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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받은 아들의 이야기 (마 21: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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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약속의 동산 산속에서 서성이는 세 남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비가 구질구질하게 내리고 습이 가득한 그 숲 속에서 무언가 열심히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무엇을 끌어내리고 감사의집 앞에서 무얼 투닥 거리고 잔디를 심고 그리고 드디어 완성을 했습니다. 감사의집에 올라가는 계단을 만든 것입니다. 비가 오면 물이 그쪽으로 흘러 흙이 자꾸 쓸려 나가는 것이 맘에 안 들었는데 아주 깔끔하게 마감을 하였습니다.

그것도 세멘트로 쳐 발러서 만든 그런 차거운 계단이 아닙니다. 나무로 자연친화적으로 따뜻한 정감이 가는 조금은 어설프지만 그런 계단을 돈 하나들이지 않고 저들이 하루 종일 수고함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제가 시킨 적이 없습니다. 자기들 스스로 그 모든 일을 완성했습니다. 그 세 사람은 장전도사를 비롯하여 임 집사와 양 집사입니다. 우리장전도사가 부연리 담당으로 가면서 달라진 것이 많습니다. 스스로 알아서 일을 잘해나가고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을 보면 세 가지 사람이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는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알아서 한다고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파악해서 지혜롭게 하는 사람입니다. 알아서 한다고 일만 저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알아서 하기 때문입니다. 알아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주인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아요. 무얼 찾아서 하루 종일 움직입니다.

지난 월요일은 쉬는 날입니다. 모든 사람이 놀러가고 가족들과 함께 즐기는 그런 시간이지요. 교회에 왔는데 우리 장로 피택 받은 집사님 한분이 와 있어요. 기도 하러 오셨나보다 하고 제방에서 일을 보고 나왔는데 우리 집사님 손에 뭐가 들려 있습니다. 빗자루와 쓰레받이 입니다. 그걸 들고 다니면서 교회 안 밖으로 쓰레기를 청소하고 있는 거예요. 누가 시킨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보세요 교회에 드나드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우리교역자들을 비롯해서 모든 제직들이 드나듭니다. 그중에 빗자루를 잡아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스스로 일하는 사람은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그런가 하면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고추가 먹고 싶어 고추 좀 가져와요 하면 고추와 고추장을 가져오는 종업원이 있는가 하면 고추만 가져오는 종업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또 고추장도 가져와야지 하는 소리를 듣지요. 미리 알아서 가져 왔으면 한번만 심부름하면 될 것을 시키는 것만 하니까 두 번씩 심부름을 하는 것입니다. 어디 나가려고 하는 남편이 와이샤츠 좀 가져와요 하면 넥타이도 챙겨야 할 터인데 와이샤츠만 들고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또 가야지요. 시키는 것만 하는 사람대개 게으른 사람들입니다. 일을 즐거움으로 하지 못하는 거예요.

또 하나의 사람이 있습니다. 시켜도 안하는 사람이 있지요 일종의 반항아입니다. 이런 사람은 눈속임이 빠른 사람이지요. 주인이 보면 하는척하다가 주인이 안보면 살짝 빠져 나갑니다. 먹는 데는 약삭빠르고 일 하는 데는 느린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시켜서 못하는 사람은 이해가 됩니다. 능력이 그것뿐이니까? 못하는 것이지만 능력이 있음에도 안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입니다. 성경에 달란트비유가 나오지 않아요. 능력대로 달란트를 나누어 주어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달란트 나누어 주지요.

논에서 일을 하는 것 보면 쟁기질을 하는 사람. 논바닥을 쇠시랑으로 고르는 사람은 대개 어른들이지요. 아이는 할일이 없으니까? 너는 가서 주전자에다가 물좀 떠와라 그럽니다. 할 수 있는 능력이 그것 밖에는 없어요. 또한 물 떠 오는 일은 넉넉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물 뜨러 간 놈이 안 오는 거예요. 물 뜨러 갔다가 아이들이 노는 것보고 거기 어울려서 노느라고 잊어 버린 거지요. 달란트 비유에서 한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이런 자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도 이윤을 남겼어요.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지요.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 받은 능력대로 열심히 일해서 이윤을 남겼어요. 그런데 한달란트 받은 자는 땅속에 묻었어요. 그러니 할일이 없어진 것이지요. 할일이 없으니 노는 것 밖에는 없지요. 남들 다 일하는데 빈둥빈둥 놀면서 이윤을 남길 수 있습니까? 그래서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서 말씀을 가르칠 때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무슨 권세로 가르치느냐하고 묻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칠 권리가 제사장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바라볼 때는 예수님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 도대체 못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가르침이 보편화된 가르침이 아닙니다. 새로운 가르침입니다. 자신들이 가르치는 것보다 더 권위가 있습니다. 자신들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자들에게 충격이 큽니다. 그래서 시비를 붙는 것입니다. 이런 자 들에게 예수님이 가르치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 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착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잘나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줄 착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권세는 어디서 왔습니까? 위로부터 입니다. 롬13:1에는 모든 권세가 위로부터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고 했습니다. 요17장에는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원과 축복과 영생이 그분의 손안에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인정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는 자입니다. 이것을 믿고 인정하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축복을 받습니다.

교통순경에게는 거리질서를 바로잡는 권세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교통순경이 지시하는 대로 차들이 움직입니다. 어제 내덕동 7거리에 신호등불이 나갔습니다. 교통순경이 나와서 수신호를 합니다. 모든 차들이 그 손의 지시대로 움직입니다.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고 돌아가라면 돌아갑니다. 그 손이 대단한 손입니다. 그런데 어느 차가서라는데 그 권위를 무시하고 그냥 간다. 딱지감입니다. 6만원인지 8만 원짜리 벌금입니다. 벌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벌점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그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이 복을 받게 될 줄을 믿습니다.

권위의 논쟁이 있은 후 예수님이 비유를 이야기합니다. 사랑받는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집에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했습니다. 그랬더니 예하고 나갔습니다. 조금 후에 둘째가 들어옵니다. 아버지는 둘째에게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니오. 하고 밖으로 나갑니다. 아버지의 속이 상합니다.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예 한 놈은 없고 아니오. 한 놈만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두 아들을 다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하고 가는 아들이 왜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아들이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아들이 있다면 예수님은 이런 비유를 이곳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아들은 없습니다. 여러분도 나도 아니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예하고 가는 의인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이 우릴 더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받은 아들은 완전한 아들이었기 때문에 사랑받은 것이 아닙니다. 애초부터 완전한 아들은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맺세지는 돌아오는 아들입니다. 뉘우치는 아들입니다. 회개하고 오는 아들입니다.

여기 아버지의 긍휼하심과 따뜻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반항아입니다. 안가겠다 하던 자식들입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하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아니오 하고 나갔기에 기대하지 않았던 아들이었습니다. 기대 하지 않았는데 아버지를 감동 시켰습니다. 뉘우치고 돌아온 것입니다. 버린 자식인줄 알았더니 새사람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어찌 기쁘지 않습니까?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사랑받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겠다. 한 아들은 어떻습니까? 거짓말을 했습니다. 예하기는 했는데 마음속으로는 전혀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위선자가 많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체면 문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마음은 싫어도 체면 때문에 거절을 못하고 삽니다. 어른 앞에서 아니다 소릴 못합니다. 그러니까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그럴듯하지만 사실은 어른을 속인 나쁜 놈이지요. 그러면서도 큰아들이라고 큰소리칩니다. 장자의 권리는 찾이 하려고합니다. 특권층노릇을 하려고 합니다.

교회에는 특권층처럼 이름만 가지고 있는 자들이 더러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필요 없는 자 들입니다. 말로는 예 예 다하는데 하는일은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둘째는 아니오 입니다. 못된 놈 같지만 사실은 솔직합니다. 자기 속을 있는 그대로 들어낸 것입니다. 싫으면 싫은 거지요. 이런 놈이 바로 되면 예 할 수 있는 거지요.

그래서 보세요. 무슨 생각인지 밭에 나가 일했어요. 아니오 하고 나가기는 나갔는데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앞에는 자기중심에서 아니오. 했는데 아버지중심으로 다시 생각하니 밭에 나가 일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뉘우치고 밭으로 나갔습니다. 누구중심으로 생각하고 누구 중심으로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아버지 중심으로 하나님중심으로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포도원은 열매가 있는 곳입니다. 열매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일한 사람들에게 댓가로 주어지는 것이 열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산에 파송 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에게 열매가 있기를 바랍니다. 전도의 열매 사랑의 열매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포도원에는 둘째아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청북교회에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당신의 이야기가 있기를 바랍니다. (김 영 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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