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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병 환자를 고친 주님 (막 1:4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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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 환자를 고친 주님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마가복음 1장 40절-45절)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병든 자들을 고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필요하다’고 하면서‘인자가 온 것은 죄인을 찾아 구원 얻도록 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병든 자란 누구를 의미하겠습니까?
병이 들었다는 것은 건강을 잃었다는 말이고,
건강을 잃었다는 것은 죄로 인함이라는 결론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지었을 때, 아픔이나 병이 없는 낙원(樂園)으로 지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 죽음이 왔고, 그 죽음의 원인이 병으로 시작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 보면, 처음 것들은 다 지나갔으니 다시는 아픔이나, 고통이나, 죽음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병은 사망에 이르는 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병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공도가 되었습니다.
누구나 병을 앓지 않는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모두 우리는 병중에 살다가 병으로 결국 죽을 존재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 병든 자인가? 할 때, 죄의 값인 사망의 권세 하에서 사는 우리 모두가 병든 자들이란 말입니다.
죄의 값인 사망에서 우리 주님은 병을 고치셨고, 자신이 그 병을 짊어지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에 처음 나오는 동기를 보면 병으로 나오게 된 경우들이 많습니다.
육신의 병이든, 정신적인 병이든, 병을 고치기 위하여 믿음의 세계로 들어오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대부분 육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하다가 영혼의 병을 깨닫고 영생의 문으로 들어가는 경우들을 많이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주님은 병을 고치는 의사입니다.
주님이 세상에서 고친 병을 보면 각색 병을 다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제일 버림받은 문둥병자를 고치셨습니다.

1. 주님은 나병 환자를 고치셨습니다.
모세의 율법대로 보면 나병은 저주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병은 천형(天刑)이라고 생각하여 가족들로부터도 격리를 당해야 했습니다.
또 이 병은 전염병이라고 하여 사람을 기피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회생활로부터도 격리를 당해야 했습니다.
누구도 만날 수 없고,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병을 숨겼다 발각나면 돌탕에 맞아 죽어야 하는 끔직스러운 형벌의 병이었습니다.

그런 나병 환자가 오늘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어쩌면 그의 마음은 죽음을 각오 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주님 앞에 스스로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 속에는 한없는 간절성과 확신이 들어 있는 말이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소문은 이미 들어서 알뿐만 아니라 그분이 원하면 나의 병은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큰 교훈을 얻습니다.
병을 고치려면 먼저 자신이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믿음도 보통 믿음이 아니라 전적으로 맡기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믿음입니다.
이 말 속에는 전적으로 당신께 맡긴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들의 믿음을 보면 자기의 원대로 고쳐 달라고만 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맡긴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맡기고 기도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기적은 일어납니다.

병이란 육체적인 병이 있는가 하면, 정신적 병이 있습니다.
구제불능의 병이 요즘도 있습니다.
육체의 병중에는 <암>이나 <에이즈> 같은 것이 그런 종류에 속하는 병입니다.
그런 병을 정복하기 위하여 부단한 연구들을 합니다.
또 정신적 병에는 <절망>이란 병이 그런 병입니다.
<절망>이란 병에 걸리면 고칠 수 있는 약이 없습니다.
<절망>이란 병의 시초는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에 걸리면 모든 것이 다 귀찮습니다.
살고 싶은 희망이 없어집니다.
이런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나 자신인지도 모릅니다.
어디에서 이런 병을 고칠 수 있겠습니까?
<약>으로 고칠 수 있는 병이 있지만, 약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이 바로 <절망>이란 병입니다.
절망은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 절망스러운 병에서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이 나병 환자가 주님께 목숨을 걸고 나온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 자신의 절망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울증이나 절망을 극복하려면 믿음뿐입니다.

지평선 혹은 수평선을 영어로는‘horizon’이라 하는데, 헬라어의‘호로스’에서 나왔습니다.
호로스는 ‘제한(limit)’을 뜻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수평선을 인간 시야의 제한선,  인간 능력의 한계선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라고 했습니다.
수평선 넘어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믿음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내 현실적인 이 절망스러운 병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란 말입니다.

빅터 프랭클(Victor Frankel)은 2차 대전이끝날 무렵 나치 독일의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기록하였습니다.
수용소를 감시하던 군인들이 와서 갇힌 사람들에게 “모두 밖으로 나오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어두운 곳에만 오래 있던 그들은 햇볕이 너무 강해서 몹시 불편해 했습니다.
감시원이“당신들은 이제 자유니까 수용소에서 나가 고향으로 돌아가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어두운 수용소 방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유라는 말을 믿지 않았고, 이왕 죽으려면 익숙한 수용소에 들어가 얼마 동안만이라도 편히 있겠다는 자포자기식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육신의 병도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치료가 빠르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예 절망적으로 자기를 보고 있는 사람에게는 치료가 되지 않는다고 의사들이 말합니다.
우리는 절망적인 병을 통하여 희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무신앙의 사람들의 치료 효과에 큰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2. 주님은 어떻게 나병 환자를 대하였습니까?
개역 성경대로 보면 주님은 저를 볼 때‘민망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개역 개정판에는‘불쌍히 여겼다’고 번역하였습니다.
불쌍히 여겼다는 말은 좀 평범한 말이기도 합니다.
민망히 여겼다는 것은 난처하게 여겼다는 뜻이 있습니다.
민망히 여겼다는 것은 이 환자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이었기에 저의 심리를 들여다  보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이미 생명을 걸고 자기 앞에 나타난 나병 환자였습니다.
당신이 거절하면 죽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절박감을 감지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그의 영적 세계를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이 이 땅에 온 그 목적에 따라 이를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간 민망히 여기면서 그를 불쌍히 여겼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가지 큰 교훈을 찾습니다.

죄인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감지하게 됩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구원하려고 왔습니다.
즉 죄로 뭉그러진 구제 불능의 인간도 민망히 여기면서까지 용납하시는 주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죄로 뭉그
러진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병 환자의 특징이 무감각이라고 합니다.
아픔을 느끼지 못한 채 얼굴이 일그러지고 손가락이 떨어져 나간다고 합니다.
이렇게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인생을 포기한 상태에 내 버려진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까지도 주님은 관심을 가진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죄의 나병 환자들까지 마음으로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세리의 집 삭캐오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며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죄인을 멀리하지 않고 그 믿음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오늘도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면서도 죄인에 대한 아픔도 없이 포기한 상태로 살아가는데 문제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삭캐오도 주님이 지나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를 보기를 원했습니다.
똑같은 세리장들이 그때도 많았겠지만, 삭캐오가 구원을 받은 것은 그 마음속에 주님을 보기 원했다는 것, 그것이 다른 점이었습니다.
죄인이 구원 받으려면 바로 이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어떻게 병자를 고쳤습니까?

3. 주님은 직접 손을 내 밀어 그에게 안수하여 고치셨습니다.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니...’라고 했습니다.
손을 댄다는 것은 그 병을 자신이 옮겨 간다는 뜻입니다.
친히 병을 옮겨 짊어지신 것을 의미입니다.
나병은 전염된다고 하여 누구나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그런 환자에게 손을 댄다는 것은 그와 함께 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이 죄인이 되시는 주님입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저 십자가는 모든 죄인의 죄를 자신이 떠맡아 짊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구원의 은혜가 아직도 감격스럽지 못한 것은 이 나병 환자처럼 자신이 죽을 죄인이었음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주님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온 동네방네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이것이 고침을 받은 자의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우리가 왜 주님을 전하지 못하고 있는가?
자신이 나병 환자였음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다’는 찬송처럼 우리도 속죄의 은혜를 전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전도의 행위요, 이것이 감사의 행위입니다.

이번 추수 감사주일은 이 은혜를 생각하면서 총동원 주일로 선포합니다.
절망 중에 있는 묻혀진 성도들, 잊혀진 성도들, 잃어버린 성도들, 소외된 성도들을 찾아 축제의 한 마당이 되도록 그런 감사 주일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영육간에 건강을 회복하여 주님을 찬양하며 살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김 이 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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