는 비결이 있다 (마 8: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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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한 알만 먹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낫는 만병통치약을 구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 약이 유감스럽게도 딱 한 알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누구에게 이 약을 주겠습니까? 이 귀한 약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약을 자기 자신이나 가족에게 쓰지 않고, 자기 하인에게 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주인공 백부장입니다.

백부장이란 로마 군대의 단위입니다. 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지휘관입니다. 지금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은 가버나움입니다. 가버나움은 교통과 무역의 요지였기 때문에 로마군대가 파견 나와 있었습니다. 그는 식민지 백성을 다스리는 지배자였습니다. 일제시대에 헌병대장 정도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는 이 지역에서 행정과 사법과 군사의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식민 통치 지역이었으므로 이 권력은 거의 무제한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 백부장의 하인 한 사람이 중풍병에 걸렸습니다. 이 백부장은 그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는 사랑이 남달랐습니다. 백부장이 이 하인의 상태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6 절에 보면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중풍병은 한쪽이 사지가 마비됩니다. 한쪽 손과 발을 쓰지 못합니다. 말도 혀가 굳어져 어눌해집니다. 중풍병자가 겪는 괴로움은 커다란 불편함입니다. 통증으로 크게 시달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백부장은 자기 하인의 아픔을 큰 괴로움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중풍병은 다시 회복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평생 그런 연약함으로 살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남달랐습니다. 그는 이 하인의 병 낫기를 구하기 위해서 겸손하게 예수님께 나아 왔습니다. 당시에 하인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축처럼 취급했습니다. 백부장의 하인이라면 전쟁 포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같은 하인은 병에 걸려 죽어도 주인이 모르고 지나가는 수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이 백부장은 자신의 권력과 신분을 내려놓고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는 자비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이 하인의 병 낫기를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망설임 없이 이내 허락하셨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예수님은 이 백부장이 길 안내를 위해서 앞장서기를 기다리셨습니다. 당연히 환자가 있는 현장에 가서 고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응답도 의외성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 군대의 장교를 싫어했습니다.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친일파가 아닌 이상 일제시대에 순사들을 좋아할 일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편견 없이 도움을 구하는 그에게 바로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을 대하는 백부장의 태도가 또 의외입니다.

백부장은 감히 예수님을 자기 집에 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아주 존귀하고 위대한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자기 집과 자기는 초라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이 바람에 사상 초유의 치유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이 환자가 있는 현장에 가지도 않으시고 바로 말씀으로만 고치신 것입니다. 마지막 13 절을 보면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예수님은 이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중에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이만한 믿음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믿음이 매우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보면서 이 백부장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기에 칭찬을 받았는가 알아야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일등에는 비결이 있다'입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서 한 음식 대박집을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쪽박집을 컨설팅하기 위해 대박집을 찾아 그 비결을 전수받아 성공하는 과정을 방송했습니다.

그 날은 아귀찜으로 성공한 마포의 한 음식집이 소개되었습니다.

아귀찜을 맛있게 요리하는 비결은 다름 아닌 뜨거운 후라이팬에 재료를 볶으면서 도구를 쓰지 않고 목장갑을 낀 손으로 직접 버무리는 것이었습니다.
조리법을 전수받는 주인공은 손가락 끝에 화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손으로 비벼야 양념 맛이 깊이 밴다는 주인의 호령에 요령을 피우지 못했습니다.

성공신화 뒤에는 이렇게 남다른 노력과 비결이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백부장은 예수님께 이제까지 만나 사람들 가운데 믿음으로 일등이란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의 믿음에는 어떤 비결이 있었을까요?

첫째, 백부장은 믿음 이전에 사랑이 많은 사람입니다.

사랑은 믿음의 원동력입니다. 믿음은 있는데 사랑은 없다면 그 믿음은 가짜입니다. 믿어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사랑은 불가능의 장벽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낫도록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합니다. 체면과 상황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불가능에도 도전하는 믿음을 갖게 합니다.

백부장은 자기 하인을 이토록 사랑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범주를 넘어섰습니다.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될 사람까지 사랑했습니다. 이것은 사회의 관습과 제도를 뛰어넘는 사랑입니다.

하인은 자기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매일 하인은 자기의 수발을 들었습니다. 그러던 하인이 병에 걸렸습니다. 그것도 중풍병이란 아주 몹쓸 병입니다. 하루 이틀 앓다가 일어날 병이 아니었습니다. 하인이 이런 병에 걸렸으니 이제 다른 이가 그를 섬겨야만 합니다. 병든 하인은 더 이상 가치가 없어졌습니다. 하인에게 중풍병이란 곧 버림을 받게 될 죽음 같은 병이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그를 사랑으로 대해주었습니다. 바로 이 사랑이 주님의 은혜를 부르는 동력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큰 믿음을 바란다면 먼저 사랑부터 품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이 백부장은 주님을 존귀히 여겼습니다.

이 백부장은 주님을 감히 자기 집에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가 주님을 존귀히 여기게 된 것은 그의 사회적 경험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두 종류의 아랫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부하와 하인입니다. 부하는 군대에서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자들입니다. 그의 수하에 적어도 백 명의 부하들이 있었습니다. 백 명보다 더 많은 사람을 부리려면 조직과 기관을 통해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직접 사람을 움직이는 지휘관은 하위 말단 조직에서 일어납니다. 그는 백부장으로서 언제나 부하를 직접 부릴 줄 아는 리더십 경험이 풍부했습니다.

하인은 속을 빼놓고 주인에게 절대 복종하는 신분입니다. 하인에게는 의견이 없으며, 오직 주인의 뜻만 존재합니다. 이 백부장은 하인을 부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인을 부릴 때 부탁하지 않습니다. 오직 명령만 합니다. 그래도 하인들은 언제나 반항하지 않고 순복합니다.

만일 부하들이 항명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군대에서 가장 큰 죄가 항명입니다. 전투 중에서 항명하는 부하는 그 자리에서 직권으로 사형할 수 있습니다. 부하의 항명은 군대 조직을 흔드는 가장 위험한 죄가 됩니다. 그래서 감히 부하는 명령을 거역하지 못합니다.

만일 하인들이 항명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인은 사회적 신분입니다. 하인이 존재하는 사회는 하인들이 항명을 하지 못하도록 방어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회는 하인의 인권은 없습니다. 하인의 목숨은 파리 목숨입니다. 하인을 사람의 가치로 보지 않고 재산의 가치로만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하인이 항명을 하면 마지막 사회적 신분마저 잃게 됩니다. 그나마 먹고 살 여지를 남겨주지 않습니다. 가혹한 형벌은 그 자손들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래서 감히 항명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런 강압적인 사회적 규약에 의해서 복종한다면 그것은 어딘가 부족합니다. 상관들과 주인들은 그들의 존귀함을 통해서 아랫사람들을 부려야 했습니다. 덕과 사랑으로 다스려 존경을 받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존귀한 분 앞에 저절로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백부장은 자기의 상관을 존귀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9 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그도 남의 수하에 있으면서 상관의 말씀을 따르는 자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랫사람들을 부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존귀함이 무엇인지 잘 알았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존귀한 분인지 잘 알았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섬겼던 어떤 상관보다도 가장 위대하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감히 예수님을 집에까지 모시고 가는 일과 자기 집에 들이는 것을 어렵게 여겼습니다.

여러분! 성도들이 목사님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목사님을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이 기도를 부탁하는 것과, 목사님을 존귀히 여기는 사람이 기도 부탁하는 것을 비교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목사님을 무례하게 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목회 20 여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는 가끔 무례한 사람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면 마음속으로 “모르고 하는 일입니다. 저를 용서하옵소서.” 하면서 복을 빌어줍니다. 그러나 존귀히 청하는 사람에게 비는 축복과 비교하면 그 에너지가 다르기 마련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을 가장 존귀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분을 존귀히 여길 줄 알아야 복을 받습니다.

이제 다음 주면 ‘기도하는 한 사람’ 훈련이 끝납니다. 중보기도 훈련을 마친 분들은 이제 여러분들이 청한 기도 제목을 놓고 눈물로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 분들을 존귀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셋째, 이 백부장은 부스러기 같은 적은 은혜를 구했습니다.

이 백부장이 구한 것은 ‘말씀으로만 하옵소서’입니다. 기도를 받으려면 적어도 현장에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것이 상식입니다. 안수기도까지 받으면 더 좋습니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받으면 좋습니다. 잠간이 아니라 오래 받으면 더 좋습니다. 사람들의 은혜에 대한 욕심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주님을 번거롭게 해드리는 것을 부담으로 여겼습니다.

주님은 은혜를 주시기 위해 기꺼이 해주시지만, 주님을 부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길에서 한 마디 말씀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만큼만 은혜를 주셔도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아주 위대하고 크게 본 것입니다. 어설픈 능력자라면 그렇게 해서는 아무런 일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어설픈 분이 아닙니다. 말씀 하나로도 천하를 호령하며 움직이게 하실 분입니다.

이 백부장은 누구보다도 말씀의 위력을 아는 사람입니다. 군대 조직이 그렇습니다.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전능하시 주님 말씀 한 마디면 중풍병이 아무리 중해도 나으리란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원격으로도 능력을 행하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까지 주님은 한 번도 이런 원격으로 기적을 베푼 적이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이 백부장의 요청에는 거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백부장의 믿음을 크게 칭찬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이제까지 만난 사람들 가운데 이 사람의 믿음이 가장 탁월하다는 칭찬입니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이 백부장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이방인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아닌 이방 사람이 유대인들 앞에서 최고의 믿음의 사람이란 칭찬을 받습니까? 주변에 있는 유대인들은 뭐가 되는 것입니까?

여기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폭탄선언을 하십니다. 11 절과 12 절입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 8:11-12>

동서의 수많은 이방 사람들이 천국에 갈 것이다. 나라의 본 자손들 즉 유대인들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그야말로 폭탄선언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생각해 봅시다. 역사를 보면 이 예언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유대인들은 아직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선교학에서는 유대인들을 전도하는 것이 땅 끝입니다. 선교의 마지막이란 뜻입니다.

기적을 보면서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태도가 미지근한 유대인들은 야단을 맞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인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한 이 백부장은 믿음의 사람이라고 칭찬을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 믿음의 칭찬 받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하찮게 여김을 받는 사람까지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소자에게 찬물을 대접하는 사람이 믿음의 원동력 사랑이 많은 사람입니다.
주님을 존귀히 여기십시오. 그리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분들을 존귀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누구에게도 예의를 갖춰 대하십시오. 무례히 행하는 자는 반드시 실족합니다.
주님의 능력은 광대하십니다. 겸손히 부스러기만큼의 은혜라도 붙잡고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아끼는 마음, 바로 믿음의 마음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 이만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칭찬을 들으십시다.
(황 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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