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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 (대상 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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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회에서나 남다른 특권을 누리는 사람은 거기 상응하는 책임도 따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람은 천사가 부러워할 만큼 존귀한 신분과 특권이 보장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신분에 걸맞는 거룩한 행실과 또한 주어진 사명에 헌신해야 되는 책임이 있습니다. 신분에 걸맞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오히려 주어진 특권을 박탈당하고 더 비천한 자리로 밀려나게 되는 상황에 이르고 맙니다.

옛날 믿음의 조상인 야곱에게는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이스라엘 열두 지파입니다. 그 중에 르우벤은 야곱의 맏아들로서 그 이름이 언제나 열두 지파의 선두에 나옵니다. 장자로서 당연한 권리를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장자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여 결국 그 지위를 잃고 말았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역대상 5:26에는 그의 자손이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붙잡혀 망하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슬픈 역사의 기록입니다. 세습적인 장자 상속권을 중요한 전통으로 하는 히브리 사회에서 다른 지파가 다 망해도 르우벤 지파는 그 정통성을 붙들고 건재하여야 되는데 오히려 장자권을 빼앗긴 채 가장 먼저 멸망한 지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르우벤 지파가 불행하게 된 원인을 살펴보고 이 시대 하나님께로부터 특권을 부여 받은 성도의 소임을 다시 한 번 자각하는 기회가 되기 바랍니다.

I. 당연한 권리를 상실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중에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1) 장자권의 축복

고대 족장사회에서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는 장자권의 축복을 최상의 가치로 여겼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태어났을 때 하갈과 그의 소생 이스마엘을 떠나보냈습니다(창 21:14). 그것은 훗날 상속권을 두고 적자인 이삭과 서자인 이스마엘과의 분쟁을 염려하여 미리 조치한 것으로 봅니다.
이삭의 아들 에서와 야곱 사이에서도 장자권의 다툼은 있었습니다. 쌍둥이 형제인 에서와 야곱은 리브가의 태중에서부터 싸우던 중 에서가 먼저 나오고 야곱은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따라 나왔습니다.
선두 다툼에서 밀린 야곱은 훗날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사는 가하면(창 25:31-34), 결정적인 순간에 아비를 속이고 그 축복권을 가로채기까지 했습니다(창 27:21-29).

(2) 자제력을 상실한 사람

르우벤의 아비인 야곱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불러 놓고 큰 아들부터 차례대로 축복의 예언을 하였습니다. 창세기 49:3-4에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고 하였습니다. “물의 끓음” 같다는 것은 뜨거운 열정이나 신속한 행동을 뜻하는 것으로서 긍정적인 성품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자제력을 잃은 실수와 연결시켰습니다. 그것은 끓어오르는 정욕을 참지 못하고 해서는 안 될 행동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고 했으니 풍기는 외모나 사건을 처리하는 능력이나 개인적인 소양에 있어서 다른 사람과 비교가 안될 만큼 월등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탁월한 능력과 뛰어난 재주를 가졌다 하더라도 자기를 다스리는 절제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도는 날마다 자기와의 싸움을 통해서 경건을 지켜나가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하였습니다(고전 9:27).

(3) 부도덕한 행실을 저질렀습니다.

야곱은 르우벤이 장자로서 실격당한 이유 중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35:22에 보면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네 명의 여인을 통하여 열두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장자인 르우벤은 첫째 부인 레아의 몸에서 났습니다. 빌하는 둘째 부인인 라헬의 몸종이지만 야곱과의 사이에서 단과 납달리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렇게 볼 때 빌하도 엄연히 야곱의 아내이며 르우벤에게는 작은 어머니가 됩니다. 르우벤이 빌하와 통간할 때 이스라엘이 이를 듣고 알았습니다. 자식이 저지른 패륜을 보면서 그 때는 아무 말 없이 지나갔지만 야곱의 마음에는 큰 상처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아비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겨 놓고 장자권의 축복을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II. 대의를 저버렸습니다.

모세와 함께 애굽에서 올라온 이스라엘이 요단강 동편에 있는 아모리 땅에서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쳐서 멸하고 그 땅을 처음 취했을 때(민 21:25-35), 르우벤 지파 사람들이 그 곳을 자기들의 영지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자기들 지파가 가축이 많고 그 땅은 가축을 기르기에 적당하니 저희 가족들을 거기 머물게 하여 달라는 요청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목적이나 대의(大義)보다도 가족들의 안위와 자기 지파의 몫을 챙기기에 급급하였습니다.

(1) 육신의 편안함을 선택하였습니다.

민수기 32:1에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의 떼가 있었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곳은 가축에 적당한 곳인지라”고 했습니다. 4-5절에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가축에 적당한 곳이요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 또 가로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산업으로 주시고 우리로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목적 있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특히 모세와 함께 애굽에 올라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목표로 고달픈 행진을 계속하였습니다. 아직도 그들 앞에는 요단강을 건너는 일과 여리고 성을 위시하여 가나안 땅에 버티고 있는 일곱 족속과 전쟁을 치러야 되는 힘든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르우벤 지파 사람들은 가족들의 안일과 물질적 번영을 위해서 그곳에 머무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육신의 편안함을 먼저 생각하는 불신앙적 행위입니다.

(2) 하나님의 백성과 단절되었습니다.

르우벤 자손이 요단강 동편 땅을 분배 받아 다른 형제들보다 먼저 가족들에게 안정된 생활환경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매우 계산에 밝고 약삭빠른 행동으로, 우선은 그것이 성공하는 것 같았으나 결국은 멸망에 이르는 화근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른 지파 사람들이 가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전쟁을 치르는 등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거치는 동안 저희의 가족들은 안전한 지대에서 편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훗날 이스라엘 왕국이 수립되고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성전 예배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때 요단강 동편에 자리 잡은 르우벤 지파 사람들은 거기서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저희 열조가 하나님께 번제 드렸던 제단의 모형을 따서 단을 만들고 훗날 자손들이 하나님과 멀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맹세를 하였지만(수 22:21-29), 결국 세월이 지나면서 그 후손들은 이스라엘의 변방취급을 받다가 일찍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Ⅲ. 한 때 대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역대상 5:18-22절에 보면 르우벤 지파가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와 더불어 그 주변에 있는 아라비아 사람들과 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그 전쟁에서 대적을 이기고 승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비결은 “저희가 싸울 때에 하나님을 의뢰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20절).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범죄할 때 징계는 하시되 그들을 버리지는 않으신다는 것을 일러주는 내용입니다.

(1) 선민과의 언약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창세기 25:12에 보면 하갈 사람들을 이스마엘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이 이스마엘 족속의 시조는, 아브라함의 첩인 하갈에게서 난 아들 이스마엘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난 후 줄곧 아라비아 지역을 배회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과는 대적이 되어왔습니다.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도 이삭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있는 선민의 계열이지만, 하갈의 몸에서 난 이스마엘의 후예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반열에서 제외된 민족입니다(갈 4:21-3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비록 죄를 범했을지라도 택하신 자기 백성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민족들과 싸움을 할 때 조상과 맺은 언약을 생각해서(창 17:21), 선민의 편을 들어주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불신자들과 섞여 사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의로움이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언약 때문에 항상 자기 백성을 눈동자 같이 살피고 지키시는 것입니다(신 7:8, 32:10). 

(2) 위기에 처한 성도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역대하 5:19-20절에 보면 “저희가 하갈 사람과 여두르와 나비스와 노답과 싸우는 중에 도우심을 입었으므로 하갈 사람과 그 함께한 자들이 다 저희 손에 패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싸울 때에 하나님께 의뢰하고 부르짖음을 하나님이 들으셨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위기에 처한 사람은 언제든지 회개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기만 하면 하나님은 지체 없이 그를 도와주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대하 16:9). 다만 우리가 위기에서 벗어나고 어려움 가운데서도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의로움이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비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Ⅳ.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렸습니다.

지도자 모세가 르우벤 지파에게 그 땅을 허락하면서 의미심장한 당부를 하였습니다. 신명기 29:8-9에 보면 “그 땅을 취하여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나니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르우벤 지파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여 복을 받는 길을 저버리고 오히려 율법을 거역하여 저주 받는 길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1) 이방의 풍속을 좇았습니다.

역대상 5:25에 “저희가 그 열조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지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타락한 인간의 문화는 육체의 쾌락과 음행으로 얼룩져왔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율법을 저버리고 이방인의 풍습에 어울리는 것을 신앙의 정절을 저버리는 간음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야고보서 4:4에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롬 12:2).

(2)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배도하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우상을 숭배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열왕 중에는 선한 왕과 악한 왕으로 분류되는 기준이 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나 남쪽 유다의 므낫세 같은 왕은 악한 왕입니다. 그들은 왕의 권세를 이용하여 백성들에게 우상을 숭배하도록 강요했고, 이를 말리거나 제지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개인이나 국가가 우상을 섬기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로 멸망하게 됩니다. 역대상 5:26에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앗수르 왕 불의 마음을 일으키시며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의 마음을 일으키시매 곧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사로잡아 할라와 하볼과 하라와 고산 하숫가에 옮긴지라 저희가 오늘날까지 거기 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 지파는 하나님의 징벌로 가장 일찍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조상으로부터 이어지는 당연한 권리를 상실하고 세습적인 축복을 저버린 르우벤 지파의 불행을 우리는 남의 일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그동안 하나님께 받은 많은 은혜와 축복에 비하여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도 장자 교단이라 불리우는 우리 총회가 영적인 혼미 속에서 지도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파수하지 못하거나 거룩한 성품을 훼손하게 되면 영권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 모두 르우벤 지파의 불행한 역사를 교훈 삼아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손 상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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