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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정의 방향 (빌 3: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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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고 한다. 그는 밤 늦도록까지 일한다. 그는 자신이 목표한 일을 하룻밤에 끝내지 못하면 다음날 밤에 또다시 도전한다. 그는 함께 일하는 동료의 모든 행동을 자기 자신의 일처럼 느낀다. 그는 적은 소득에도 목숨을 건다. 그는 아주 값진 물건도 집착하지 않고 몇 푼의 돈과 바꿀 줄 안다. 그는 시련과 위기를 견뎌낸다. 그런 것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자기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가를 잘 안다.
밤 늦게까지 최선을 다하여 열정적으로 일한다. 정말로 목숨을 걸고서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도둑의 열정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도둑이 열정적으로 일하면 일할 수록 이 사회는 점점 더 불안해 진다.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열정이 중요하고 열정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열정을 어디에 쏟느냐가 중요하다. 열정의 방향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열정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와 같다. 비전은 방향을 설정해 주는 핸들과 같다. 우리의 열정을 어디에 쏟을 것인가? 얼마나 중요한 질문인지 모른다.

게임 중독에 걸리면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모른다. 컴퓨터 앞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오직 컴퓨터 게임에만 몰두한다. 날이 세는지 밤이 되는지 상관하지 않는다. 언제까지? 그곳 컴퓨터 앞에서 죽는 그 날까지 열심히 한다. 열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열정을 어디에 쏟느냐가 얼마나 중요한가?

히틀러는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열정적인 연설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이끌었다. 그의 연설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광적인 헌신을 다짐하였다. 그런데 그의 열정은 사람을 죽이는데 있었다. 열정의 방향이 잘못되었다. “내가 정권을 잡으면 최우선 과제는 유태인들의 씨를 말리는 일이 될 것이다.” 열정이 있기는 하지만 그 열정이 매우 잘못되었다.
본문의 말씀을 보라. 사도바울은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바울의 열정은 예수님에게 있었다. 열정의 방향은 바로 예수님이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우리가 쏟아야할 열정의 방향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열정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가 Passion이다. 이 패션이라는 단어에는 열정이라는 뜻도 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수난을 의미하기도 한다.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의 제목에서처럼 패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수난을 의미한다.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향한 사랑의 열정을 보여 주셨다.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 달려 죽어가시면서 인류를 향한 구원의 열정을 보여 주셨다.

우리도 열정을 어디에 쏟아야 하는가? 그 열정은 예수를 향하여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 되어야 할 줄로 믿는다.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 있어야 우리가 상급을 받는다. 학생들이 시험을 보면 성적표를 받는다. 공부를 잘 한 학생들에게 상장을 준다. 우리의 인생을 살고 마지막에 인생 성적표를 받을 텐데 우리는 몇 점을 받을 수 있겠는가?

인생 성적표의 결과는 어디에 열정을 쏟고서 살았는가에 달려있다. 게임 중독에 걸려서 게임 열심히 하다가 숨을 거둔 청년이 하나님 앞에서 인생성적표를 받을 때에 상을 받을 수 있겠는가? 열심히 TV를 보다가 하나님 앞에서 인생성적표를 받을 때에 상을 받을 수 있겠는가? 살빼려고 열심히 운동만 하다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어떤 인생성적표를 받을 수 있겠는가? 좋은 직장에서 돈 열심히 벌고 좋은 집에 살려고 아둥 바둥하면서 열심히 살던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어떤 인생의 성적표를 받을 수 있겠는가? 자식의 교육에만 몰두하고 자식을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만 열심히 살았던 부모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어떤 인생 성적표를 받을 수 있겠는가?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애를 쓴다.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서 모든 열정을 쏟아 붇는다. 높은 자리에서 편하게 살다가, 높은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간다면 어떤 인생의 성적표를 받을 수 있겠는가?

얼마 전에 공원을 거닐다가 할머니들이 열명 정도 앉아서 말씀을 나누시는 모습을 보았다. 한분 한분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다 보았다. 한분 한분의 얼굴을 보면서 서로 비교해 보았다. 그 중에 예쁜 할머니도 없고, 못생기게 보이는 할머니도 없었다. 별 구분이 없어 보인다. 그 할머니들의 세월을 30년 뒤로 간다면 그 때에는 그 열명의 여성들 사이에 예쁜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서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들을 뵈니 예쁜 얼굴과 미운 얼굴의 구분이 없어진다. 우리가 젊었을 때에 아름다움. 외모에 대해서 많은 신경을 쓴다. 더욱 아름다워지기 위해서 온갖 열정을 쏟는다. 그러나 그 열정도 한때라는 사실이다. 영원한 열정의 방향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사랑하는 성도여! 열정의 방향을 영원한 것에 두어야 한다. 열정의 방향을 길게 봐야 한다. 약 10년 전 하버드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인 학생들의 SAT고교 내신이 모두 뛰어나 많은 학생들이 입학했다. 그런데 그 해에 9명이 낙제를 한 것이다. 아시아계 학생10명이 낙제했는데 그 중9명이 한인이니 대학 당국에 비상이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버드대에서는 낙제를 하면 1년 동안 정학 처분을 한다. 정학 기간 중에는 대학 근처에서 거주할 수도 없고 집으로 갈 수도 없다. 제3지역에서 지속적인 상담을 받으며 근신해야 대학으로 다시 돌아와 계속 수업을 받을 수 있다. 그리하여 낙제생을 대상으로 상담 자료를 분석해보니, 두뇌도 명석하고 성적도 우수한데 초일류대학이 인생의 목적일뿐 그 이상의 장기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똑똑한 학생들. 그들은 열정의 사람들이었다. 정말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그들이 갖은 열정의 방향은 단지 하버드 대학 입학에 두고 있었다. 결국에는 시간이 지난 후에 이렇게 낙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열정을 쏟고 있는가? 무엇을 위하여 열심히 살고 있는가? 단지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열정인가? 단지 오늘 하루를 즐겁게 살기 위해서 열정을 쏟고 있는가?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서 열정을 쏟고 있는가? 열정의 방향이 올바로 되어 있기를 바란다.

Passion이라는 말 속에 열정이라는 뜻도 담겨있지만,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의미도 담겨져 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열정이 곧 예수님이라는 분명한 가르침이다. 시간이 나면 자전거를 타면서 운동한다. 안양천변을 따라서 한강변으로 해서 행주대교까지 자전거를 타면서 운동을 한다. 기분이 상쾌해 진다. 자전거를 탈 때마다 느끼는 점이 있다. 패달을 저어야 앞으로 간다. 패달을 저어서 앞으로 갈 때에 자전거는 안정적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속도가 늦어지면 중심을 잡기 어렵다. 속도가 늦어지면 불안해 진다. 운전하기가 쉽지 않다. 넘어지기도 한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을 향한 방향이 정해져 있어도 움직이는 열정이 식으면 불안하다. 넘어지기 쉬워진다.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 우리 속에서 타오르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준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 있는 사람은 지난 날의 과거를 자랑하지 않는다. 지난 날에 자신이 쌓아 놓은 공로를 자랑하지 않는다. 지난 날의 열정에 묶여있지 말고, 오늘 열심히 주를 위해 살자.

좀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 그것은 예수의 피가 헛되지 않도록 한 사람이라도 전도하는 일이다. 전도의 열정이 곧 예수를 향한 열정이요, 이러한 열정이 영원히 남을 열정이요, 이러한 열정이 곧 인생의 성적표가 좋아질 수 있는 방법이다.
열정에 해당하는 영어 표현이 Passion이다. 이 패션은 열정이라는 말도 있지만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흘리신 피, 예수의 수난을 담고 있는 말이다. 우리의 열정은 예수의 피가 헛되이 되지 않기 위하여 쓰여져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구원받는 일이다.

2차 대전 후 독일 기독교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던 마르틴 니뮐라라는 목사가 "2차 대전 책임 백서"라는 것을 발표해 굉장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일이 있다. 2차 세계 대전의 발발에 대해 그는 히틀러를 비방하기 보다는 독일 교회와 독일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로 책임을 물었다. 그가 히틀러를 노골적으로 비난하지 않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간증을 했다고 한다.

"저는 그동안 일곱 차례에 걸쳐 동일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주님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 지나가는데 제 뒤에 있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께서 "너는 왜 나를 믿지 않았느냐?"하고 물으시자 그 사람은 "아무도 저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한 사람이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소리가 익숙해서 돌아보니 그는 다름 아닌 아돌프 히틀러 였습니다. 이 사건이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때까지 그가 죽기를 바란적은 수없이 많았지만 그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독일 그리스도인들은 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진지하게 접근하지 않은 것에 모두 책임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자살률이 높아진다. 많은 사람들이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깊은 밤에 신음하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할지 방황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그것은 바로 나의 책임이다. 우리가 공감해야할 책임이다.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전하자. 그들에게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자. 열정적으로 전도해 보자.

다시 한번 묻고 싶다. 당신은 어디에 열정을 쏟고 있습니까? 지금 쏟고 있는 그 열정이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까? 당신의 인생 성적표를 위해서 얼마나 도움이 됩니까? 우리의 열정을 예수님에게 두자. 예수의 피가 헛되게 돌아가지 않도록 한 전도의 열정을 쏟자. (곽 주 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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