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를 파는 자가 누군가? (눅 22:14-23)

  • 잡초 잡초
  • 387
  • 0

첨부 1


왜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도 힘이 들까요? 조금 평안한 듯 하다가도 폭풍이 휘몰아칠까요? 더욱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뜨겁게 기도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왜 더 큰 어려움이 올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예수님을 파는 자의 손이 주님과 함께 상 위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맞는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고 계십니다. 그 자리에는 예수님과 열두 명의 제자들이 함께 식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넘겨줄 자라고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지난 3년 반 동안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보고 배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르며 배웠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넘겨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다른 복음서에서는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넘겨 줄 것이다 나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 사람이 누군지 잘 압니다. 누구입니까?
가룟 유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과연 가룟 유다만이 예수님을 넘겨줄 자요 예수님을 팔아먹는 자인가요?

그 다음에 계속해서 나오는 말씀을 보면 곧 이어서 제자들이 누가 크냐 누가 큰 사람으로 될 것이냐를 가지고 말다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기 유다만을 내세워서 그가 예수님을 넘겨줄 자요 팔아먹는 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과연 예수님을 넘겨주는 자요 팔아먹는 자입니까?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내가 먼저 예수님을 팔아먹고 있더란 말입니다. 예수님을 넘겨준다고 하는 것은 곧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말로는 그리고 겉으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순종한다고 하면서도 실제적인 나의 속마음은 그렇지를 못하더란 말입니다. 나는 주님을 진실되게 따르고 있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저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 지난 한 주간 얼마나 심란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마음으로 울었는지 모릅니다. 내 딴에는 그래도 열심히 주님을 섬긴다고 했고 맡겨 주신 사명을 따라 성도들을 이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주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야말로 외식하는 자다. 너야말로 가증한 자요 삯군 목자라고 말입니다.
"너 정말 부끄러움 없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니? 너 정말 지극히 작은 자 하나까지도 마음을 다해서 섬겨왔니? 생각해 봐라. 네가 성도들이 아픔을 얼마나 너의 아픔으로 여기고 내 앞에 엎드렸더냐? 그들의 마음 졸임을 네 일처럼 여겨 그렇게 마음 졸이며 내 앞에 있었더냐?

그리고 또 생각해 봐라. 네가 가장 먼저 섬겨야 할 네 가족을 위해서는 어떻게 했니? 정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그들을 참된 사랑으로 섬겼는지 한번 말해 보려무나. 그들이 너를 필요로 할 때 따뜻한 말 한 마디 따뜻한 손길을 얼마나 내밀었더냐? 그들이 필요로 할 때 그들 옆을 지켜 준 적이 얼마나 있더냐? 그들이 네 앞에서 웃고는 있을지 몰라도 속으로는 울고 있을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너 생각이나 해 봤니? 네가 조금 피곤하다고 해서 짜증내고 얼굴 찡그린 적이 한 두 번이더냐? 아니 냅다 소리 지른 적은 또 얼마나 많더냐? 네 자녀들이 얼마나 상처받는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목회자의 자녀답기만을 바라고 있지 않았니? 말로는 그들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것 같이 하면서도 너의 체면만 생각하지 않았니? 아버지의 입장이 되기보다는 목사의 입장에서만 자녀들을 바라보지 않았더냐?

네 아내에게는 또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 봐라. 사모 이전에 그도 한 사람의 아내이어야 하거늘 너 언제 한 사람의 아내로서 대해본 적이 있더냐? 그가 정말 위로가 필요할 때 따뜻한 말 한 마디라도 해 준 적이 얼마나 있었더냐?
그들 속이 시커멓게 타 들어가고 있는 것을 너 알기나 하니? 너의 말 한 마디로 인해서 네 가족이 그리고 성도들이 상처받은 것은 또 얼마나 많으냐? 성도들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가 필요할 때 진실한 위로의 말을 전했는지 생각해봐라. 그저 입에 발린 말만 한 것이 아니었더냐? 내가 그들을 네게 맡겨 주었거늘 네가 선한 목자로서 너의 사명을 다 감당했더냐? 너는 너무 자주 잠들었으며 게을렀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했는데 너는 양들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것이 무슨 까닭이냐? 네 심령 속에 온갖 추하고 더러운 것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 아니더냐? 그저 세상 욕심으로 가득하지 않았더냐? 온갖 음란하고 가증스러운 것들로 네 안에 가득하지 않더냐?
그리고 너는 한없이 높아져서 얼마나 교만했더냐? 네가 하는 일들이 누구 일이냐? 그런데도 너는 네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나 된 줄로 착각하고 있더구나. 네가 무슨 대단한 능력자인줄로 알고 살아가더구나.
네가 스스로 작은 자요 약한 자로 알아 겸손할 때 내가 네 안에 강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데 너는 나의 설 자리를 다 빼앗아 버렸더구나. 그런 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아픔들이 생기고 있는지 생각이나 했더냐?

오늘 교회 안에 성도들의 가정에 있는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무엇 때문인지 아느냐? 너의 교만함 때문이요 너의 온갖 추하고 더러운 것들 때문이요 나의 능력으로 행하지 못한 까닭이요 네가 깨어 기도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니 네가 먼저 회개하고 성도들의 용서를 구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내 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엎드리도록 하여라.

지금이야말로 너와 온 교회의 모든 저주의 굴레를 끊어야 할 때다. 이제 때가 되었다. 네가 먼저 내 앞에 철저히 너의 모든 교만을 깨치고 너의 모든 게으름과 너의 바르지 못함과 너의 깨어 있지 못함을 회개하고 바로 세우라. 그럼으로 너를 따르는 모든 성도와 교회의 어려움들이 회복되고 모든 저주의 굴레가 끊어지리라."
이 말씀들을 들으면서 얼마나 가슴을 쳤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진실한 마음으로 여러분께 용서를 구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바울 사도를 통한 권면을 생각해보도록 하십시다.
"무릇 더러운 말을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서 너희가 구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바울은 무릇 더러운 말을 입 밖에도 내지 말고 라고 말합니다. 이는 단지 저주하거나 맹세하거나 상스러운 말이나 욕설 등을 하지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더러운 말이란 자기 자신의 소원, 욕심, 꿈 그리고 필요 이외의 다른 어떤 목적도 없이 오로지 자기 중심적인 말이었습니다. 더러운 말은 현재의 삶에 매인 개인적이며 세속적인 욕심에 의해 지배되는 마음으로부터 나옵니다. 이는 예수님만을 의지하고 세상에 주님을 전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오직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이루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오직 자신의 즐거움만을 위해 말해 왔던가요? 그리고 그런 우리들의 말이 자녀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저주의 굴레란 바로 말로 유전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우리들의 말을 듣고 그대로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러운 말, 믿음 없는 말,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들을 삼가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 특히 가족들의 마음을 멍들게 만드는 말들을 함부로 하고 있는지를 깨닫는다면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존재, 사랑, 긍휼, 은혜 그리고 부르심에 기초해서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한 말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말입니다. 먼저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면 듣는 사람이 유익하도록 주의 깊게 말하게 되죠. 다시 말해서 온전한 말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며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무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듣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덕을 세울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말해야 합니다. 덕이 되는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특히 덕이 되는데 소용되는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이에게 은혜를 끼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다음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는 것입니다.
"이 순간 유익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은혜를 전하는 도구로서 말할 수 있는가?"
그래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도록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를 입술에 머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곧 참된 사랑과 용서의 실천에 이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2장 23절에서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예수님은 결코 복수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표현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이, 복수하고 싶은 생각에서 화해하는 생각으로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고, 판단하는 마음에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우리로 하여금 용서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록 준비시키고 있습니다. 
성경은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놀라운 용서의 은혜를 누릴 수가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성경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는 것이 한번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실천해야 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비록 같은 사람이 몇 번씩 반복해서 잘못하더라도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용서란 단순히 잠깐 눈감아주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서로에게 죄를 용서해준다는 말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용서에 대한 최고의 모범은 주님이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용서를 우리가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서 용서를 반복해서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에게 죄를 용서해 준다고 분명하게 말해야 합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저지른 일이 결코 옳은 일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용서를 통해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평안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아니 용서를 하게 될 때 상대방의 마음 이전에 내 마음이 먼저 평안을 누리게 되더란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합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한다. 나는 이미 다시는 이 문제를 기억조차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나 자신에게나 너에게나 아니면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이 말은 두 가지를 이룰 수 있습니다. 먼저는 대적 사탄의 역사를 막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이미 시작하신 깨끗케 하심과 회복이라는 두 가지 사역을 이루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용서와 회복의 선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받아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사랑이 넘치는 역사를 행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는 마음으로 거리낌 없이 축복의 말을 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상처에 바르는 약과 같이 우리 영혼을 치료하시는 말씀으로 축복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고도 용서한다면, 이제는 그 사람에게 축복의 말을 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축복의 말이란 사랑과 위로와 은혜와 인내와 온유와 친절 그리고 격려의 말입니다. 그 말들은 갈등의 폭풍을 잔잔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되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는 할 수 없지만 오직 주님께서 강권적으로 내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축복하도록 만드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 짜증과 조급함과 비난과 협박을 퍼부어 댐으로써 악한 마귀에게 얼마나 많은 기회들을 주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저주의 굴레가 되어 우리를 감싸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용서와 화해의 선언과 축복을 통해 이 모든 저주의 굴레를 끊으시고 은혜의 통로 축복의 통로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우리를 저주의 사슬에서 끊기 위해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떡과 잔을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면서 "이것이 너희를 위해서 주는 내 몸이요 너희를 위해서 흘리는 내 피라고 말씀하시면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어주셨습니다. 우리로 하나되게 하시기 위해서 기도하셨던 주님은 또한 우리로 하나되게 하시기 위해서 이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우리가 죄의 사슬에서 풀려나게 되었단 말입니다. 모든 원망과 시비와 다툼과 저주의 굴레와 세상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라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주님의 목숨을 내어주시기까지 희생하셨던 사랑을 본 받아야 합니다.

참된 사랑은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내 앞에 있는 가족뿐 아니라 우리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의 문제가 단순히 남의 문제,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문제, 나의 이야기로 알아 주님 앞에 엎드리도록 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저 강 건너 불 보듯 하다 보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기회 축복의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 죽어 주실 때 나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은혜 받을만한 사람이었습니까? 내가 은혜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었습니까? 우상 장사 아브라함처럼이나 우리는 온갖 세상의 추악한 것들로 가득차 살아가고 있지를 않았습니까? 아니 지금도 여전히 세상에만 관심이 있고 나 하나 잘 되기만 바라고 있지를 않습니까? 하지만 주님의 죽으심은 그런 우리로 하여금 나 홀로가 아닌 사랑으로 하나된 삶을 살도록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사단의 저주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나 홀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하나됨을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던 것처럼 그리고 떡과 잔을 함께 나누도록 하시면서 이를 기억하라고 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니까 나 혼자 은혜 받아서는 안 됩니다. 내 가족만 잘 되면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잘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복을 받아 누려야 됩니다. 그것이 주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도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도록 하여야 합니다. 돌아본다는 것은 필요를 함께 나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관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깨어 있어 주의 깊게 살피노라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눈에 뜨이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조금도 아낌없이 도움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외로운 사람에게는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됩니다. 말벗이 필요한 사람도 있습니다.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 모두에게 힘이 되도록 사십시오. 무엇보다도 서로를 축복하며 중보 기도로 하나되도록 하십시오. 사랑과 용서로 하나되십시오. 이제 마음 속에 품었던 모든 아픔들을 다 떨쳐버리십시오.

과거의 상처가 있다면 그 상처를 주었던 모두를 용서한다고 선언하십시오. 그리고 그 모든 아픔들을 가지고 우리를 저주의 굴레로 몰아갔던 모든 악한 마귀의 저주의 굴레로부터 나는 해방되었노라고 선언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어주신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의 삶이 어땠습니까? 작은 일에도 상처를 받고 상처를 받은 만큼 퍼부어대며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아니면 그 모든 상처를 속으로 속으로 파묻고 아픔 속에서 한을 품고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악을 선으로 갚으십시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바로 떡과 잔을 나누어주시면서 "이것이 바로 너희를 위한 내 몸이요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이것을 받아서 함께 나누어 마시라고 했습니다. 고통도 아픔도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슬픔도 괴로움도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아픔을 주었으니 너도 그만큼 고통스러워야 한다고요?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으로 대할 때 하나님께서 갚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갚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내가 갚으려고 하면 나도 함께 망하고 맙니다. 그것이 바로 사단이 노리는 술수입니다. 거기에 속지 마십시오.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사랑으로 더불어 살아가도록 하십시오.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주님께서 이루고자 하셨던 아름다운 천국을 누리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그 하늘에 속한 모든 복을 누리도록 하십시오. 이런 사랑의 교제와 하나됨이 우리로 하여금 온전케 하며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게 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새 언약은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픔이 없이는 참된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 살을 깎는 아픔으로 상대방을 감싸주십시오. 오히려 그들에게 참된 사랑과 위로와 격려와 칭찬의 말을 아끼지 마십시오. 말로 힘이 되어 주십시오. 말로 위로가 되어 주십시오. 말로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그리고 축복하십시오. 어려움이 있거든 위하여 중보기도해 주십시오. 항상 손을 내밀어 잡아주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이미 우리 앞에 있던 모든 저주의 굴레에서 우리는 다 풀려났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저주의 굴레를 만들지 마십시오. 또 다시 예수를 넘겨주는 자 예수님을 파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사랑으로 함께 하지 않는 자가 바로 주님을 파는 자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파는 것입니다. 또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가되지 마십시오. 오직 사랑의 실천, 회해와 용서의 선언과 축복을 통해 이제는 모든 저주의 굴레를 끊고 우리와 자녀들이 천대에 이르도록 복을 누리도록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홍 인덕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