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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경건한 자 (시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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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판사판’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일에 있어서 뒤죽박죽되고,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또 사생결단이라는 비장한 각오와 마지막의 의미로도 사용하는 말입니다. 원래 이 말은 불교용어입니다. 불교에서는 스님을 ‘이판승’과 ‘사판승’으로 나눕니다. 이판승을 ‘수도승, 비구승, 공부승’이라고 하고, 사판승을 ‘행정승, 대처승, 살림승’이라고도 부릅니다. 원래는 하나였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나누어졌습니다. 고려 시대만해도 불교가 왕성하게 활동했으나 조선시대는 불교가 쇠퇴하고, 유교가 번성하던 시대입니다. 이때부터 불교는 큰 탄압을 받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 불교는 두 과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는 사찰을 존속시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불도의 맥을 잇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부류는 사찰을 지키기 위해 천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사원을 유지했습니다. 다른 부류는 산 속으로 들어가 은둔(隱遁)하여 참선 등을 통한 수행으로 불도를 이어갔습니다. 전자를 사판승이라 부르고, 후자를 이판승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둘의 경계와 구분이 없어지는 부정적인 이미지로서 이판사판이란 말을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중세시대에도 이판사판이 있었습니다. 신부로 불리는 사람들, 그러니까 지금의 교황, 추기경, 주교들이 불교에서 말하는 사판입니다. 이판은 당시 수도원의 수도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행정이나 정치나 살림에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경건에만 치중하던 사람들입니다. 중세 교회가 타락했어도 이판에 해당되는 수도사들은 오직 신앙의 본질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역사가들은 그들을 아주 높이 평가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는 이판을 따로 두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개신교에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수도사라는 것이 없습니다. 왜 개혁자들이 개신교에 수도사를 두지 않았는지 정확한 이유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이것을 성경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삶에 이판과 사판은 구별되는 아니라 동시에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는 사판도 필요하고, 이판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둘의 조화를 통해 신앙은 다듬어지고, 그것이 곧 신앙인, 경건한 자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경건한 자에 대해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다윗이 지은 시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경건한 자를 택하셨다고 선포합니다. 여기 경건한 자는 먼저 자신을 말하고 또 모든 신앙인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경건한 사람으로 부름을 받아 경건하게 살았고,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경건한 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경건한 자로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경건한 자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요?

  첫째는 기도입니다. 3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경건한 자를 택하셨다고 선포한 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신다고 강조합니다. 경건한 자와 기도가 바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줍니다. 시편의 전체가 대부분 기도의 시인데 오늘 시편은 더욱 기도의 시편인 것을 알려줍니다. 1절에 ‘내 의의 하나님이여...’ 라고 기도하면서 시작하고,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였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라고 말합니다. 모두 기도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다윗의 삶에 기도가 빠지지 않고, 경건한 자의 모습에 기도가 우선 순위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경건한 자임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기도하는 자가 신앙인이요, 경건한 자입니다. 신앙에 기도가 중요하고, 기도가 빠지면 의미가 없고, 경건하다고 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십니까? 그렇다면 분명 우리가 경건한 자입니다. 기도하고 있다면, 이것이 하나님이 택하신 확실한 증거입니다. 기도는 신앙의 본질에 속한 것입니다. 기도로 우리는 하나님 의지하는 법을 배웁니다. 기도 속에 자기를 돌아보는 힘이 있고, 기도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찾고, 결국 기도해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본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부를 때에 들으시고, 기도할 때 응답이 임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응답은 없습니다. 주님도 이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구해야 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하지 않는 것도 주시지만, 구하라고 강조합니다. 기도해야 신앙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반대로 기도하지 않으면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좋은 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갔는데 주님이 어느 한 방으로 이끌고 가더랍니다. 그곳에는 마치 금고처럼 여러 개의 박스가 놓여 있었고, 어느 한 박스에 자기 이름이 적혀 있더랍니다. 그래서 그곳을 열어보니 세상에서 자기가 받아야 하는 엄청난 축복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세상에서 여기 적혀 있는 것만큼 다 받지 못한 것이 생각이 나더랍니다. 그래서 따지듯이 말했다고 합니다. “주님, 이렇게 많은 축복을 주신다고 적으셨는데 왜 내가 세상에 있을 때 이것을 주지 않았습니까? 저는 여기에 적은 것 반도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이 소리를 듣던 주님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야, 너 언제 이거 달라고 요구해 보았니?” 그때서야 입이 다물어지고, 할말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많은 축복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구하거나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해야 받는 것이고, 기도해야 응답이 있는 것이고, 기도해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기독교역사에서 기도하며 살던 경건한 사람들이 기도의 경험을 통해 얻었던 교훈을 한 줄로 만든 것이 있습니다. 30가지가 넘지만 그 중에 몇 가지만 소개하려고 합니다. “기도가 없을 때에 마음은 세상 것으로 무거워지고, 기도가 있을 때 마음은 성령과 하늘의 것으로 충만하다... 기도는 우회도로처럼 보이나 실상은 지름길이다... 기도 없는 곳에 사람만 일하고, 기도 있는 곳에 하나님이 일한다... 기도는 노력 더하기 노력이 아니라, 나의 노력 곱하기 노력이다.... 기도가 없는 곳은 사탄의 잔칫집이고, 기도가 있는 곳은 사탄의 초상집이다... 기도 없는 경건은 양의 옷을 입은 이리와 같다”

  한국교회의 부흥은 기도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도의 메아리가 울리기에 하나님이 민족을 붙잡고 계십니다. 기도해야 믿는 자이고, 기도해야 응답을 받습니다. 지속적으로 기도하면서 경건한 자의 길을 걸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제사, 예배입니다. 경건한 자의 모습이 또 무엇일까요? 본문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구약에서 말하는 모든 제사는 오늘 우리 시대의 예배를 의미합니다. 예배하는 자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경건을 찾습니다. 예배는 곧 하나님 중심의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고,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하나님 중심의 예배로 살 때 어떤 결과가 올까요? 계속되는 말씀을 보시면 그것을 보여줍니다. 예배할 때 여호와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치는 것입니다. 그곳에 내 마음의 기쁨이 임하고,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함이 있고,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고, 나를 안전하게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바로 의의 제사를 드리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에게 임하는 축복입니다. 이미 우리가 경험한 것이고, 또 계속 예배를 드리면서 받아야 할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경건한 자의 모습을 예배에서 찾습니다. 이것을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오늘 바로 그 중요한 예배의 자리로 여러분이 나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한 주간의 시작을 예배로 문을 엽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예배를 드리고 시작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예배를 빼놓지 않습니다. 이것이 경건한 자의 모습이요 삶입니다. 모든 모임, 모든 일, 어떤 경우에서도 예배가 중심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중심으로 산다는 것이요,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축복과 은혜가 결과로 쏟아지는 것입니다. 예배는 신앙의 중심이요, 알맹이입니다.

  한국교회만큼 예배가 많은 나라가 또 없습니다. 미국과 비교해 보면 아마 3분의 2이상을 더 드립니다. 우리는 주일만이 아니라 저녁과 수요일과 구역예배가 있고, 매일 새벽예배가 있습니다. 거의 매주일에 10번 이상의 공식적인 예배가 있습니다. 비공식적인 개인과 가정의 예배까지 합치면 훨씬 더 많습니다. 이렇게 예배가 많다는 것이 장점이지만 약점이기도 있습니다.

  우선, 너무 많으니까 소홀히 될 수 있습니다. 예배는 모두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예배도 중요하지 않은 예배가 없습니다. 주일대예배이기 때문에 중요하고 수요일 예배이기 때문에 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에 비중이 있고, 몇 사람이 모이기에 소홀할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어떤 경우, 어떤 상황에서도 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드리는 어떤 형태의 예배라도 우리는 소홀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예배가 많으니까 형식에 치우칠 위험도 있습니다. 기도와 예배를 비교할 때, 기도는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예배는 사실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예배에 정성을 다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열 번 드려도 밋밋한 예배가 있는가 하면, 한번을 드려도 감격적인 예배가 있습니다. 예배자는 그때 그때마다 열정과 힘을 다해야 합니다. 예배는 형식이 아닙니다. 예배는 모든 것의 내용입니다. 예배하며 살 때 하나님의 위로와 은총이 임합니다. 예배자의 모습에서 경건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그 시대와 이 시대에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로서 경건을 이루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죄를 이기는 것입니다.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떨며 범죄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 지어다” 이것이 경건한 자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죄를 이기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힘쓰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떨며’ 라는 말을 강조합니다. 이 말은 ‘분노’라는 말로도 번역됩니다. 죄에 있어서는 분노하고, 떨지 않고는 이길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이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늘 우리를 유혹으로 이끕니다. 세상에서 사탄은 우리를 집요하게 공격해 옵니다. 사탄의 하는 일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게 합니다. 죄를 지어 자존감을 떨어트리고 약하게 합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깨어야 합니다.

  또 다른 이유는 내 속에는 원하는 선과 원치 않는 악이 공존하여 싸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내 안에 오신 후 더욱 심합니다. 믿지 않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던 것이 이제는 조그만 것도 우리를 두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주님을 알수록 더욱 우리의 더러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내 속에서 괴롭게 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고민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처럼 세상이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지금도 내 안에는 선과 악이 싸웁니다. 그래서 우리가 떨면서, 때론 몸부림치면서 죄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한 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앞서서 기도와 예배가 경건한 자의 모습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경건의 부분이지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경건한 삶을 다 갖추었다고 오해하거나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이제 떨며 범죄하지 않는 자리까지 가야만 합니다. 이것 없이 우리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고, 참된 경건한 자라보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우리보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으로만 본다면 예수님시대에 바리새인을 따라갈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경건한 자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기도로만 말하면 이슬람교를 따르는 신자들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기도합니다. 기도시간만 되면 모두가 성지를 향해 무릎을 꿇습니다.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 경건한 모습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기도를 쉬지 않고 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 일주일에도 정해놓고 하고, 일년의 기도시간은 이들의 생업이 다 포기될 만큼 지킵니다. 그들이 이렇게 기도로 경건의 모습은 갖추었지만, 실제로 이들의 삶은 경건해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면서 도둑질을 하고, 거짓말을 합니다. 기도하면서 사람을 속이고, 생명을 헤칩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이판사판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경건한 자는 기도해야 하고,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치 않고,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죄에 대하여 몹시 떨어야 합니다. 죄에 대해 분노하고 떨어야 합니다. ‘내가 어찌할꼬’ 하면서 가슴을 쳐야 합니다. 바로 그 모습에서 경건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시편을 기록한 다윗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만큼 기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새벽기도는 그가 시작하였고, 철야기도를 다윗만큼 한 인물이 별로 없습니다. 그가 예배를 위해 투자한 삶은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습니다. 결국 성전을 지으려는 것도 다 예배를 드리다가 그가 생각해 낸 신앙의 절정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이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인생에서 처절한 실패와 범죄를 맛보았을 때, 그가 보여주었던 것이 바로 떠는 모습이었습니다. 날마다 울면서 죄를 회개하고, 자복했습니다. 마음을 찢고 가슴을 치면서 죄에 대하여 분노했습니다. 그렇게 죄를 이겨나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그 시대에 가장 경건한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건한 자로 살기를 원한다면, 죄에 대하여 떨어야 하고, 분노해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깨어야 하고,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성령을 도움을 의지하면서 나를 통제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죄가 보일 때 회개하고 자복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점점 죄가 줄어들고 없어져 가는 것을 보면서 기뻐해야 합니다. 이것이 경건한 자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지난 8월과 9월에 걸쳐 우리 신앙에 중요한 원리를 살펴보았습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행복자로 선언하셨고, 보배롭고 존귀한 자로 불러주셨습니다. 이처럼 내가 누구인가를 알고 이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자가 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유다처럼 뛰어난 자가 되고, 오네시모처럼 유익한 자, 도마처럼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다윗처럼 경건한 자로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떨면서 죄를 이겨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마음에 담고 날마다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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