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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러나 의인은 (합 1:1 - 합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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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가 소위 출가를 하게 된 동기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원래 그는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난 까닭에 정말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결혼도 하고 아이까지 낳게 되고 이제 부친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일만 남아 있던 때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궁전 밖에 나갔다가 백성들이 어렵게 사는 모습들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평생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던 인생의 고통들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던 그는 자연히 강한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때로부터 그는 “왜 사람은 가난이나 병이나 슬픔 따위로 고통을 겪는 인생을 살아야만 할까?”라는 의문에 휩싸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자기의 궁전 생활과 가족까지 버리고 소위 구도의 길에 나섰던 것이었습니다.
  오랜 수도와 고행 끝에 그가 얻었다는 답은 “사람의 욕심이 바로 고통의 근원이니 그 욕심만 버리면 인생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었다지 않습니까?

  이처럼 불교란 것은, 석가모니가 가졌던 그 한 가지 의문, 인생의 고통에 대한 의문이 그 시발점이 된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석가모니는 진짜 큰 문제에는 전혀 접근하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존재 전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가 관심을 가졌던 인생 고통의 문제도 사실상 많은 인생 문제들 중에서 지극히 작은 한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왜 가난하고 왜 병이 들고 왜 슬픔과 고뇌 가운데 살게 되었을까?’라는 질문 자체가 매우 협소한 것일 뿐 아니라, 그가 발견했다는 대답도 사실 그리 시원스럽지 못한 것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인생에 관하여 이보다도 훨씬 더 깊은 질문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질문은 ‘사람이 왜 고생스럽게 살고 있나?’하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 즉 선과 악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육신의 고생에 관한 질문보다는, 각 사람의 영혼과 삶 전체를 통하여 늘 대립 갈등하고 있는 선악의 문제야말로 그에게는 훨씬 더 중요하고도 또한 어려운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박국은 그 딜레마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 누구처럼 무슨 고행이나 수도를 해야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애당초 그와 같은 인생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은 그 어떤 구도의 노력을 동원하더라도 인생 스스로의 지혜를 통하여서는 해결되어질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또 그런 헛수고를 할 필요도 전혀 없었던 것은, 하박국은 바로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통하여 그 명백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지자 하박국이 가졌던 인생에 관한 진짜 어려운 질문들은 과연 무엇이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해 주셨습니까?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이 땅에서 의인과 악인의 삶을 두고 누구나 한번쯤은 가지게 되는 난제에 대하여 성경 말씀이 가르쳐 주는 명쾌한 대답을 함께 듣고자 합니다.

  1. 악인의 형통에 대한 딜레마는 반드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이 깨끗하게 해결해 줍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가졌던 첫 질문은 ‘왜 악인이 이렇게 활개를 치면서 잘 살고 있을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1절부터 4절에 말씀에 “선지자 하박국의 묵시로 받은 경고라 /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라고 기록된 것이 그의 첫 번째 의문이었습니다.

  하박국은 지금 자기 조국 유다에서 일어나고 있던 온갖 부조리와 악행에 대하여 치를 떨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다 왕이었던 여호야김은 남조의 군주들 중에서 악명 높은 자들 중의 하나였고, 그로 인하여 나라꼴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공평이란 간 곳 없이 사라지고 “강포”가 공직자들의 행정 처리 수단이 되고 있었습니다.
  정직은 오히려 무능력한 것으로 치부되고 그 대신에 “겁탈”이 성공 수단으로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의 “율법”은 아무 듣는 사람 없어지고 오직 “변론과 분쟁”을 잘해서 소송에서 이기는 길만이 제일 똑똑한 인생인 것으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악인들로 인하여 고생당하고 있는 약한 백성들을 위하여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외치면서” 기도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치 “듣지 아니하시며 구원치 아니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본문에서 하박국 선지자의 “어느 때까지리이까”라는 절규의 기도는, 그처럼 악인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시절이 이미 오래 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될수록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게 되는”, 즉 악인이 많은 수자를 가지고 의인을 압도하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악인이 제멋대로 악행을 저지르고, 그런 악인이 오히려 더 잘 살고, 그래도 악인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기는커녕 점점 더 그 세력만 더해가는 것이 하박국 선지자에게는 풀 길이 없는 딜레마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난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본문 5절부터 10절의 말씀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심판과 위령이 자기로 말미암으며 / 그 말은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 기병은 원방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기병이라 마치 식물을 움키려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 열왕을 멸시하며 방백을 치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취할 것이라 / 그들은 그 힘으로 자기 신을 삼는 자라 이에 바람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득죄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악인들이 형통하고 있다는 딜레마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갈대아 사람” 즉 바벨론 사람들을 일으켜서 유다를 공격하여 정복하게 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곧 유다의 악인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해 놓으시고 곧 이루고야마실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바벨론 군대는 당시 고대 근동지방에서 그야말로 “두렵고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표범”의 위력과 “저녁 이리”의 사나움과 “독수리”의 탈취 근성을 가진 민족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단 바벨론 군대가 공격하기로 작정한 대상은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모래 같이 많은 민족”도, 내로라하는 “열왕”들도, 꽤 잘 쌓아졌다고 하던 “견고한 성”들도 일단 바벨론 민족에게 걸리면 피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바벨론 군대의 모습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그 무서움과 그 불가피성을 그대로 대변해 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은 그 임박한 심판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는 열국을 보고 놀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이 마지막 일보직전까지도 방심하고 있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막상 당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깜짝 놀라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아무리 경고를 해 주어도 즉 5절 하반절에 있는 대로 “혹이 너희에게 고할지라도 믿지 아니하는” 것이 그 안이한 유대 백성들의 반응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만연하고 번창하고 있는 온갖 악한 일과 악한 인생에 대한 해답은 오로지 하나님의 심판에 있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깨달아야 합니다.
  만일 마지막 날의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이 세상의 온갖 악행과 악인에 대한 모순은 해결될 길이 전혀 없습니다.
  불신자가 절대다수의 힘으로 온갖 여론과 이론을 주장하고, 부정하게 사는 사람이 훨씬 더 돈 잘 벌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앉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악인들이 오히려 죽는 날까지 아무 벌도 받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세상의 다른 어떤 철학으로도 도무지 대답할 길이 없는 너무나도 심한 딜fp마인 것입니다.

  오로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만이 이 악의 부조리와 불합리에 대한 명쾌한 해결책이요 유일한 정답이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의 최후의 대심판이야말로, 이 인류 역사상 이 지구상에 벌어졌던 모든 종류의 악한 일들을 하나도 빠뜨림 없이 엄히 처벌할 실로 공정한 인과응보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 심판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데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맹렬하고 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주 태평스러운 마음을 가지고들 있습니다.
  배고픔과 추위가 무서운 줄은 알고 부자와 권력자 앞에서는 설설 기면서도, 정작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실 심판이 그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것인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이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이토록 분명하고도 강력한 톤으로 경고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믿지 아니하고 ‘내일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자’하고 제멋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야 무서운 줄 모르고 믿지도 않는다 하더라도 결코 변치 않을 엄연한 사실은 바로 그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급속히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신자들이, 악인이 막상 당하게 될 때 정말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깜짝 놀라게 될” 그 한날은 분명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께서 한번 하시기로 일단 작정하시면 유다 백성에게도 결코 피할 길이 없는 것이었고 또 그 이후 모든 만방의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악인이 제 멋대로 살고 그래도 만사형통한 것처럼만 보인다 하더라도, 진짜로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비록 더딘 것 같지만 이미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줄로 깨닫고, 이 의인들을 에워싸고 있는 악인들의 공세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참된 신앙과 바른 생활을 지켜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의인의 고난에 대한 딜레마는 끝까지 믿는 자를 살려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완벽하게 해결해 줍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가졌던 두 번째 질문은 ‘왜 바르게 살고자 하는 의인이 오히려 고난을 당하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1장 12절로부터 2장 1절에 그 의문을 기록하기를 “선지가 가로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를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를 세우셨나이다 /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으로 바다의 어족 같게 하시며 주권자 없는 곤충 같게 하시나이까 / 그가 낚시로 모두 취하며 그물로 잡으며 초망으로 모으고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 그물에 제사하며 초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식물이 풍성케 됨이니이다 / 그가 그물을 떨고는 연하여 늘 열국을 살육함이 옳으니이까 /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른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른지 보리라 그리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백성 가운데 설치고 있는 이 악인들을 왜 그냥 두고 계십니까?’라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하여 ‘내가 바벨론 사람들을 들어 그들을 징벌하겠다.’는 하나님의 대답을 듣게 된 하박국 선지자는 또 하나의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와 같은 바벨론의 침공이 있으면 유다 백성들 가운데서 악인들뿐 아니라 의인들도 함께 고난을 당할 것이게 될 것인데, 하박국 선지자에게는 그것도 불공평해 보이는 처사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바벨론의 침공이 “악과 패역과 궤휼을 참아 보고 방관하실 수 없는 정결하신”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또한 “경계하시기 위하여” 행하실 일이라는 사실은 하박국 선지자도 물론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모든 유다 백성이 “바다의 어족”과 “주권자 없는 곤충”처럼 떼죽음을 당하게 될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바벨론 군이 침공해 온다면 그들이 유다 백성들 중 의인과 악인을 구별해서 처리할 리는 만무했습니다.
  그야말로 그물에 걸리는 고기처럼, 발에 밟혀 죽는 곤충떼처럼, 의인들까지 악인에 파묻혀서 닥치는 대로 떼죽음 당할 것이 뻔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비록 유다 민족이 악하다 해도,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바벨론 민족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악한 민족임이 자명했으니, 그것도 역시 딜레마가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런 의문을 품으면서 ‘그런데도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 일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두고 보고만 있으실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했던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로서는 이 두 번째 질문, ‘의인들이 왜 악인처럼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더욱 난해한, 아니 거의 불가해한 질문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질문을 하나님께 드린 후 자신은 “파수하는 곳”에 서서 기다리는 사람처럼, 하나님께서 과연 “무엇이라 말씀하실른지” 과연 자신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른지 보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그 난제를 어떻게 해결해 주실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2장 2절로 4절에 기록하기를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지금 하박국 선지자에게 내려주시는 묵시 즉 계시가 비단 그에게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꼭 알려져야 할 실로 중요한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판에 명백하게 새겨” 기록하여 영원히 남겨져야 할 것이며, 또한 전달자가 그 판을 들고 “달려가면서” 보여 주어도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크고 똑똑하게 기록되어져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시는 “정한 때”가 이르면 “정녕 응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계시의 실현은 비록 “더디게 보여도” “속히 이를” 것이며 “지체되는” 것 같아도 “결코 거짓말”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약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 약속의 계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이어져 나오는 4절에 기록된, 의인의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참된 의인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아무리 주위 상황이 부조리하게 보이고 자기에게 벌어지는 일이 불공평하게 여겨진다 하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을 것이고, 바로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비록 바벨론 사람들이 유다 백성을 징벌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그들이 사실에 있어서는 “교만하며 정직하지 못한” 백성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잘 아시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 악한 백성들로부터 고난을 당한다는 것은 여기서 하박국 선지자가 탄원하듯이 의인으로서는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로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의인의 구원은 세상에 그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이고, 그 모든 난해하고 수긍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의인이 그런 구원을 얻게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믿음뿐이라는 사실이 바로 하나님의 대답이요 또한 약속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얼마나 놀라운 대답, 그러나 또한 명쾌하기 짝이 없는 대답을 하박국 선지자에게 들려주셨습니까?
  하박국 선지자로서는 실로 스스로는 풀 길이 없는 어려운 질문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는 의인이 악인이 벌 받을 때 같이 휩쓸려 들어가게 되고 의인이 악인이 받는 것과 꼭 같은 고난을 함께 당한다면 누가 과연 그런 불합리해 보이는 일을 견디고 신앙을 지킬 수 있겠느냐고 고민했습니다.
  악인이 잘 되는 것을 보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닌데, 의인이 오히려 악인들처럼 재난을 당하고 화를 겪게 된다면 세상에 그 누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려 하겠느냐고 의문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 하박국 선지자를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런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아라. 의인은 믿음만 가지고도 넉넉히 살 수 있다!”라고 큰 소리로 선언하셨습니다.
  아무리 자기 나라 임금과 관원들이 못살게 굴어도, 아니 자기 자신까지 이방인의 침략 앞에서 악인들과 꼭 같은 고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진짜 의인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그 ‘믿음 하나만 가지고도’ 그 모든 것들을 넉넉히 견디어 낼 수 있고 또 ‘바로 그 믿음으로 인하여’ 마지막 심판날에도 영생의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참 얼마나 시원스러운 대답이며 또한 든든한 약속입니까?

  우리 성도의 생에 있어서도 이 땅에서는 다 해결 받을 수 없는, 아니 이해조차 잘 되지 않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인생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죄로 물들어 있고 그 죄의 영향력과 응보가 연이어지는 까닭에 그것은 피할 길 없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믿는 자가 얻게 될 마지막 영생의 구원은 그 모든 현세에서의 미해결 문제에 대하여 가장 분명하고도 시원한 정답이 되고야 말 것입니다.

  사실 믿는 신자들 중에서도 그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 일이 생기는 것은 목사에게도 참 어려운 일입니다.
  남보다 교회를 더 사랑하고 더 열심히 섬기는 성도가 육신적으로는 잘 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도 신실한 신자인데 그런 성도가 오히려 세상 불신자에게 많은 빚을 지고 고통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고3 수험생 중에서도 주일 예배까지 빼먹던 학생은 합격하는데 오히려 충성스러운 직분자의 자녀가 대학 입시에서 떨어지는 일들도 가끔 생깁니다.
  본인에게도 시험이고 목사에게도 대답하기 곤란한 문제처럼 여겨지는 일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딜레마처럼 보이는 일들에 대하여 우리 모두에게 깨끗한 정답을 선포해 주고 계십니다.
  그 모든 난제에도 불구하고 오직 ‘믿음이 있는’ 성도는 그 믿음 하나만 가지고도 ‘넉넉히 살 것’이라고 대답해 주십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교회 생활이고 직분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말 것처럼 보이는 일을 당해도,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신기하게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자신 있게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그 인애와 자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며 아무리 당장은 나빠 보이는 일을 당해도 결국 합력하여 당신의 자녀를 위하여 선을 이루고야마실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는 신자는, 그야말로 ‘세상이 감당치 못할’ 백전백승의 인생을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 신자의 인생에 부분적으로 불공평하고 당장은 이해할 수 없어 보이는 일이 혹 생긴다 하더라도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당신을 변함없이 의지하는 자에게 끝내 좋은 것으로 베풀어 주실 뿐 아니라 그 생명을 모든 환난과 고통, 더욱이 사망의 권세로부터도 영원히 구원해 주실 하나님만을 끝까지 믿고 따라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이 세상은 우리가 평생토록 도를 닦고 배운다 하더라도 결코 다 알지 못할 문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연 만물은 제쳐놓고 우리 인생의 문제만 따져 보아도 난제 투성이입니다.
  아니 남과의 관계는 고사하고 나 자신 속에 있는 문제만 해도 스스로 해결하기에는 벅찬 것들로만 가득 차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본질인 것입니다.

  만약 공의의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이 세상 인생들의 선과 악에 대한 딜레마는 영원히 풀릴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 수도를 해도, 아무리 공정한 정치가가 행정을 집행해도, 아무리 덕망 높은 사람이 도덕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도무지 풀 수 없는, 엉켜 있는 실타래와도 같은 것입니다.
  눈앞의 현실이 불합리한 것들 투성이인데 그것을 제 아무리 미사여구로 설명하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악한 사람들이 돈 잘 벌고 높은 자리에 앉게 되고 의롭게 사는 자들에게 오히려 병과 가난이 닥치는데, 그 모순을 도대체 어떤 ‘득도(得道)’로 이해시키며 어떤 ‘법’으로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공의만이 그 해결책이 될 수 있으며, 그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진짜 하나님이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살아 계시고 또한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전제가 될 때 이 모든 딜레마들은 실로 간명하면서도 깨끗하게 해결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 어떤 모양으로 제멋대로 살더라도 결국 악인은 심판을 받게 되고, 이 금세에서는 그 어떤 불공정해 보이는 일을 당하더라도 결국 의인은 구원받게 되고야 말 것이라고, 그 하나님께서 ‘판에 새긴 명백하고도 큰 글자’로 우리에게 뚜렷이 계시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가볍게 보고 간과하는 인생에게는 깜짝 놀라게 되는, 정말 무섭고도 두려운 한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반면에 그 어떤 상황과 현실 속에서도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 선하고 의로우심만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는 이 땅에서의 모든 시험과 환난에서도 넉넉히 살아남을 뿐 아니라 결국 저 천국의 영생을 쟁취하고야 말 것입니다.
  믿음 없이 그저 이 세상에서 한 순간 잘되는 인생을 결코 부러워하지 말고,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격려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금세에서도 매사에 승리하며 내세에서 영원한 구원을 함께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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