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마 21:23-32)

  • 잡초 잡초
  • 461
  • 0

첨부 1


  지난주에는 "포도원에 들어가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받았는데, 오늘은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일하는 즐거움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한 것부터 먼저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유명한 스티븐 코비라는 박사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란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의 성품은 근본적으로 습관의 복합체이다"라고 합니다.  습관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모릅니다.  "우리의 생각의 씨앗을 뿌리면 행동의 열매를 얻게 되고, 행동의 씨앗을 뿌리면 습관의 열매를 얻는다.  습관의 씨앗은 성품을 얻게 하고, 성품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라고 합니다.  7가지 성공적인 습관에 세 번째가 "소중한 것부터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도적이 되어야 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살라고 하니 공격적이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책임적인 인생을 살라는 말과 같습니다. 

  위대한 교육학자인 [호레이스 만]이라는 사람은 "습관은 밧줄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습관이란 밧줄을 매일 짜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짜여진 습관은 절대로 파손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습관은 고쳐질 수도 있지만, 응급 처치하는 식으로 짧은 시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좋은 습관을 가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스티븐 코비 박사는 최근에 {원칙 중심의 리더십}이라는 책도 썼는데, 참으로 좋은 책입니다.  그런 책을 읽고 묵상할 때는 나도 그런 좋은 사람이 되고, 위대한 정신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스티븐 코비는 몇 사람과 공저로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시계가 아니라, 나침반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빨리 가느냐 하는 것보다는 어디로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을 알고 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방향을 잘못 선정하고 빨리 가기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입니까?"  저자는 말합니다.  "인생에서 지름길은 없지만, 올바른 길은 있다"  "우리의 인생에서 긴급한 것도 있지만, 소중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사명을 찾는 것은 정말 소중한 일이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소중하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시계만 바라보지만 나침반을 바라보려고 아니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나침반은 우리의 비전, 가치, 원칙, 양심, 방향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마사루 이브카가 지은 "엄마는 인생 최고의 스승이다"라는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1920년 인도에서 선교하던 싱 목사님은 부부는 캘커타에서 서남쪽으로 100Km 떨어진 한 작은 마을에 전도하러 갔다가 한 동굴 속에서 두 마리의 늑대를 발견하고 잡았습니다.  그런데 두 마리의 늑대를 자세히 보니 늑대가 아니라, 인간이었고, 어린 여자 애들이었습니다.  어린것들이 어쩌다 어머니로부터 버려져 늑대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하였고, 늑대들과 함께 살고 늑대처럼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싱목사님 부부는 이 어린 여아들을 데려다가 한 아이는 '아마라', 한 아이는 '카마라'라고 이름을 붙여주고, 한 고아원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키우면서 인간으로 환원시켜보려고 무진 애를 쓰며 정말 애정을 가지고 자식처럼 키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끝내는 인간으로 환원이 불가능하였습니다.  이 야생아들은 항상 네 발로 뛰어다녔으며, 두 발을 일어서는 것은 어쩌다가 일어나는 우발적인 현상에 불과하였고, 음식을 주면 그냥 입으로 먹었습니다.  비바람이 불면 밖으로 뛰어나가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두 아이들은 질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어렸을 때에 누구를 바라보고 자랐느냐, 누가 길렀느냐, 어떤 환경에서 자라났느냐 하는 것으로 그의 인격이 형성되는 것이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자가 한 말 중에 귀한 말은 "유전보다는 교육과 환경이 우선적이다" "짐승 속에 자라면 짐승이 된다", 어머니들에게 주는 좋은 격언과 같은 말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좀더 인간답고, 인격적으로 좋은 성품을 가지고 살아가면 좋겠다 하는 바램입니다.  우리의 생각, 말, 그리고 행동 이것으로 우리의 삶은 결정 나고 맙니다.  생각이 항상 좋은 생각을 하고, 우리의 말에 독기나 가시가 없고, 긍정적이고, 우리의 행동은 언행이 일치되게 신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건전하고 성숙하고, 참 좋은 인격의 사람이라면 생각과 언어와 행동에 있어 남다른 데가 있고,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고 주님을 닮아가야겠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 보면 유대교회가 항상 개혁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였다고 하면 문제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자기 갱신을 하지 않아 희망을 잃었습니다. 사람들이 달라지기가 매우 힘든 것은 알지만, 유대교인들은 전혀 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 내려오면서 변질될 것도 모르고 바르게 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역사에 등장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공생애를 살면서 당신이 예배를 받으시던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보셨습니다. 성전에 들어가 보니, 이것은 성전이 아니라, 시장 터도 그렇게 악덕 상인들이 모인 시장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폭리가 아니라, 이것은 아예 사람들이 옷을 벗겨 빼앗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이 사용하는 화폐는 데나리온이란 돈이었는데, 그것은 은화로 황제의 화상이 주조되었다고 하여 우상이라고 하여 사용할 수 없게 하고, 자기들의 고유한 돈인 세겔이란 돈으로 바꾸어 바치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돈 바꾸는 환전상이 있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 온다는 말은 제사 드리러 온다는 말이요, 그것은 곧 제물을 가지고 온다는 것입니다.  제사 드리러 오는 사람의 수만큼 제물이 필요하였습니다.  제물은 소, 염소, 양, 비둘기만 제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제물을 드리던 자기 형편대로 드릴 것이지만,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흠 없는 제물을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요, 최선의 것으로 드린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끌고 올 때에는 흠 없는 것이었는데, 먼 길을 오는 동안 병나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다보니 예루살렘 우시장에 와서 잘 보아 흠 없는 제물을 사서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보고는 아무래도 흠이 있어 보인다고 하면 흠 있는 것으로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마당에서 사 가지고 들어오는 제물은 제사장이 제대로 검사하지 않고 그냥 받아주어 흠 없는 제물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부정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경제와 종교가 유착되어 부정을 가져왔습니다.  여러분, 종교가 타락하는 것은 종교인들이 돈의 위력에 굴복하고, 돈의 맛을 아는 것입니다. 장사꾼들이 제사장들을 구어 삶아서 뒷거래가 이루어지는데,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나라에서 유일한 성전인데, 그것도 일년에 3차례는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데, 제사장을 거역하다가는 지옥에 가라는 말을 들을 것이요, 울며 겨자 먹기로 성전에 갈 때마다 비싼 제물을 구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에 보니 매매하는 사람들,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 환전상인들이 아예 의자를 놓고 장사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을 채찍을 드시고 매매하는 모든 사람을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말했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라고 외쳤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성전을 깨끗하게 청소하시고, 성전 마당에 맹인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이 나아오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이러니 여러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으니, 유대 교권자들도 한편 부끄럽기도 하지만, 예수를 잡아 죽여야 다시는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다음 날이 되었습니다.  어제 성전을 청소하셨던 그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오셔서 백성들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여러 제사장들, 그리고 서기관, 백성의 장로들이 모여서 예수를 죽일 방안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이날 예수님 앞에 장사하던 사람들이 와서 항의한 것이 아닙니다. 돈 바꾸던 사람들이 찾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 우리의 생계를 위협하느냐"고 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과 서기관, 백성의 장로들이 찾아와 항의하고 따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정작 따지고 문제삼고 나와야 하는 사람은 장사꾼들이요, 환전상들인데, 교권자들이 나왔습니다.  교권자들이 돈에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23절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예수님이 지금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다 내어쫓았는데, 그렇게 행동할 수 있도록 누가, 어떤 직함으로 자격을 부여하였느냐는 것입니다.  저들 교권자들의 눈에 보기에는 예수님이라는 사람은 아무런 자격도 없고, 어떤 직함이 없고, 어떤 권위도 없는 사람인데 공연히 심기를 건드리고 잘난 척 나선다고 본 것입니다. 

  24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지금 기막힌 역질문으로 문제를 해결하시고 있습니다.  랍비들이 토론하는 시간에 사람들이 와서 랍비를 골탕 먹이기 위하여 질문하는 이들이 있으면 반대질문을 사용하라고 합니다.  논리학에서는 "뿔은 뿔로 잡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 뿔이란 뿔난 송아지처럼, 사리 분별이 없이 쳐 받고, 옹고집을 부리고, 생트집을 잡고 , 투기하고, 되바라진 것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25절입니다.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여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고 하고 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내가 메시아라'고 말씀하시면 당장에 잡아죽이려고 할 것이었습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하시는데, 왜?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거론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권자들이 세례요한을 하늘로서 오신 선지자로 인정하면 예수님은 이 땅을 구원하러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 됩니다.  그동안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인정하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교권자들은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세례요한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하면 그러면 좋다, 당신은 왜 그를 믿지 않느냐고 하실 것이고,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나님이 보낸 종이 아니요, 자칭 선지자라고 하면 온 백성들이 나와서 돌을 들어 칠 것이니, 이러치도 못하고 저러치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27절입니다.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마7:6에 말씀하시기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주려고 할 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 주는 것이지, 남아 돌아간다고 나누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이신 지를 간접적으로 말씀하시면서 지금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거역하고 있지만, 이방인들과 죄인과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으며, 유대인은 메시아의 사역을 보면서도 끝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비유의 천재라고 합니다.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예화를 들었는데, 한 아버지가 있어 그의 집안에 두 아들에게 같은 말을 하셨습니다.  큰 아들에게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맏아들은 대답하기를 "예, 아버지 가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그 날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둘째 아들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얘야,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 이 때에 작은 아들은 "싫습니다."라고 대답하였지만, 후에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뉘우치고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예를 들어 말씀하시고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따지고 묻는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그 때에 사람들은 "둘째 아들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여러 말씀을 듣게 되고, 어떤 특별한 말씀이 주어지고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는 "예"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예"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예", "아멘"으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하고, "예"와 "아멘"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와 "아니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몇 가지의 유형으로 응답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살펴볼 수 있는 사람은 대답은 "예"라고 하고서 생활도 "예"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대답하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두 번째 유형으로는 대답은 "예"라고 하고는 생활은 "아니오"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셋째의 사람은 대답은 "아니오"라고 하고는 생활은 "예"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답은 "아니오"라고 하고는 생활도 "아니오"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어떻게 응답하고 반응하는가 하는 것으로 그의 습관을 형성합니다.  이것이 그의 가치관이 되고, 그의 성품이 됩니다.  우리는 "아니오"라고 말하고는 "예"의 삶을 살아가는 것도 좋겠지만, 우리는 "예"라고 말하고, 가서도 "예"의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보면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고 하셨습니다.  "예"라고 해놓고 가지 않은 자식이나, "싫소이다"하고 말하고는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한 사람도 사실 아버지를 온전히 기쁘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라고 말하고,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였으면 얼마나 좋았을 것입니까?  그래도 하나님의 뜻은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암송하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외쳤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라고 찬송하였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거역하고 집을 나갔어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지난날의 허물을 묻지 아니하고,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결박하고 속박하고 부자연스럽게 하려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참으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고, 복되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임신한 한 여인이 초음파 검사를 받기 위하여 병원에 갔습니다. 초음파 검사를 하던 의사의 행동이 이상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갑자기 행동이 빨라지고 당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초음파를 통해서 검사한 결과 태 중의 아이가 움직이지 않고 이미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날 그녀는 태아를 떼어내는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퇴원한 후 그녀는 주일이 되었을 때에 거의 회복되어 거동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우울해서 교회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집에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녀는 일어섰습니다. 그 날 그녀의 일기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너무 마음이 산란하고, 우울해서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날이 주님의 날인 것을 알고 결국 나는 마음을 정하고 교회에 갔다..... 좋아하는 찬송가를 부르며 귀에 익은 찬양대의 합창소리를 듣는 가운데 어딘가에서 평화가 밀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 나는 내가 있어야 할 바로 그곳에 와 있다.  ... 그 날 성찬식에 참여하면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온전히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의 영혼은 하나님의 거룩한 안식처에 닻을 내릴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런 일기를 읽어보면서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나아가면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요, 우리의 안식이요, 평화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활이 우리의 일생을 지배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인간으로 살아가라는 무언의 명령이 오늘도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때로는 사람의 명령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명령이든지 우리에게 감당할 일들이 있고, 의무와 책임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아무런 의무도 책임도 없다고 하면 그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의무도 있고, 책임도 있기에 보람도 있고,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영혼구원, 복음전도의 사명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어떤 의무와 어떤 책임이 하나도 없었다고 하면 그것은 아무런 보람도 의미도 없는 동물적인 삶에 불과한 의미 없는 인생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에는 일할 것이 많습니다.  오늘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는 음성에 순종하시고 충성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 홍 모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