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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공동체(4) - 코이노니아(교제) Fellowship (요일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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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문학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부자와 형제간에 애욕을 그린 작품입니다. 아버지 표도르와 백치 거지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 스메르자코프는 자기를 낳아준 친아버지를 살해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무신론자이며 냉소주의적 지식인 둘째 아들 이반은 “신이 없는 이상 남을 사랑해야 한다는 법칙도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신이 없으면 인간이 신이다”란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에 대해 그의 동생 박애주의자 알료샤는 “논리보다 앞서서 우선 사랑하는 거예요. 사랑은 반드시 논리보다 앞서야 해요. 그 때, 비로소 삶의 의미도 알게 되죠.” 라고 말합니다.

도스도예프스키는 장남 드미트리의 입을 빌려 인간의 마음이란 “악마와 신이 서로 싸우고 있는 싸움터” 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는 신이 마음속 싸움에서 승리해야 하고, 선과 악의 투쟁은 결국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사랑하려는 힘과 사랑하지 못하는 힘의 대결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정신적 지주로 등장하는 조시마 장로는 “지옥이란 다름아닌 바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데서 오는 괴로움” 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역설합니다. “대지에 입맞추고 끊임없는 열정으로 사랑하라. 환희의 눈물로 대지를 적시고 그 눈물을 사랑하라. 또 그 환희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것을 귀중히 여기도록 하라. 그것은 소수의 선택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장영희, 문학의 숲을 거닐다. p.111-112)

그렇습니다. 열정적으로 사랑하며 그 안에서 기뻐하는 것은 소수의 선택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선물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죽게 하셔서 우리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받았으므로 우리 안에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사랑을 서로 나누는 공동체가 바로 청산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새로운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오늘은 ‘교회는 교제(사귐)의 공동체입니다’ 란 주제로 말씀을 드립니다.
설교제목을 코이노니아 라고 성경의 원어인 헬라어로 그대로 쓴 것은 코이노니아를 우리말로 교제라는 단어에 담기에는 너무 깊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코이노니아는 동창회나 향우회나 계모임같이 서로 뜻맞는 사람끼리,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사람끼리 모여 사귀는 그런 친목 수준의 교제가 아닙니다. 코이노니아는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고통과 영광, 눈물과 땀방울과 나아가 핏방울까지, 삶의 작은 일에서부터 큰 일까지 전반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코이노니아는 삶의 전반을 함께 나누며 서로 위로, 격려하고, 칭찬과 축복을 아끼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 안에서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이런 교제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요한일서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주후 100년 이후,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이 다 세상을 떠나고, 초대교회의 감격과 기쁨과 영광이 다 사라지고, 2세대 혹은 3세대 기독교인들이 부모의 신앙을 물려받아 습관적으로 전통에 따라 이름 뿐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예배를 드리기는 드리는데, 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기쁨과 감사가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세에 일어날 징조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2)고 말씀하신 것처럼, 성도간에 사랑이 식어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믿는 신앙이란 부담이요 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세상 속에 살면서 불신자들과 다르게 사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적당히 세속에 물들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와 비슷한 점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좀 더 실감나게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게 될 것입니다.

2. 본문에서는 특별히 기독교 공동체인 교회 성도의 교제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두 가지 차원을 갖고 있습니다.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의 교제입니다.
먼저, 수직적 차원의 교제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3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너와 나의 사귐만 있어서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사귐이 아닙니다. 5절을 보면, “하나님은 빛이시라” 고 합니다. 빛이신 하나님이 너와 나 사이에 계실 때, 우리의 교제는 올바른 성도의 교제가 됩니다. 나와 너, 그 사이에 하나님, 이렇게 삼위일체를 이룰 때 건강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나와 너 사이에 하나님이 왕래하십니다. 이게 성도의 교제입니다.

빛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말합니다.
너와 나 사이에 하나님이 계실 때, 우리의 교제에는 영광의 광채가 빛납니다. 기쁨이 충만합니다. 성도끼리 만나면 주로 무슨 대화를 나누십니까? 정치적인 문제, 어려운 살림살이, 자녀교육문제, 남편과의 갈등, 고부간의 어려움, 직장생활의 고민.

이런 우리의 일상생활을 함께 나눕니다. 그런데, 이 정도에서 멈추면 아니됩니다. 이 정도는 예수 안 믿는 친구들과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교제에는 하나님이 왕래하셔야 합니다. 그런 어려운 생활 가운데서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만났는지, 그런 문제를 안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위로해주셨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 당신이 만난 하나님, 이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얼마나 기쁨이 충만한지 모릅니다. 교회에 와서 큰 기쁨과 소망을 얻어 돌아갑니다. “나도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라는 문제해결방법을 안고 돌아갑니다. 영광의 광채이신 하나님이 우리 사이에 왕래하시는 교제, 참으로 행복한 성도의 교제입니다.

빛은 어두운데서 바른 길로 인도해줍니다.
너와 나 사이에 빛이신 하나님이 계시면, 우리의 교제의 방향을 잡아줍니다. 어두운 곳으로 가지 않습니다. 퇴폐적인 대화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아무리 교제를 많이 하여도 인터넷 자살사이트에서 어떻게 자살할까 함께 나누는 교제는 죽음의 교제입니다. 빛이신 하나님이 우리 사이에 계시면,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게 되고,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는 방향으로, 서로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빛은 모든 더러운 것을 그대로 드러내줍니다.
6절, 8절, 10절은 모두 “만일” 로 시작합니다.
6절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서 행하면 거짓말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8절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10절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리니”

이 세 구절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우리는 죄가 없다. 우리는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당시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영지주의 이단들입니다. 영지주의 이단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이들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영계는 선하고 물질계는 악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를 무시하고 세상을 경시합니다. 영을 중시하다보니, 하나님과 사귐만 있으면 되지 성도간에 사귐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육체로 이 땅에 오신 것도 부인합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육체는 인간의 영을 가두는 감옥이니, 우리는 그 감옥에서 벗어났으니 죄가 없다. 죄를 짓지 아니하였다’ 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잘못된 신학과 신앙생활에 대하여 “아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분과 사귀고 그분을 만나면 우리의 더러움이 다 드러난다. 그것을 감추지 말라. 자신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세우라. 그러면, 그분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면서, 9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시는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 앞에 나가서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깨끗이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스스로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범죄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
빛이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워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를 고백하는 길만이 진정한 하나님과의 사귐을 갖는 길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3.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사귐은 그냥 영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으로만 되는 게 아니고 수평적인 사귐 즉 성도간의 사귐으로 입증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여, 성도간의 사귐이 없는 하나님과의 사귐은 빈 말이라는 것입니다.
7절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성도의 사귐은 빛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일서 2:10-11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빛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성도의 온전한 사귐을 보여줍니다. 위로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고, 옆으로 형제 자매와 사귐이 있을 때, 진정한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옆으로 성도간의 사랑의 나눔이 없다면, 십자가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말로만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성도간의 사귐을 불필요한 것으로 무시하였습니다. 

이런 잘못된 신앙행태에 대하여 요한일서 기자는 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그분을 우리 눈으로 보았고, 그분을 우리 손으로 만졌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육체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육체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우리에게 줍니다.
신앙을 추상적인 것으로, 지극히 신비적인 세계의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지극히 구체적인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내 옆의 형제 자매를 지극히 사랑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를 나누는 사람입니다.

4. 작년 2월 미국 우주 왕복선 컬럼비아호 폭발 사고로 우주인 7명 전원이 목숨을 잃었을 때, 기독교인 남편 릭을 떠나보낸 아내 에블린의 이야기가 가이드포스트지 작년 4월호에 커버스토리로 실렸습니다. “지난 1월 16일 이제 2주간이 지나면 남편이 우주에서 돌아와 나를 꼭 안아 주며 내 귀에 다정하게 속삭여 줄 것을 생각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우주 왕복선의 이륙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2월1일 컬럼비아호는 지구 대기권에 진입하던 중 텍사스 상공에서 폭발했다. 내 삶이 하늘에서 송두리째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엄마, 내 수학 숙제는 누가 도와주나요? 내가 결혼할 때 누가 날 데리고 입장하는 거지요? 울부짖는 딸 아이를 난 아무 대답 못하고 끌어안고 있었다. 난 지금까지 남편이 없는 미래를 한 번도 상상할 수 없었다. 처음 경험하는 큰 충격과 실망감.

그런데 그 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인생의 어려운 시절마다 한결같이 위안을 주던 음성이었다. 주님의 음성이었다. 넌 헤쳐 나갈 수 있다고 그분은 말씀하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 결혼 생활의 중심에는 우리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그 큰 사랑을 언제나 의지해 오지 않았던가, 그 조건 없는 사랑을. 그리고 그 사랑은 내가 울부짖는 순간에도 여전히 나와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분의 사랑이 내 남편과 나를 그리고 내 예쁜 두 아이를 묶어 주시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분이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그의 사랑 안에서 여전히 함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의 사랑이 끝이 없는 것이기에.(That love is neverending.)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늘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끝없는 그분의 사랑이 여러분의 인생 끝날 때까지 함께 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시48:14)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위기를 뛰어넘고, 성도 간에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 재 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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