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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드릴 제물 (창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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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본문은 많은 문제가 제기되었던 부분이다. 그냥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너무 가혹하게 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기도 하다. 성경 본문상 가인이 그렇게 특별히 잘못한 것 같지 않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은 차별대우를 하시는 것인가 하는 의혹에 휩싸인다.

  유대인 현자들도 이 문제 앞에서 매우 당혹해 했고, 미쉬나(구약성경에 대한 고대 랍비들의 주석)의 일부에서는 가인이 썩은 과일과 채소를 바쳐서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업신여겼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너무 과장된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난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창 4: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라고 하신 말씀 속에서 그 실마리를 얻는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가인의 모습을 본다. 무엇인가 그 부끄러움의 실체가 있었고 가인도 어느 정도 그 부끄러움의 이유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가인은 어떻게 하는 게 옳은지 알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가인은 자기가 가지고 가는 제물을 어떤 종류의 것으로 정할지, 또 이 제물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만 것인지 아닌지 가인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가인은 자기가 바치는 제물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것이 못된다고 판단되었음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바쳤다. 그래서 하나님은 책망하신다. “너는 선을 행하지 않았다. 너는 좋은 것을 내게 바치지 않고 악한 것을 내게 바쳤다. 네가 만약 선을 행했다고 하면 왜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 오늘 이것은 우리들에게 예배에 대한 좋은 경고의 메시지를 준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마음과 자세로 예배해야 하는지 대부분이 알고 있다. 지각하지 않기, 결석하지 않기, 말씀 시간에 집중해서 말씀을 듣기, 찬송할 때 마음과 영혼을 다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기도할 때 나의 앞에 계신 주님 앞에 말하듯 진실하게 기도하기, 감사하는 마음으로 헌금함에 손 내밀기, 이 1시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으로 알고 잠잠하게 그 분만 바라보기...... 이렇게 예배하는 것이 바른 예배이며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선하고 좋은 것임을 알고 있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선한 것을 드리고 있는가? 아니면 이것이 나의 최선이 아님을 알고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이며, 나의 예배에 대해서 책망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오늘도 습관처럼 드리고 있는가? 만약 우리가 여기에 해당한다면 우리 역시 예배에 있어서 실패한 자가 될 수 밖에 없다. 

  가인이 드렸던 제물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무엇이 바른 제물이었을까? 가인은 그것을 또 어떻게 알았을까?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하나님께서 받으신 속죄의 제물은 오직 짐승뿐이었다. 물론 곡식을 빻아서 드린 제물도 있기는 했지만 속죄의 제물은 짐승의 피를 속죄 제물이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에 이 원칙을 가르치시고, 몸소 짐승을 잡으셨다. 아마도 아담과 하와 부부는 자녀들인 가인과 아벨에게 이 지식을 전수했을 것이다. 이 제사의 정신은 계속 이어져갔다. 그런데 오늘 성경 가운데서 이런 대목이 있다. “세월이 지난 후에” (4:3)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알게 되었던 제사의 정신이 흐려졌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인은 부모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제사의 정신과 제물 속에 담긴 속죄의 은혜를 망각하고 자기 방식대로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을 또 한 가지 알게 된다. 예배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예배의 정신과 그 예배 속에 담긴 구속의 은총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잃어버리거나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만은 굳게 잡아야 한다.

  가인은 제물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자기 손으로 일해 거둔 결실, 곧 그가 재배한 채소를 가지고 나갔다. 또 다른 세월이 지난 후에 사도 바울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의 긍휼하심과 성령으로 했을 뿐이기에 우리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가인이 배척된 이유는 단순히 그가 땅의 소산, 채소와 곡식으로 제물을 삼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의 행위를 합당한 것처럼 여기면서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의롭다고 여기면서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어떤 마음으로 나오는가? 주일에 교회 나올 때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나같은 죄인이 없습니다.’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자리할 공간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요? 다들 울고불고 난리인데 죄가 많은가 봐요. 나야 뭐 깨끗한 사람이죠.’ 이런 마음이 문제이고 불쌍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회개도 필요 없고 은혜도 필요 없다. 그런 심령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결코 의롭지 못한 사람들이다. ‘의’란 율법을 다 지킨  상태를 신학적인 용어로 부르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우리 대신 ‘의’를 이루신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요, 이것이 기독교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땅의 소산을 들고 나온다. 이 세상에 살면서 번 소득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린다. 그러면 우리가 드리는 예물이 잘못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속죄 제물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가 또 다른 속죄의 제물, 짐승의 피는 필요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정신 속에는 이 속죄의 사실을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나는 비록 땅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만 이미 나의 의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피를 우리의 제물위에 뿌려야 한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 내가 직장에서 돈을 벌고 살아가는 이유, 오늘 이런 소득을 남기게 하신 모든 이유가 이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속죄에 있어야 한다. 그 분이 내게 베푸신 구속의 은총에 비하면 내가 주님께 아무리 많은 헌금을 드린다고 해도, 내가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으로 드린다고 해도 주님이 제게 베푸신 은혜에 비하면 나의 드림은 너무나 보잘 것 없음을 기억하면서 감사하는 것이다. 그 분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지난 번 조중현 집사님 공장이전예배 때 특송했던 자매들이 교회버스를 타고 오면서 하는 얘기를 들었다. 어떤 자매가 “나는 눈물 없이 예배를 못 들인다.”고 했다. 나는 부끄러워졌다. 나는 예배할 때마다 얼마나 감격하며 예배하는가? 당신은 눈물과 감격 없는 예배를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한다. 감격과 눈물과 감사 없는 예배가 이젠 우리의 변함없는 체질이 되어 버렸다. 그것이 마치 우리의 현실인 것처럼 인정하면서 우리의 예배는 굳어져 가고 있다.

  사랑하는 우리 찬양대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제물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찬양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우리가 드려야할 제물이라면 이젠 나의 모든 찬양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새겨 넣어야만 한다. 무슨 찬양을 하든, 무슨 노래를 하든 나의 모든 노래, 모든 찬양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지나게 해야 한다. 그 분의 보혈이 나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이 찬양을 덮도록 해야 한다. 내가 그 보혈을 지나서 하나님 품에 깊이 들어가는 은혜가 있어야 한다. 

  오늘 성경 속에서 눈여겨볼 곳은 4-5절이다.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이 가인과 아벨의 제물뿐만이 아니라 그의 존재와 함께 받았음을 가르쳐 준다. 제물은 언제나 그의 존재 전체와 함께 따라다닌다. ‘제물만’이라고 하지 않고 뭐라고 했는가? ‘아벨과 그의 제물’이라고 했고,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하나님 앞에 예배하면서 드리는 제물에만 관심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나의 전 존재에 관심을 가지신다. 내가 예배당에서 어떻게 예배드리는가에만 관심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내가 6일 동안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살아가는가 에도 관심을 가지신다. 하나님은 내가 교회에서 예배하는 1시간의 예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계신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어차피 우리에게 주신 시간이 나의 시간이 아니라 모두 다 그 분의 시간이라면 모든 시간의 주인은 그 분이며, 따라서 모든 시간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소중한 것이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1-2)

우리의 예배는 오늘 찬양예배로 끝나지 않는다. 이제 내일부터 새롭게 시작할 새로운 삶의 예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까지만 예배라고만 생각하지 마라. 여러분은 추운 겨울날 밖에 세워둔 자동차의 시동을 걸어본 일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매우 어렵다. 만약 우리가 6일 동안 세상에서 하나님을 예배함이 없이, 하나님을 바라봄이 없이 주일에 한 번 나와서 그 분을 예배하려고 한다면 우리의 영혼이 새 힘을 얻기란 너무나 힘들다. 그러나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예배함이 나의 가장 큰 기쁨이 된다면 우리의 예배는 한결 은혜롭고, 활기차며, 생명력 있는 예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제물을 원하지 아니 하신다. 그 분은 나의 전 존재를 원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시온 찬양대의 목소리로 들려지는 찬양을 원하시지 않는다. 그 분은 여러분의 전체를 달라고 하신다. 언제나 우리의 노래 제목은 “나의 목소리를 받아주시옵소서”가 아니라 “나를 받아주시옵소서”라고 해야 한다. 나의 모습, 나의 소유, 나의 생명, 나의 실패와 절망까지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이 양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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