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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때를 알고 행하는 사람 (에 4: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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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때를 알되 육체의 때를 잘 안다. 가령 아기를 낳을 때, 농사를 지을 때, 학교에 갈 때 등 이러한 때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사람은 하늘에서 비가 올 것인지 안 올 것인지 기상의 때도 잘 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은 헌신의 때, 사명의 때, 하나님의 때를 잘 분별하지 못한다. 늘 판단을 내려도 보이는 것에만 의존하고 눈과 귀를 땅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그렇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르드개는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대성 통곡한다. 하만의 계교로 유대인 말살의 때가 공포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 모르드개는 왕후에게 전갈을 넣어 민족의 급박한 사정을 알게 하며 위기를 타개할 결단을 촉구한다. 에4:14上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이라고 하였고 또 에4:14下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라며 두 번씩이나 '이 때를' 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바사 나라의 왕의 왕비로 고운 옷을 입고 부귀 영화를 누리는 삶이란 결코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운다. 예쁜 얼굴로 왕의 왕비로 간택 받은 그 자리가 결코 개인의 호의 호식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해준다. 민족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기 위해서 일해야 하는 바로 이 때를 위함이란 말 앞에서 에스더 왕비는 회답을 준다. 자기 자신은 민족의 위기를 알리기 위해서 행동해야 하며 자신의 삶의 위치는 바로 특별한 때를 위한 자리임을 고백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에스더는 때를 바로 보는 자요, 그 때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다. 왕후이기에 특별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 특별한 것은 무엇을 해야 되는지 행동의 때를 읽는 데 있다. 에스더는 때를 읽고 움직임으로 구원을 가져오는 민족의 표상이 되었다. 부림절을 만든 주인공이 되었다. 여성의 위대함을 증거하게 되었다. 우리도 때를 읽을 줄 알고 때가 요청하는대로 움직이는 특별한 사람들이 되기 위해 에스더에 관해 배우자.

첫째, 말씀의 때를 맞추어 산 사람이다. (전3:1∼8)

전3:1∼8 말씀을 보니까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으며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 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읽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인생의 삶이란 다양한 때가 있는데 에스더는 잠잠할 때에 잠잠하고 말할 때에 말하는 왕비가 되었으니 실로 말씀이 말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맞추어 산 사람이다. 가장 적절할 때까지는 금식으로 침묵하고 기회가 와서 민족의 위기를 공개해야 되는 그 때는 목숨을 걸고 말하였으니 물러설 때와 나설 때를 바로 행동한 것이다.
에스더는 어두움 속에 빛나는 새벽별 같다. 사람들은 대개 거꾸로 산다. 나설 때 나서지 않고 추하고 더러운 욕심을 채울 때, 전리품을 나눌 때, 이득과 명예가 올 때 나선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이 순종을 요구할 때, 사역을 요구할 때, 자기 포기를 요구하고 희생을 요구할 때 말씀의 때를 맞추어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희생과 봉사의 때에 앞장서는 아름다운 사람이 교회에 많아지기를 기도하자.

둘째, 은혜 갚을 때를 놓치지 않은 사람이다. (에4:16上)

에4:15∼16上 "에스더가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회답하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하였다. 에스더가 금식 기도를 요청하는 이 회답은 바로 모르드개의 요청을 받아드린 것을 뜻한다. 에스더는 고아였다. 에2:7을 보면 에스더는 전쟁 고아였다. 모르드개가 부모 없는 에스더를 자기 딸 같이 양육하였는데 본래 에스더는 삼촌의 딸이었다. 그러므로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양부와 같았다. 자기를 정성껏 길러준 아버지의 위급한 도움 요청 앞에 에스더가 반응하는 것은 은혜를 받은 자로서 그 은혜를 갚을 수 있는 보은의 순간이었다.

사람은 짐승보다 나아야 한다. 짐승도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보은을 하는데 은혜 갚을 때에 외면하고 모른 척 한다면 개보다 못한 것이다. 이솝 우화에도 산비둘기와 개미 이야기가 있다. 사냥군이 비둘기를 잡으려 총을 겨누었을 때 개미가 사냥군의 발을 물었다. 따끔하는 순간 방아쇠를 잡아 당겨 오발탄이 되고 말았다. 산비둘기는 살아났다. 나중에 홍수가 나서 개미가 흙물에 떠내려갈 때 산비둘기는 개미를 살리기 위해 나뭇잎을 물어다 준다. 그리하여 나뭇잎에 올라선 개미는 살아나게 된다.

은혜 갚을 때를 우리들도 놓치지 말자. 의무로 할 수 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은혜의 강물에 목욕하고 은혜 갚을 때를 붙잡자. 주님의 교회가 90년이란 세월과 함께 이제 구원의 방주로 세워지고 있다. 체면과 직분을 따라 나이와 성별을 따라 구원받은 은혜, 돕는 은혜, 나의 나 되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여 보답하는 삶을 살자. 영생을 주신 주의 교회를 세우는데 이 교회를 통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드리자.

셋째, 큰일을 위해 일할 때를 선택한 사람이다. (에4:16下)

에4:16下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궁중의 규례는 엄했다. 왕이 왕비를 부르지 않았는데 궁중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아가면 죽음에 처하는 법이 있었다. 에4:11을 보면 에스더는 그 방이 있어서 왕비가 되고도 부름이 없어 왕 앞에 나아가지 못한 지가 30일이 되었다. 다만 왕이 은혜를 베풀고 금홀을 내밀면 살 수 있는 법도 있지만 규례를 어기고 나아가는 것은 자살 행위와도 같았다. 그런데 에스더는 개인의 목숨보다 유대 민족 전체의 생명을 생각했다. 민족이 학살을 당하고 말면 왕후의 자리가 꽃방석으로 만들어져 있다한들 무슨 기별이 있겠는가?

왕후 에스더는 자기 생명을 드려 다수의 생명을 살려낼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는 결단을 한다. 그녀는 민족을 위해 일할 때를 받아드리고 일사각오로 민족을 살리는 일을 선택한다. 실로 큰일을 위해 자신의 안전한 자리를 버릴 줄 아는 여인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름받은 자들이다. 민족과 역사보다 더 크신 주님의 왕국을 위해 어떤 헌신과 희생도 각오하고 바치는 성도가 되자. 내가 잘 되어야지 내가 손해 볼 수 없다. 내가 왜 희생하고 내가 왜 죽어야 되는가? 이 이기적인 자아에 집착하면 만사에 때를 놓친다. 선의의 때, 섬김의 때, 희생과 사랑의 때 봉사의 때를 다 놓친다. 그리고 생명을 건져내는 일에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자기 배만 위하는 인생이 되고 만다. 민족과 역사까지 우리가 짊어질 수 없다 하더라도 내 이웃과 가까운 지역 안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는 때를 선택하자. 우리가 몸을 담고 섬겨야 할 교회를 세우는 일도 저절로 되지 않는다. 때를 읽고 때에 합당하게 일하며 때를 놓치지 않고 헌신하고 목숨을 걸어야 한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목숨을 걸지 않고 작은 일도 해낼 수 없다. 자기를 부정해야 한다. 나의 이기적인 사욕을 부셔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을 살려낼 수 있다.

나의 서 있는 사람의 자리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사람을 다스리는 높은 자리인가? 사람을 섬기는 낮은 자리인가? 그 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민족을 위해 역사를 위해 교회를 위해 일해야 할 때를 외면치 않고 나의 삶의 모든 축복을 사용하며 목숨을 걸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여러분이 은행장이라면 사업주라면 다른 사람보다 책임은 더 질 수 있는 자리라면 그 누리는 것들을 큰일을 위해 사용하자. 법관으로 정치인으로 교사로 군인으로서 바로 그 자리가 복음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고 복음의 열매를 위해 언행심사가 선택되어야 한다. 그러면 나를 통해 다수의 생명을 살리게 된다.

넷째,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할 경건의 때를 안 사람이다. (에4:17)

에4:17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의 명한 대로 다 행하니라"
모르대개의 말대로 움직이는 결단을 한 왕후는 금식을 시작한다. 모르드개에게 회답을 준 내용은 유다인 전체를 보아 에스더 왕후를 위해 밤낮 삼일을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금식하는 협력의 요청이었다. 그 협력의 요청 앞에 모르드개는 에스더의 요청대로 다 움직였다. 이렇게 보면 에스더는 자기의 힘과 의지와 선택만 가지고 때를 붙잡은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에게 보여드리는 금식이 절대적인 간구의 방법이라 믿었기에 경건의 때를 안 사람이다. 나 혼자의 금식보다 나의 시녀와 함께하는 금식, 나의 시녀 뿐만아니라 양아버지인 모르드개의 금식, 그리고 유다인 전체의 금식, 금식하는 사람의 수가 10명, 100명, 1,000명, 10,000명 많을수록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기에 큰 문제를 하나님 앞에 맡길 수 있기에 금식하였다.

실로 에스더는 온 유다인의 금식의 협력이 있어야 승리할 수 있음을 보았고 그래서 지금은 금식의 때라 믿고 마음을 하나로 집중시킨다. 유다 민족의 힘만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위기, 조금도 길이 보이지 않는 어려움의 문제, 이 때에 최선의 길이 무엇인가? 금식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에스더는 하나님의 도움을 얻기 위해 마음을 모으는 결단을 한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를 놓치면 안된다. 주님이 기도시킬 때 주님이 무릎 꿇게 할 때 그 때를 받아드리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게 하자. 태산 같은 문제 앞에 있을 때 기도를 해야 할 때임을 알고 각성하자. 마음을 모으는 경건은 금식만 있는 것이 아니다. 먹는 것을 금하는 것도 금식이지만 보는 것을 보지 않는 것, 듣는 것을 듣지 않는 것, 입는 것을 입지 않는 것, 늘 가는 곳을 가지 않는 것, 신앙의 깊이 있는 생활을 위해 시간과 재물과 마음을 빼앗는 모든 것을 피하고 멈추는 일을 시작하는 것도 금식이다. 경건의 때를 피해서도 안된다.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하는 절대 위기가 있을수록 경건의 때를 붙잡자.
에스더는 때를 읽고 때를 붙잡고 때에 맞는 결단을 함으로 큰일을 행하는 축복의 왕후가 되었다. 때를 알고 행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하자. 특별히 각오하자. 너무 무절제한 삶을 돌아보고 일정기간 동안 성경만 보리라, 말씀 묵상만 하리라는 뜻을 세우자.

교회 건축의 때에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요구하는 대를 분별하여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헌신으로 주님을 위해 일하는 성도가 되자. 말씀이 요구하는 때, 은혜 갚을 때를 놓치지 않고 행하는 성도들이 가득할 때 거기서 사는 역사, 되는 기적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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