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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유있는 믿음 (사 6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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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 주 설교제목은 ‘작아서 큰 자’이었습니다. 이번 말씀은 ‘여유있는 믿음’입니다.

제가 어저께 제 이메일을 체크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왜일까요? 이메일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희 아빠를 변화시켜 주소서

그래서 저는 제 딸이 나에게 보낸 편지인줄 알았습니다. 아니 얘가 왜 갑자기 이렇게 기도했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놀랐어요.  왜 이런 기도를 드리고 왜 이런 편지를 나에게 보냈지?, 라고 생각하면서 그 편지를 읽어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기독교 텔레비전에서 보내는 새벽기도의 편지에 어떤 성도님이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해서 올린 글이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저희 아빠를 변화시켜 주소서


사랑하는 하나님
아빠를 고쳐주소서
마음에 기쁨이 없고
평안이 없어 늘 동분서주 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하나님 의를 다시 만나
아빠가 새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찬양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아빠를 변화시켜 주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이 아빠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신앙을 잃고 평안을 잃고 마음에 쉼과 여유를 잃어버린 분입니다. 제가 얼마전에 이런 글을 인터넷에서 읽어 보았습니다. 

“마음의 여유는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그것은 세상을 밝은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해준다.
그래서 웃을 수 있고,관대할 수 있고,하는 일에서도 만족스런 결과를 기대할 수 있어 자존감을 키워낼 수 있는 동력이 된다는 것을 안다. 소위 가진 자의 여유이리라.
생활인으로서 내가 가져야 하는 필수덕목이 여유로움이란걸 지각하는데 오랜 우여곡절이 필요했다. 사소한 일에 목숨거는 어리석음 탓이었다. 생활속의 여유로움, 여백의 아름다움을 취하는 생활,그리고 남을 받아 들이는 그래서 함께 어우르는 생활을 일구어 내자. 그것이 곧 용서일게다.
이제 내 삶의 아젠다는 여유이고 용서이다.”

누구의 글인지 이름을 밝히지 않은 글입니다만 한 사람의 어떤 각성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주제는 ‘여유’이지요.  여유.  사실 우리는 이 여유를 상실하고 살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나 속으로는 여유를 상실해서 긴장과 갈등을 느끼며 서로의 관계에 불행을 초래하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얼마든지 여유롭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을 조급하여서 다투지 않는가도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인생이 얼마를 살았든지, 또 앞으로 얼마를 살게 되든지 우리는 이제 용서하며 살 수 있는 여유도 필요할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여유를 신앙에 적용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여유가 있는 신앙이 되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그 크신 여유를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여유를 선물로 받아서 여유로운 인생, 여유로운 신앙인이 되자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 한가로운 얘기를 하시네,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예수님도 그리고 바울사도도 가장 바쁘신 주님의 사자들도 반드시 이 여유를 찾는 일을 힘쓰면서 그 바쁜 모든 사역들을 감당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안식의 제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지 쉼을 필요로 합니다.  날짜를 내어서 쉬기도 하고 짬을 내어서 쉬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여유입니다.  우리는 심령의 여유, 바로 믿음의 여유를 가져야하며 이 일을 기도해야합니다. 

여유있는 신앙은 어떤 것입니까. 
1.결과에 여유있는 믿음(10절)
우리는 결과를 예측할 때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결과를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롬8:28) 욥의 결과를 믿기 때문입니다.
약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은 욥이란 분.  하루만에 집과 재산, 자녀들, 건강을 몽땅 잃어버렸던 욥이란 분.  그러나 그 분이 인내하면서 신앙을 지킨 결과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큰 축복과 위로를 주셨고 큰 여유로움을 선물로 주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생을 여유롭게 지내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욥의 결과를 보면서 아, 반드시 잘 될거다, 라는 믿음을 갖고 여유를 마음에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시고 용서하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습니다.  우리의 죽음도 정복되었고 영생의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영생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국 용서받는다는 평안, 반드시 영생한다는 믿음 속에서 마음에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저와 여러분, 우리의 인생의 결과를 말씀합니다.

벧전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벧전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라.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아무리 고난이 있어도 때로는 슬픔이 넘쳐도 그러나 그 가운데서 여유를 갖는 것은 결과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사야서의 전체 흐름 속에서 나옵니다.  이사야서는 범죄한 백성들에 대한 계속된 심판의 경고를 하시면서 그러나 구원의 소망을 주시는 말씀을 기록합니다.  죄를 징계하시는 말씀을 하시나 반드시 소망을 잃지 않게 하십니다.  그 중에 7-21절 말씀이 있습니다.  그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복음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깝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더딘 것 같으나 순식간에 건설되는 그런 신속함을 두고 위로하십니다(7-9절, 벧후3:9). 
기쁨과 행복의 충만이 있을 것이며(10-14절)  악인은 심판을 받으나(15-17절)  하나님의 영광은 온 땅에 가득하게 될 것이라(18-21절)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런 결과 때문에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치 않고 여유를 가지는 신앙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영국에 유학을 갈 때 홍콩의 교회가 제게 차를 사주신다고 했습니다.  그 때 제가 어떻게 차까지, 라는 생각에 사양하고 자전거를 사서 탔습니다. 아주 좋았지만 그러나 지나고 보니 영국에 있을 때 차를 갖고 있었으면 훨씬 더 영국을 잘 알고 또 더 남는 유학생활을 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유있는 마음이 남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루살렘, 즉 교회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움 당할 때 함께 슬퍼할 수 있어야하지만 그러나 교회에 주시는 결과, 성도의 인생의 결과를 내다 보고 믿으며 또한 기뻐할 줄 알아야합니다. 

66:10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

이런 기쁨을 가지는 여유는 교회를 늘 밝게 합니다. 교회에서 대표기도하실 때에도 늘 기쁨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과정에서 고난이 있어도 결과를 내다보고 기뻐하는 여유를 가지시고 여유있는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시는 것을 누릴 줄도 아는 여유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공기를 주십니다.  시간을 주십니다. 기회를 주십니다. 다 여유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기쁨을 느끼며 누릴 수 있습니다.  주신 은혜를 누릴 줄 아는 신자는 지금 우리 교회와 모든 환경을 인해 감사하며 주신 것을 누립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 청계천에 가까운 교회로서 어떤 여유로움을 갖는 상징적인 장소를 갖게 되었습니다.  어제 청계천 새물맞이 행사가 있었고 많은 분들이 청계천에 모였습니다. 저는 가보지는 못했고 뉴스로 보기만 했습니다만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인 것은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청계천에 모여서 이제 도심의 복잡한 삶, 바쁜 일과속에서 여유로움을 즐길 그런 곳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유로움의 물이 흐르는 가에 우리 교회가 있습니다. 

'국민가수'라고 불리우는 조용필싸가 지난 30일 금요일에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콘서트를 했지요.  신문기사를 읽어보니 청계천 복원사업을 기념해 작곡한 노래 '청계천'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 가사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불빛 가득한 청계천에
우리의 소망이 피었네 피었네
꿈-이 있-어 좋다네
우리의 세상이 여기있네
사랑이 있-어 좋다네
우리의 기쁨이 여기있네

청계천에 흐르는 물을 보시면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흘러내리는 예수님의 물과 피, 보혈의 샘, 물줄기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진정한 평안과 쉼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 십자가의 용서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용서되었고 구원을 받으셨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결과는 반드시 선할 것입니다.  청계천은 그 상징적인 곳으로 여기고 청계천을 거닐면서 주님의 생명의 강가에 선 믿음을 다짐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 결과를 맡기는 믿음. 그 믿음으로 여유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시37:5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잠16:3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주님께 다 맡기시면 맡겨진 모든 것에 주님의 축복이 임하기 시작합니다. 은행에 맡겨 놓으시면 이자가 붙듯이 그 이상으로 주님께 맡겨진 우리의 삶에는 큰 여유라는 선물이 옵니다. 딱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건강도 옵니다. 행복도 옵니다.  그리고 기뻐할 여유가 옵니다.  가족과 이웃과 다같이 기뻐하는 여유를 가지고 밝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2. 위로에 여유있는 믿음(11-13절)
여유있는 신앙인은 넉넉히 위로를 합니다. 본문 말씀을 읽어 봅니다.

66:11 너희가 젖을 빠는 것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

11절에서 ‘위로하는 품’, ‘젖을 넉넉히 빤 것같이’라는 말씀이 있지요.  교회는 위로의 품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교회로부터 위로의 말씀을 풍성히 듣게 됩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어야합니다. 이 말은 저와 여러분이 진정 넉넉한 위로의 젖을 가진 품을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위로의 젖이 매말라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로를 할 여유가 없습니다. 내가 죽겠는데….하는 생각에 남을 위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위로하는 일을 위해 믿음으로 세상을 보아야합니다.  로마서 8장37절 말씀에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풍성한 사랑과 위로 속에서 넉넉히 세상을 이깁니다.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
내같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선교의 영광입니다.  선교한 사람들, 전도한 사람들
에게 주시는 위로가 있습니다.  1907년 평양에서 있었던 대부흥을 기념하는 대부흥대
회를 위해 이번 교단총회에서 다큐를 상영하게 되는데 그 내용을 먼저 대부흥위원회에
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 한국에서 선교하신 분들, 그 자손들이 당시를 감개무
량하게 증언하는 것을 보면서 저도 선교사로 나갔던 입장에서 볼 때 그 분들이 얼마나
보람있을까, 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열방의 영광으로 그 분들이 위로를 받는 것이
지요.  한국교회가 부흥하면 그 영광이 그들에게 위로입니다.  그리고 이 위로로 그
자손들이 위로를 얻습니다. 

교회를 위해 충성하면 우리는 교회의 영광으로 인해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는 위로의
복음을 전하며 위로하면서 살면 언젠가 그 위로의 힘을 얻은 사람들, 그리고 교회들이
우리에게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넉넉한 위로의 복음으로 사람과 교회는 큽니다. 
이 넉넉한 위로의 품을 교회가 갖고 가정이 갖고 저와 여러분이 갖기를 원합니다. 

여유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들은 배려합니다. 함부로 대하거나 무자비하지 않습니
다.
여유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돌아보아 위로하고 돌봐줍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은 조급하여 실수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에 그렇게 열정적으로 사역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다가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참된 안식을 잃어버리고 질병 때문에, 악한 영 때문에, 가난 때문에, 근심 때
문에, 죄 때문에 안식할 수 없었던 자들을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열심을 내므로 인하
여 다른 사람들이 쉼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오히려 우리들에게는 참된 안식과 쉼이 된 것입니다.
그분의 희생이 우리에게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행복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쉬기 위해서 휴양지에 가서나 놀이시설에 가면, 여러분을 즐겁게 하기 위해
서 열심히 인하는 사람들을 볼수 있습니다. 안전요원도 있고, 청소하시는 분도 있고,
안내하시는 분도 있고, 노래와 춤을 추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의 열심과 노력이 여
러분을 쉬게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 땀으로 다른 사람들을 쉬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헌신과 노력이 안식할 수 없고 절망하는 사람들을 10명, 20명, 100명에게 안
식을 주고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안식을 경험한 자들을 통해서 이루
어집니다. 인생의 문제로 찌들고 절망한 이들이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없습니다. 자
신의 문제만으로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주님이 주신 안식이 있다면 이젠 그 안식을 나누어주어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저는 이번 바자를 생각하면서 꿈이 있습니다.  늘 가을에 하는 바자는 소외된 이웃과
함께 위로를 나누며 격려하는 목적으로 하는 바자입니다.  우리의 앞마당을 이웃을 불
러들이는 그물로 삼자는 의미도 있습니다. 전도를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큰
이유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요 불우한 이웃에게 부족했던 사랑의 손길, 위로를 나누
는 일입니다.  저는 우리 앞길이 난계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청계천친화적인 교회
가 되라는 응답을 받아서 이번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자의 수익금으로
그리고 우리 교우들이 한끼를 금식한 돈을 모아서 장애인들, 불우한 이웃을 위해 전하
면서 청계천나들이를 함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청계천에서 우리 교
회로 함께 걸어오면서 이 난계로가 난지와 청계의 이미지를 갖고 새로 태어나는 사랑
의 문화, 생명의 문화거리가 되게 하자,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위
로하는 여유를 갖자는 생각을 합니다.  모두가 다 함께 열심히 이 여유의 나눔에 참여
하면 좋겠습니다. 기독교 테레비전과 함께 할 것 같은데 위해서 기도하시면서 사랑의
손길을 나누는 여유신앙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위로의 젖이 풍성히 나오는 품을 갖
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이런 여유를 갖나요? 이제 여유신앙은
3.창조적 여유있는 믿음(14절)
우리는 부흥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부흥되고 사업이 부흥되고 가정의 신앙이
부흥되고 힘이 솟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손입니다. 그
손은 우리에게 여유를 주시면서 더 잘되는 길을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창조적인 여유
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로,
도끼로 나무 자르는 시합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도끼 하나씩을 가지고 하루 동안에 누가 많은 산에서 나무를 자르나 시합을
했습니다. 한 사람은 쉬지도 않고 땀을 흘려가며 이를 악물고 열심히 나무를 자릅니
다.

그런데 또 다른 한 사람은 열심히 일하는가 싶다가도 금방 앉아서 쉬는 것입니다. 다
른 사람은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데 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또 일하고 그리
고 또 쉬고 ... 하루가 지나서 누가 많은 나무를 베었는가 확인해봤더니 이상하게도
노는 것 같고 게으른 것 같은 사람이 더 많은 성과를 거두어 승리를 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50분 일하고 10분 쉬면서 앉아서 그저 생각 없이 논 것이 아니라 도끼를 점검하
고 무뎌진 날을 갈고 땀을 식혀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노는 것 같았고 시합에서 질 것 같았지만 결국 승리자는 휴식과 쉼의 의미를 알
았던 사람에게로 돌아간 것입니다.

즉 여유로움은 당사자에게 유익을 줍니다.
더 강력한 추진력과 생기와 활기를 그리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공급하여 보다 효과적인
삶을 살게 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창조적인 여유를 가지시면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 분의 손을 체험합니다.
창조적으로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광야에 있을 때에 그
들과 함께 했던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그들은 광야에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생존의 문제는 사라졌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이스라엘 광야에서 수백만의 백성을 40년 동안이나 먹이셨
습니다.
그들이 봄이 되어 농사를 짓고 그 수확 물로 먹고 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농사도
짓지 않았지만 그 수백 만 명이 배부르게 먹을 것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있는 곳은 자연경관이 좋아서 언제든지 과일이나 산짐승을 잡아먹을 수
있고 산이나 들에서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는 그런 비옥 땅을 여행하고 있는 것이 아닙
니다. 지금 그들이 여행하고 있는 땅은 광야입니다. 사막입니다.

또한 그 수많은 사람들은 하루 이틀 동안 먹이신 것이 아니라 무려 40년 동안이나 먹
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교회행사를 하려고 해도 때때로 음식준비 때문에 걱정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일을 장작 40년 동안이나 행하셨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무슨 빚진 것이 있다고 이들을 먹이셨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 백성이고 자기의 자녀들이기에 먹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수백 만 명의 자기 백성을 사막 가운데서도 먹이셨는데
이런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우리들을 능력이 없어서 자기 백성을 굶기시겠습니까? 버
리시겠습니까? 모른척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하물며 우리를 기근과
가난 속에서 고통을 당하게 하시겠습니까?
말도 안됩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의 믿음이 문제입니다.

이처럼 위대한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면 근심이나 걱정, 불안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적 풍성함을 경험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님을 모신 순간에 이미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며 능력의
사람인 것입니다. 이미 우리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천국의 보화창고를 열고 닫는 열쇠
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에겐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
다. 그러기에 우리의 대적을 향하여 담대하게 승리를 선포하고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
다.
우리가 여유를 즐기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신앙인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
다.

우리는 창조의 원리속에서 여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요즘 주5일제 근무라고 하는 새로운 직업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
를 즐기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사는 것이 우선되어여 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6일 동안 창조하셨고 하루를 쉬셨습니다. 사실 하나님
은 쉬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기에 피곤하거나 곤비치 않습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를 쉬셨다는 사실은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정하신 창조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으로 6일 일하고 하루를 쉬게하는 질서를 만드셨습니
다.

성경에서 일한다는 의미는 창조적인 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천지를 창조
하셨듯이 우리도 6일동안 창조의 일을 해야합니다. 농사를 짓는 것도 창조의 일이며
물건을 만드는 것도 창조의 일이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것도 창조의 일입니
다. 약하고 병든 자를 돌보는 일도 창조의 일이며 더럽혀진 자연을 고치고 회복하는
일도 창조의 일입니다. 즉 비록 직장에서는 5일만 일할지라도 우리는 토요일에 또 다
른 창조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평일에는 바쁘다는 이유로 하지 못했던 봉사의 일을 휴식이 있는 토요일에 한다면 이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창조의 일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웃들
을 위해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일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며 하
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입니다.

이렇게 6일을 보내고 나서야 온전한 안식과 쉼을 누릴 자격이 주어진다고 할 수 있습
니다. 이렇게 주어진 쉼과 안식이야말로 더 낫은 창조의 일을 계속하게 하는 힘을 공
급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능력이요 그 분의 일, 우리에게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임하면 매말
랐던 뼈가 다시 힘을 얻듯이 그렇게 우리의 모든 곳에 새 힘이 솟습니다.  그 능력 아
래 있다고 생각하니 교만도 하지 않고 겸손하면서 소망이 자라나면서 마치 연한 풀이
무성하게 일어나듯이 그렇게 꿈과 소망이 넘치는 여유있는 신앙인의 모습이 자라납니
다. 무엇보다도 아주 여유있고 부드러은 그리고 아주 겸손한 모습으로 성도들이 일어
납니다.

66:14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
의 손은 그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 원수에게 더하리라

연한 풀의 무성함 같은 그런 겸손, 온유함을 가진 그런 사람들로 일어날 때 교회는 정
말 부드럽습니다. 그리고 부드러운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때로 우리는 너무 강합니
다. 강하면 부러진다고 하는데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은 그런 부
드러움으로 가득한 성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 주님의 일하심을 믿는 그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 는 이 신앙이 우리를 게을르게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큰 안심, 큰 양보, 큰 격려, 큰 집중력을 발휘하는 여유로운 신앙인
이 될 수 있습니다.  이로써 비로소 우리는 큰 꿈을 꾸고 큰 그릇이 되어서 크게 채움
받는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큰 믿음입니다. 큰 믿음의 필수조건은 여유입니다. 
여유를 가집시다.  그리고 여유를 보입시다.  여유있는 기뻐함을 가집시다. 여유있는
위로를 합시다. 여유있는 부드러움을 가집시다.  주님은 풍랑이는 바다에서도 주무실
수 있고 안식을 가지실 수 있는 그런 여유신앙인이셨습니다.  지금 풍랑이 있어도 오
히려 이 때 서로 웃고 위로하고 부드럽게 붙들어주는 교회가 되어서 우리 교회가 여유
있는 믿음의 성도들이 무성한 풀같이 성장하는 교회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
합니다.아멘. (오 치 용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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