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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독하십니까? (마 8: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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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나뭇잎들이 푸르긴 하지만 이제 조금 있으면 갈색으로 물들던지 아니면 노랑이나 빨강이나 이와 같은 가을 잎이 될 것입니다. 이제 조금 지나면 그것들이 떨어져 낙엽이 될 것이고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흩날려 지나가다가 어느 한곳에 모이게 되고 눈과 비를 맞으며 썩어져 또 다른 해의 생명이 움돋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낙엽이 떨어지다 보면 나뭇가지 끝에 외롭게 홀로 매달려 있는 나뭇잎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나뭇잎들이 혼자 매달려 있다가 스스로 떨어지는 모습을 우리는 또한 봅니다. 아마 제 생각에는 혼자 매달려 있는 것이 너무 고독해서 차라리 다른 떨어진 낙엽처럼 함께 떨어져 뒹굴어도 그것이 나을 것 같아서 스스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누가 그랬냐고요? 제 생각입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저희 집 책꽂이에 보니 김형석 교수의 에세이집이 전집으로 꽂혀 있었습니다. 지금 기억으로는 아마 6권짜리 책인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들도 그 시대에 아마 읽으셨을 텐데 제가 중학교 2학년 때니까 아마 35년 전쯤 전인 것 같습니다. 그 대표적인 책이 영혼과 사랑의 대화라는 책입니다. 그 외의 여러 제목을 가진 책들이 전집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또 한 가지 기억이 나는 것이 ‘고독이라는 병’이라는 제목의 책이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오래전 기억을 해보면 아마 이 책의 이름들을 기억을 하시고 읽으셨을 것입니다. 6권 중에 제목이 생각나는 책은 두 권이었습니다. 제가 그 책을 중학교 2학년 때 마침 집에 있는 책이라 읽게 되었는데 중학교 2학년이었던 제게는 무척 두꺼운 분량의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표적인 책은 ‘영혼과 사랑의 대화’라는 책이었지만 저는 그것보다는 유독 제 마음에 와 닿는 책이 있었는데 ‘고독이라는 병’이라는 제목의 책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지금 기억으로 한 고등학생이 김 교수님의 사무실에 찾아와서 이 고독이라는 것에 대해서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대답을 해주고 이와 같은 풀이하는 과정을 거쳐서 얘기가 시작되고 이제 책한 권이 다음 제목으로 다음 제목으로 이어져서 구성이 되어있는 것을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그 뒤의 내용은 다 잊어버려서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데 다만 책 제목은 정확하게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늘 제 마음에는 고독이라고 하는 단어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곤 합니다. 희랍의 어떤 철학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은 고독이라는 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저뿐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성도님들도 그리고 오늘 처음 초청을 받아 이 자리에 오신 우리 형제님들도 때로는 우리 코끝이 메케해지고 시큰해지며 다가오는 고독의 슬픔과 아픔과 서늘함을 느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고독이라는 것이 마치 우리에게 호흡과 같아서 누구에게나 있어지는 일이고 우리는 그 고독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리저리 애쓰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생애의 길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때로는 고독을 이겨보려고 달리기도 해보고 또 고독을 이겨보려고 목욕도 하고 음식도 먹고 사람도 만나고 얘기도 하고 취미생활도 해보지만 어느새 슬며시 다가와 우리 옆에 앉아있는 고독의 그림자를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피하고 잊어버려서 될 일이 아니라 친해지고 벗 삼아 같이 가야 해결될 일이라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의외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 저러한 이유로 문득 그리고 수시로 다가오는 고독의 그림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고 또는 심지어 너무 가슴 아픈 나머지 자신을 고독과 함께 있기 위하여 더 허무해지는 방법을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고독이라는 것이 결국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누구나 겪고 있는 공유물이며 누구나 그 고독과 함께 있고 또 그 고독을 극복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따라서 지나치게 자기를 연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의연하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로서 또 오늘 하나님 앞에 초청을 받은 믿음의 형제들로서 이 고독을 극복하며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의 길인 것을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모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으시고 기적과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8장의 전반부를 보면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문둥병환자를 고치셨고 또 본인이 눈앞에 있지 않는데도 백부장이 대신 나와서 자신의 하인의 중풍병 걸린 것을 얘기할 때 멀리서 말씀 한 마디로 그 하인의 중풍병을 완치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병자들이 찾아왔을 때 그를 고치셨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셨고 또 귀신을 쫓으셨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모여들어서 웅신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환호하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져 있습니다.

오늘 이와 같은 상황가운데서 당시에 존경받는 서기관 한사람이 와서 예수님께 말씀합니다. ‘예수님 나는 예수님이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 뒤를 쫓아가겠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면서 자신의 필연적인 고독에 대하여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기적을 행하고 능력을 행하고 사람들이 환호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주변에 몰려들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수님이 가는 길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이 곳이 있지만 머리 둘 곳 하나 없는 고독한 삶의 길을 가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본인이 느끼는 것처럼 절대적인 고독 속에 거하셨던 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본인의 절대 고독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 그 죄로 인하여 그 죄를 뒤집어 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하나님이 죄로 인하여 자신을 버리셨다라고 절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은 곧 다시 회복을 하시니 그 고독의 극복은 무엇이냐 하면 인간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용서였던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다 이루었다.’ 마침내 그들을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죄를 다 씻어주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다 이루셨던 것입니다. 그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그들을 미워하거나 그들에게 대하여 싫어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고 용서하심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절규하며 마음에 진저리치던 고독의 문제까지 해결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내용을 생각해 봄으로 우리의 고독의 문제를 풀어가려고 합니다.

오늘 특별히 여러 성도님들이 같이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우리 남자형제들이 많은 분들이 나와서 하나님 앞에 새로운 초청을 받아 주의 역사 속에 동참하고자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도대체 우리는 왜 고독한가? 요즘 우리 남자형제들이 사는 게 꽤 어려운 것 같습니다. 세상이 점점 어려워집니다. 마음에 원해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열심히 일하려고 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조금 있으면 시대의 변화속도가 너무 빨라 내가 생각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 그리고 내 주변 여건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것 가지고는 무슨 일을 할 수 없는 이와 같은 속도가 빠른 시대 속에서 점차적으로 우리들이 어려움을 더 크게 겪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떳떳하게 나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어.’라고 말할만한 자신을 잃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나는 원하는데 말할 수도 없고 나는 원하는데 일할 수도 없고 나는 원하는데 내가 원하는 꿈을 펼칠 수 없는 이와 같은 고통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외소해지고 소외되고 마음에 고독을 느끼는 것이 요즘의 형제들이 느끼고 있는 근간의 심정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이와 같은 심정 속에서 우리는 첫 번째로 왜 고독해지는가하는 것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고독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원시적인 고독은 하나님이 떠남으로 말미암아 생기게 된 고독입니다. 인간이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겼을 때 인간들은 동산수풀에 숨었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내서 부끄러움을 가리는 옷을 해 입히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낙원에서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분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분리라는 것은 죽음이고 하나님과 연적인 분리라는 것은 이들에게 소외감속에 처절한 고독 속에 절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고독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분리에서 느끼는 본원적인 소외감입니다. 더욱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는 그들의 마음에 있는 욕구와 소망을 다 채울 수 없기에 자신의 좌절과 무능가운데서 느끼는 고독을 그들은 체험하게 됩니다. 세상적인 힘이 있다 해도 그 힘과 능력만 가지고는 근본적으로 우리 마음에 고독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독이란 물질세계의 것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심정적인 것이며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물질만 가지고 고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위대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인생에 연약한 모습으로 내려가 처절한 고독 속에 절규하고 호소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저는 성경을 보면 모세만한 인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모세가 얼마나 큰 인물입니까? 모세의 큰 인물 됨됨이를 보면 모세는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정말 감히 바로에게 가서 말 한마디 할 수도 없고 바로가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여 광야로 도망쳐서 40년이나 숨어사는 모세인데 그 바로 앞에 가서 담대하게 ‘내 백성을 보내라’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던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나서 담대한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백성들을 출애굽 시켰습니다. 광야에서 40년간 고초하면서 그는 백성들을 인도해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보여주면서 ‘모세야 너는 저기 들어가지 못한다.’ 과거에 네가 잘못한 것으로 못 들어간다라고 했을 때 모세는 비록 잘못한 것이 있었지만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사람이 평생 살면서 잘못한 것 없는 사람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 앞에 한마디도 항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의 은혜대로 이 만큼 올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며 손들어 백성들을 축복하고 오히려 이제까지 그의 후계자로 세웠던 여호수아를 축복하고 그에게 백성들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들어갈 것을 명하게 됩니다. 모세는 대단한 인물이지요. 그의 공로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였습니다. 나를 통해서가 아니라 누구를 통해서든 하나님의 일만 이루어지면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바로 모세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위대한 인물 모세였지만 모세도 좌절하고 고독 속에 치를 떨던 절규의 때가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불평과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모세를 배척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배격하게 될 때 그는 하나님 앞에 간구합니다. 하나님 나로서 이 모든 일을 감당할 능력이 없사오니 하나님 차라리 내 목숨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세를 향하여 등지고 홀로 남아 있는 모세는 그 처절한 고독 속에서 하나님 앞에 차라리 이 마음의 고독과 이 좌절을 이기는 것 보다는 내가 목숨을 잃은 게 낫겠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성군임이 분명합니다. 많은 잘못도 있었지만 그 잘못을 능가할만한 더 긍정적인 면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삶은 그의 반평생을 사울왕에게 쫓겨 목숨하나 부지하기 위하여 이리저리 방황하던 삶의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너무 괴로워 하나님 앞에 그의 마음을 토설하여 시를 짓습니다. 그는 이방 블레셋에게 목숨하나 유지해 보겠다고 그는 숨어 들어갔으며 신하가 되기를 자처했고 심지어는 그는 미치광이 노릇을 하며 침을 흘리며 질질 미치광이 모습을 하고 있었던 이와 같은 처참한 때도 있었습니다. 목숨하나 살려보겠다고 이와 같은 처절한 삶의 고초를 겪으면서 그는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고독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를 봅니다. 선지자를 보면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주로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기록한 선지자 하나는 주로 능력을 행한 선지자입니다.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말씀을 기록하는데 그 말씀을 전하고 기록한 선지자들보면 거의가 고난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비교적 능력을 행한 선지자들은 좀 신나잖아요. 그래도 백성 앞에 능력을 행하면 백성들이 다 환호했습니다. 그런데 그 능력을 행한 선지자의 대표자격인 엘리야. 그는 그릿 시냇가에서 3년여 간을 숨죽이고 있다가 마침내 그는 기회가 왔을 때 갈멜산 산상에서 그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자들과 더불어 대결하여 대 승리를 이루고 그들을 다 처단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의 전기를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그만 그의 마음에 무너지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그 아합 왕의 왕비 이세벨이 아주 사악함으로 말이암아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탄언하고 암살의 위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강했던 엘리야가 순간적으로 마음이 무너지고 그의 영력이 무너지게 되니까 두려워서 도망치게 됩니다. 도망치다 도망치다 그는 마음속에 이제 지쳐 버린 것입니다. 내가 도망쳐서 뭐하나 도망쳐서 내 목숨을 유지해보면 뭐하나. 그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이제 나는 지치고 지쳐 있으니 하나님 차라리 나를 거두어 주시옵소서.’ 엘리야도 고독 속에 절규하며 하나님 앞에 그의 목숨을 거두어 주시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봅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릴지언정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베드로였지만 가야바의 뜰에서 예수님이 고통을 겪으실 때 모두가 예수님을 비난하고 모두가 예수님을 죽이라고 할 때 자기혼자 고독하게 처절한 고통 속에서 혼자 소외 되어져 있던 것입니다. 누구하나 자기 마음에 들어있던 것처럼 예수님을 흠모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하는 이와 같은 폭도들이 되어버렸을 때 자신은 몰래 혼자서 예수님을 멀리서 바라보고 안타까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계집종 하나가 베드로를 지목합니다. ‘너는 예수를 따르던 사람 아니냐?’ 그 말 한마디에 그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두려운 나머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예수님을 모릅니다. 나중에는 예수님을 욕까지 하고 그는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고독한 상태에서 그는 살고 싶어 절규하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새벽닭이 울 때 그는 가슴 아파 통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독 그 가운데 이루어지는 삶의 모습들 정말 너무나 슬픈 삶의 현장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 고독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생태적인 고통을 봅니다.

범죄로 말미암아 낙원에서 추방된 인생은 고독할 수밖에 없습니다. 삶의 능력이 모자란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그만큼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과 축복을 우리가 누리고 있다면 우리 삶에 능력이 모자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에, 절망과 소외감과 고독감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삼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품에 안기기전까지는 우리는 고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또 삶 속에서 성도답게 살지 못할 때 하나님이 다시 나를 버리는 것은 아닐까라는 이와 같은 두려움 때문에 또 고독하게 되고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고독하지 말고 차라기 주님 앞에 나와 회개하고 그 사랑을 회복하고 하나님이 주신 평안과 은혜를 누림이 더 나을 것입니다.

마음이 슬프고 마음이 고독하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하다는 신호입니다. 내 마음이 너무너무 슬프다는 것은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고독을 치유 받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더욱 고독해져서 발버둥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와 내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위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정말 사람 괴롭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고독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정말 고통 속에 절규하다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주님 앞에 나와 회개하고 치유를 받아야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을 위로 받을 곳을 찾으나 결국 위로 받을 수 있는 곳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과 방황의 더 큰 심연으로 빠지는 인생의 참담함을 봅니다. 사람들에게 우리는 위로받을 수 없습니다. 왜입니까? 사람들은 우리와 다릅니다. 생각이 달라요. 생각이 같아도 조금 우리를 위로해 주다가 마음이 바뀌고 달라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바뀌지 않고 달라지지 않아도 어느 날 문득 세상을 떠나납니다. 그러니까 우리 곁에 끝까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다만 그 순간의 마음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이 없이는 고독의 문제가 해결이 안됩니다. 가지고 있는 물질로도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결국 그것이 내 마음을 채워주지 못합니다. 물질 가지고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느끼고 있지 못합니까? 우리는 내가 일을 성취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내 고독을 해결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일은 또다시 해가 뜨고 또다시 해가 뜬다는 것은 또다시 일이 있고 우리는 또다시 그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수없는 나날의 새로운 일들을 우리는 어떻게 한번도 실수하지 않고 다 이룰 수 있겠습니까?

요즘 우리 형제님들 보면 정말 고독해 하는 것 같습니다. 아침에 나갈 때 마다 힘차게 씩씩하게 나가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도 많은 것 같아요. 옛날 같으면 주어진 여건 속에서 열심히 밭 갈고 돌아오면 되는데 또 전쟁나면 전투하다가 또 거기서 전사하면 그것으로 그의 모든 사명을 다 마치고 그저 가면 되는데 요즘은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 같습니다. 밖에 나가니 갈을 밭이 없어요. 수고하고 애쓸 곳도 없고 누군가가 내게 수고할 기회를 주는 것도 없어요. 나가긴 나가는데 내가 뭘 해야 되지? 어디를 가야 되지? 누구를 만나야 되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무거운 어깨를 가지고 내려갑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허탕치고 빈손으로 돌아올 때 그 어깨가 더 무거워진 것을 봅니다. 차라리 모든 것을 잊고 싶어지는 때도 있습니다. 하루의 전리품이라도 있을 때는 그것을 가지고 자랑하고 잠시라도 잊고 싶지만 빈손의 허전함, 처진 어깨의 고독, 어떻게 벨을 누르나 하는 삶의 난감한 고독들이 우리의 삶을 누를 때가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두 번째 그러면 우리의 고독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독을 이해하고 그 고독에 동참함으로 고독을 넘어서는 믿음을 소유함으로 우리는 고독을 극복해가야 합니다. 주님은 기적과 능력을 베푸셨으면서도 자신의 길을 아셨기에 고독해하는 것입니다. 말씀 한마디에 병이 낫습니다. 말씀 한마디에 귀신이 쫓겨갑니다. 말씀 한마디에 자연이 정복됩니다. 사람들이 그 주위에서 환호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서 길 위에 깔며 나귀를 타고 가는 예수님을 향하여 종려나무가지를 꺾으며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구하소서.’라고 예수님을 찬송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압니다. ‘며칠이 지나면 너희는 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눈 붉어진 부라린 눈으로 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 것이다.’ 사람들은 환호하고 있지만 나귀를 타고 들어서는 예수님의 마음에는 처절한 고독이 사무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사투를 벌이는 기도 중에도 그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 면케하옵소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제발 너희는 잠시라도 깨어 기도해다오.’라고 부탁했던 그의 제자들은 전혀 기도하지 못하고 쿨쿨 잠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에 아무도 동참해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 해골의 곳까지 가야하는데 거기까지 십자가를 지고 갈 힘이 없었습니다. 넘어져서 일어날 기력을 탈진했습니다. 비척거리고 가는데 누구하나 그 십자가 대신 매고 거기까지 가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랑하며 키웠던 12제자들 중에 아무도 그 십자가 대신 지겠다는 사람 없었고, 예수님 때문에 병이 나았고, 예수님 때문에 눈을 밝히 보게 되었고, 예수님 때문에 귀를 듣게 되었고, 예수님 때문에 앉았다 일어났던 사람도 누구하나 예수님 그 짧은 기간 동안 십자가 하나 대신 저주겠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만 몇몇 사람 여인의 무리들이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며 그 뒤를 따라갔을 뿐이지 사람들은 어디서 멀리서 모르는 척 하고 가슴 아파하면서도 예수님을 바라만 보았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주시하고 있으되 누구 하나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는 이와 같은 상태에서 예수님이 느꼈던 그 마음의 처절한 고독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독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고독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던 주님께도 있었던 고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고독을 생각하며 내게 있는 고독이라는 것이 그렇게 나의 전부를 삼킬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의 고독을 극복해야 합니다. 고독이란 나 혼자의 고통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이 겪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극복하고 나가야 할 과제요, 그것을 통해 성숙을 이루는 길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이 결국 고독의 순간을 겪었고 모두가 멸망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고독을 이긴 사람들도 있다는 뜻입니다. 인생의 가장 큰 적은 자기연민에 빠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연민에 빠지면 안됩니다. ‘나는 너무 불쌍해, 나는 너무 안됐어. 난 이렇게 어렵게 살아. 나 너무 힘들게 하고 있어.’ 여러분 인간이 자기연민에 빠지는 것이 가장 큰 적입니다.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되면 사람이 너무 나약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즐거운 일 놔두고 슬픈 일 가지고 나도 남도 괴롭히지 말고 내게 주어진 것 가지고 기뻐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오늘 새벽에 일어나서도 너무 행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이렇게 호흡을 주시고, 아침에 일어나 하늘을 보니 어둠 속에서 점차 밝아지는 하늘이 있는데 거기에 구름이 있어요. 그 어둠 속에 점점 밝아오는 하늘과 그 구름의 색깔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여러분 호흡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죠? 저를 볼 수 있죠? 누군지 저 아시죠? 제가 드리는 말씀 들을 수 있죠?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의미를 아시죠? 우리의 모든 감각기관과 우리의 사고 기관이 정상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하시면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않습니까? 생각하면 생각의 구조가 제대로 구동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가파른 계단 올라와서 예배드리고 한 시간 딱딱한 의자에서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 얼마나 큰 축복이에요. 여러분 돌아갈 집이 있고 돌아가시면 식사할 곳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별것 아니게 여기는 소소한 것들이 그들의 유일한 목표요, 꿈인 사람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처럼 이런 가파른 계단 한번 올라와 보는 것이 꿈인 사람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한 시간 이렇게 허리피고 앉아서 있는 것도 소원인 사람이 많고, 소리 한번 들어봤으면 좋겠다하는 사람들, 내 눈으로 온 세계 만물을 봤으면 좋겠다 하는 사람들. 내 손이 좀 움직여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줄 아세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감사해하며 내 마음에 드는 약간의 고독을 얼마든지 극복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고독이란 우리를 낙망시키고 낙심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의 극복을 통해 우리를 더욱더 성숙시키고 주님에 대한 이해와 믿음의 힘을 더욱 증진시킵니다. 고독을 괴로워도 말고 우리는 슬퍼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냥 익숙한 친구처럼 그러나 우리는 그 고독을 극복을 통해서 은혜의 사역을 위한 새로운 힘의 세계로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근본적인 고독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과 용서함입니다. 내가 내 마음에 있는 근본적인 고독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사랑함과 용서함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극한의 고독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주님이 드디어 그 고독을 헤어나는 순간이 있죠.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다 이루었다.’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은 고독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워하면, 시기하면, 질투하면, 이루지 못한 꿈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면 우리는 점점 고독해집니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나의 모든 것이 내 잘못임을 깨닫고, 스스로 용서받을 때, 하나님께 용서받을 때, 사람에게 용서받을 때, 사람들을 용서할 때 우리는 절대 고독 속에 풀려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백성은 한이 많아서 한의 민족이라고 합니다. 한을 품고 살면 절대 고독에서 풀려나지 못합니다. 자 옆에 사람에게 인사합니다. ‘한을 품지 맙시다.’ 자, 다시 한번, ‘한을 품지 맙시다.’ 한을 품으면 우리는 고독에서 해결을 받지 못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고독의 긍정적인 면 고독이 주는 유익한 면을 생각해 봅니다.
고독해지면 우리는 주님을 찾게 됩니다.
고독의 저 끝에 계신 주님의 모습을 봅니다. 고독히 길을 가다가다 보면 그 끝에 주님이 서 계시고 마침내 고독에 절규하다, 고독에 우리는 치를 떨다 마침내 우리 주님을 만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시편 121편을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우리를 고독 가운데 해결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깊이 있는 인생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독하기 전에는 내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이루기가 힘듭니다. 기쁘고 즐거울 때는 노래하고 누리고 즐기기도 바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깊은 고독의 심연 속에서 침묵하며 우리 인생에 대한 묵상을 통해 우리는 인생의 깊이를 체험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내 고독을 체험하고 그 고독을 극복해 보아야 그 아픔을 느낄 수 있고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독을 도울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독 속에 자신의 모습을 보고 가야할 길을 찾고 인생이 왜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가 귀한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애틋한 삶의 하루하루들, 한순간 한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해요? 여러분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여러분 옆에 있는 사람 정말 소중한 사람들이에요. 내게 주어진 한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내게 주어진 작은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하나님이 내게 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것입니까? 정말 우리는 애틋하게 사랑하고 애틋하게 정말 기쁨과 감사함으로 우리 삶을 누려야 합니다. 그것을 누리지 못하면 우리는 너무나 억울하게 세상의 고통만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독, 십자가를 지고 갈 때, 기적을 맛보았던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아무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겠다고 달려든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기적의 떡을 먹었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기적을 체험했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병이 나았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능력으로 귀신을 쫓았고, 눈이 열렸고, 귀가 열렸고, 그들의 문둥병이 나았음에도 불구하고 누구하나 그 거리에 십자가 하나를 지고 갈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3년이나 같이 먹고 생명을 나누었던 제자들도 누구하나 그 십자가 잠깐 지고 가겠다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때 그 예수님의 고독을 어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모든 죄를 지시고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로 고독을 극복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고독 속에 가슴이 아파봐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물을 알고 내 상처로 가슴아파봐야만 다른 사람에게 내게 얼마나 상처를 끼쳤는가를 알게 됩니다. 죄송한 마음과 회개의 마음과 용서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고독을 두려워말고 고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나뭇잎이 물들고 낙엽이 떨어지게 됩니다. 가을이 되면 사람들이 괜히 좀 고독해 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길거리에 나뭇잎이 떨어져 있으면 그것을 밟는 것이 마음이 좀 아프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떨어진 나뭇잎이 꼭 제 모습 같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 같기 때문에 그 낙엽을 쉽게 밟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죠? 정말 그 낙엽을 함부로 막 밟을 수가 없습니다. 그게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가 좋아하는 시 한편 읽어드리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귀천’이라는 천상병씨의 시입니다. 하늘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짧은 시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이 세상 소풍 왔다가 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늘에 가서 하는 말이 내가 참 아름다운 삶을 살고 왔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주의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최 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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