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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자 (요 2: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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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요 2 : 13 - 22
제 목 : 교회를 교회답게 하자 

우리는 흔히 철이 덜 든 사람을 만날 때면,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 노릇을 해야 사람이지.”
무슨 말입니까?  사람으로 태어났어도, 사람이 해야 할 본분을 다 하지 못하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모습만 있고, 그 속에 갖추어져 있어야 할 知, 情, 意가 없다고 한다면,  또한 마땅히 감당해야 할, 사회적 본분을 다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래서 자기 중심적이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이, 그저 자기 고집대로만 인생을 살아간다면, 그는 사실 짐승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사람 취급을 제대로 못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교회라고 해서 다 교회이겠습니까?
건물이 지어지고, 그 위에 십자가를 세워 놓았다고 해서, 다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교회가 감당해야 될 마땅한 사명들을 다 하게 될 때에, 어떤 사명입니까? 
주님이 명하신 전도의 사명과, 사랑의 사명을 다하게 될 때에, 비로서 그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교회의 사명에 대해 말씀하실 때, 가장 대표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있는데, 바로 마 5 : 13 - 16까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가운데 강조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빛과 소금”의 사명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했습니다.
소금과 같이 희생하고, 빛과 같은 착한 행실로, 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낼 때에,  비로서 교회의 본연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라고,  또한 그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저와 여러분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받을 때에, 우리 마음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아 그렇구나. 교회는 정말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해 나가야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더 이상의 의미로는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면 좋겠지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 그렇습니까?  교회의 사명은 해도 그만, 한 해도 그만이 아닙니다.
주님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라고 했을 때에는, 무조건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군인이 상관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한다면,  그는 군인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는 교회라고 한다면, 그 교회는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세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된다고 주님이 말씀하고 있습니까?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세상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무지하고 패역한 세상의 불신자들에게 밟히게 되는, 무시당하고, 조롱받게 되는 안타까운 처지에, 우리 성도들이  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군인이 명령에 불복종하면 계급을 박탈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제대로 감당치 못하게 될 때엔, 성도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은혜와 축복을 상실하고,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이 끌려 다니는, 초라한 신세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교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나라만큼 교회가 많은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각 교단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가, 모두 다 우리나라에 있지 않습니까?
서울에서는 한 집 건너 교회라는 말이 있고, 여기 울산만 해도 많은 교회들이  있는 줄로 압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이렇게 교회가 많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하는 것입니다.  소금으로 인해 살 맛이 납니까?  빛으로 인하여 환한 세상이 되었습니까? 
아직까지도 맛이 안 나는, 맛이 없는, 마치 미원을 물에 넣은 것처럼 닝닝한, 그래서 토해 버리고 싶은 세상이 되어있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아직까지도 죄악이 만연하고,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치는 어두운 세상이 되어 있는 것은, 또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적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희생하는 성도들이 적기 때문에, 남을 위해 오히려 자신이 손해를 보려는 성도들이 적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세속주의로, 이기주의로, 자신은 손해보지 않고, 자기의 유익과 안녕만 추구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오늘날 이 세상이 이처럼 어둡고 살맛이 안 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의 모습을, 전혀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이런 교회의 모습을, 우리 주님이 바라보실 때에, 그 마음이 어떠하시겠습니까?
답답할 것입니다.  아마 미치도록 답답해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주님이 어떻게 세우셨습니까?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신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시고 세우신 교회가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머무는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세우리라.”  아니,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자기가 무슨 수로 3일만에 세운다고 그래?  사람들이 반문했지만, 
오늘 본문 21절 말씀에,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46년 동안 공을 들여 아름답게 지어진 성전이라 할지라도, 그 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는 성전이라고 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건물 이상의, 또 다른 의미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교회,  어떤 교회입니까?  하나님이 머무시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피가, 예수 그리스도의 뜨거운 십자가의 피가 흐르는 교회, 주님이 교회를, 십자가의 피로 다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십자가의 뜨거운 피를, 그 십자가의 생명의 피를 가슴에 새기고, 주님의 거룩하신 뜻을 받들어 섬기는 교회, 이런 교회가 진정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땅 위에 있는 교회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교회들 중에, 오늘 우리 벧엘 교회가, 해야 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뜻을 받들어, 주님의 뜻을 이행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 무엇입니까?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대외적으로 세상에 이러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의 모습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바라볼 때에, 진짜 교회답다고 평가하기까지는, 먼저 교회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이,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어 가는, 신앙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적 모습, 세 가지를 오늘 말씀을 통해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예수님의 모습이 아닌, 분노하시고,  심지어는 폭력까지도 행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성품에 대해서는, 온유하시고, 인자하시고,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성품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그렇지를 못하다는 것입니다.  화를 내시고, 폭력을 행사하시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좀 뜻밖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전에 없던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도 장소가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서 말입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성전을 성전답게 사용하지 못하고,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  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 말씀에 보면,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어야 할 사람들입니까?
시장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시장이 아닌 성전에 들어와서 장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장사를 했기 때문에, 주님이 화를 내신 것이 아닙니다.  성전 안에서, 장사를  했기 때문에, 주님이 화를 내셨다는 것입니다. 분노하셨습니다.
채찍을 들고, 그들을 때리며 쫓아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쫓겨나는 이 장사꾼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전혀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왜입니까?  지금 자기들이 팔고 있는 소나 양이나 비둘기 같은 짐승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마땅히 드려져야 할 제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제물 될 짐승들이, 성전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느냐는 식의 반응이었다는 것입니다.

실제 모세의 율법에 보면,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 같은 짐승은 제물로 사용  하도록 규정이 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볼 때에는, 전혀 그들이 잘못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사실을, 그들은 간과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짐승들이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져야 할 제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받으시는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산 채로 제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값이 나가는 소와 양과 비둘기가  있다 할지라도, 죽지 않고 산 채로 성전 안까지 들어왔다 함은, 그것은 상품이지 결코 제물은 아닌 것입니다.
제물과 상품의 차이는, 그것이 죽어 있느냐?  살아 있느냐? 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필요하겠습니까?
먼저 우리가, 성전 안의 온전한 제물이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성전 뜰 안에는 수많은 우양이 운집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팔기  위한 상품이었지 제물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몰려들고 있습니까? 
그 가운데 오늘 저와 여러분도, 포함이 되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지금 하나님 앞에 모여서  예배드리는 우리의 심령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입니까?  아니면 사람들 눈에만 좋게 보이는 상품입니까? 

우리의 육신은 교회에 나와 있지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 앞에 겸손히 귀 기울이지 못하고, 다른 잡념에 빠져 있거나, 하나님 앞에  예배하려는 순수한 동기가 아닌, 자신의 어떤 이익이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교회에 나온 것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의 심령은 상품이지, 결코 제물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시 51 : 17 -19절 말씀에,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 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상한 심령”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죽이는 것, 그것이 “상한 심령”인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의로운 제사”요, “온전한 번제”  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에 어떤 모습이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감정과, 육신의 정욕과 혈기까지도 장사지내고, 하나님 앞에 죽어진 가운데, 겸손한 모습으로 회개하는 “상한 심령”으로 예배드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죽어지지 않은 채로 성전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수많은 우양과 같이, 교회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우양이 소리내며 떠드는 것과 같이,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를 주장하고, 서로간에 뿔로 치고 받고 하는, 그러한 모습들이 있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다는 평가를,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자신이 주장되어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세례 요한이 한 말이 있지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것이 우리 신앙의 기본적인  모토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느 교회는, 서로가 주장하며 싸우다가 그만 두 교회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그 교회 이름이 특이합니다.  하나는 오른 쪽 교회고, 하나는 왼쪽 교회입니다.
왜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느냐?  교회 피아노 위치 때문에 싸우게 되었다는  겁니다.  교회에 피아노를 기증하신 장로님은 성가대 오른 쪽에 피아노가 있기를 원했고, 성가대를 지휘하는 집사님은 왼 쪽에 있기를 원했습니다. 
서로가 편이 되어 오른 쪽이 낫다. 왼 쪽이 낫다 주장하다가, 그만 감정이 격해져 싸움이 되고, 그래서 결국 교회가 두 교회로 쪼개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 가관인 것은, 교회에 피아노를 기증한 장로님이 “내 눈에 흙이 들어가지 전에는 절대 피아노를 못 옮긴다.”는 것입니다.  피아노가 오른 쪽이 있든, 왼 쪽에 있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서로 양보하고 많은 사람들이 원하고 보기 좋은 곳에 놓으면 그만 아닙니까?  그리고 기증을 했으면, 헌물을 했으면, 이미 자기 것이 아니고, 이제는 교회의 소유요, 하나님의 성물인데, 왜 그것을 아직도 자신의 것인 양 주장을 합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입니까? 
이 모두가 하나님 보시기에 패역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소한 문제로  서로 주장하며 싸우는 모습을 바라본 그 지역 주민들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전도한들 그들이 교회에 나오겠습니까? 

제물은 제물되게 해야 합니다. 제물이 제물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져야 합니다.
한 알의 밀알과 같이 썩어야 하고,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육의 모습은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속 사람을  살리시고,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으로 세상에 내어놓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는, 귀한 신앙의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 벧엘 교회 성도님들은, 다 이런 제물 되어진 충성된 하나님의 종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교회가 교회답게 되기 위해서는, 또 어떠한 신앙적 노력이 필요하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이, 성전 안의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 말씀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짐승을 파는 사람들과 또 누가 있었다고 했습니까?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 성전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전에 드려지는 제물이 정해져 있듯이, 성전에 바쳐지는 돈도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각 지방에서 올라온 유대인들이나, 개종한 이방인들이 자신이 가지고 왔던 돈을, 성전에 드리기에 합당한 돈으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이도 유대인의 율법에 정해져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에게도 화를 발하셨다는 것입니다.
환전상을 둘러엎으시고, 그들을 내어 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의 관심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돈에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돈이 어떤 돈이건,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것이 헬라 돈이든, 로마 돈이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것이 금전이든, 은전이든, 동전이든 사실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돈을 받으시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그 돈을 드리는 준비된  마음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그러나 제사를 드리러 온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성전에 있던 제사장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이러한 우매한 사람들을 잘 지도해서, 형식이 아닌 중심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도록 도와야 하는데, 그들은 환전을 통해 생기는 이득에 더 관심이 쏠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장의 직분을 잘 감당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을 잘 감당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벧전 2 : 9절에 무슨 말씀이 있습니까?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여러 가지 직분이 있지 않습니까?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성도 이런 여러 가지 직분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궁극적으로 다 한 가지의 직책으로 여기십니다.  무엇입니까?  “왕 같은 제사장들” 이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데 힘써야 할, 제사장들이라는 것입니다.
직분이 중요한 것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의 직분이 높아지는 것을 필요  이상으로 소망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는 것을 신앙의 목표로 삼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벧엘 교회는 그렇지 않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만, 다른 교회에서는 정말  심각할 지경입니다.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면 교회 일을 하지 않습니다. 
“다 이루었다.” 합니다.  내 평생에 소원을 이제야 이루었다 합니다. 
그리고는 에헴합니다. 뒷짐지고 있습니다.  교회 일은 집사들이나 하지, 자신들은 이제 관리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이런 엉터리가 어디 있습니까?  관리자는 오직 한 분 뿐이십니다.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그저 하나님 앞에 충성해야 할 일꾼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의 목적을, 직분의 높음에 두지 마시길 바랍니다. 
만약 그렇게 되어진다면, 우리는 돈을 바꾸어 성전에 드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란 착각에 빠진, 어리석은 유대인들과 다름없습니다.
직분이 바뀐다고, 내 직분이 높아졌다고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 직분 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주를 위해 봉사하기 위해 허락해 주신 모든 직분은, 그 자체로 소중한 것입니다.  왜 소중합니까?  그 직분은 세상의 명예와는 다른 성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성직이 될 순 없습니다.  제사장과 같은 성직을,  성직 되게 하는데는, 성직의 영광스러움을 스스로 깨달아야 하고, 내게 주신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주님을 따르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의 마음으로, 성결과 사랑의 행실로, 전도와 봉사의 신앙적 열정으로 삶을 살아가는 거룩한 제사장들, 이러한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가 되어질 때에, 비로서 교회가 교회다워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윗 물이 맑아야 아랫 물이 맑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 먼저 세워진  직분자들이 솔선수범하여 신앙의 모범을 보이며, 헌신의 모범을 보일 때에,  그 뒤에 세워진 다른 직분자들도, 그와 같은 헌신과 봉사가 정상적인 신앙의 모습으로 알고, 뒤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벧엘 교회 성도님들은, 이런 거룩한 제사장들이 되어져, 다른 성도들에게 신앙의 영향력을 끼치며, 바르게 지도하고, 끌어 갈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종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3. 교회가 교회답게 위해서, 어떤 신앙적 노력이 필요하겠습니까?
말씀과 기도에 힘쓰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 하반 절에 보면,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을, 막 11 : 17절에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만민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찾아 기도하며 말씀을 듣는 곳, 그 곳이 바로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성전은 찬송과 기도와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집이요,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속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하나님께 예배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교회에 없다고 한다면, 그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교회의 역할을 상실한 교회를, 세상 사람들이 교회라 여기겠습니까?
물론 시간마다, 때마다 예배를 드리는 생활을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말씀을 따로 배우는 시간을 갖기란 더 더욱 어렵습니다.
기도 시간을 정해놓고, 규칙적으로 기도하기란 매우 힘이 듭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지만, 이는 성도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임을 깨닫고, 이 일들을 힘써 행하게 될 때에,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진정한 크리스챤이라 부르고, 우리가 다니는 교회를, 진정한 교회로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학교를 학교로 부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실이 있는 건물이 있고, 운동장이 있기 때문에 학교라고 부릅니까?

우리가 학교라고 부르는 데에는, 그 외형을 보고 하는 말이 아니지요. 그 속에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있기에, 배우려고 매일같이 등교하는 학생들이 있기에,  우리는 학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교복만 입었다고 학생이 아닙니다.
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학문을 배우기 때문에 학생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진정한 성도입니까?  성도란, 거룩한 것을 따르는 무리라는 뜻입니다.  그저 교회만 다니는 처취 멤버가 아니라, 신앙적 열심을 가지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배우는, 그리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 진정한 성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답게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교회에서 해야 할 일들을, 마땅히 행하는 교인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 17 : 11절에,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했습니다.
베뢰아 교회 뿐이겠습니까?  초대 교회의 모든 교회들이 다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행 2 : 42절에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게도니아 교회는, 어렵고 많은 환난을 당해온 교회였지만, 힘이 지나도록 감사에 넘친 연보를 드리며, 성도를 돕는 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한 교회였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행하는 성도들이 있는 교회가, 바로 교회다운 교회이고, 또한 이런 교회가, 우리 벧엘 교회가 계속적으로 추구해야 할, 교회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면, 그 교회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교회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일곱 교회가 나타나지만, 그 가운데 교회답지 못한 교회가 두 교회가 있지 않습니까?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15절에서도, 성전을 성전답게 하지 못한 교인들을 주님이 분노하시며 쫓아내고 있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오늘 우리 벧엘 교회는, 이러한 책망을 받는 교회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벧엘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지금까지도 그러했겠지만, 오늘 본문에서 교훈하는, 이런 세 가지 신앙적 노력을 기울이는 성도들이 더욱 더 넘쳐남으로 말미암아, 교회를 더 교회답게 만들고,
이런 성도들로 인하여 날마다 아름다운 교회로 성장하여서, 주님의 축복을 받으며, 다른 많은 이웃 교회들에 본이 되어지고, 세상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으며, 그들에게 귀한 신앙의 영향력을 미치며, 영적으로 끌어갈 수 있는 복된 교회가  되기를, 또한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벧엘교회 전승빈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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