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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복 (시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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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8편은 다윗이 지은 것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했으면 이처럼 고백했을까요?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윗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틀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을 들라면 누구나 다윗을 들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노아나 아브라함, 요셉, 모세, 사무엘과 같은 인물도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분들이지만, 일생동안 하나님께 자기의 심정을 다정다감하게 고백했던 사람은 다윗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성경에 수록된 시편이 전부 150편인데 그 절반 이상을 다윗이 지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님들께서 즐겨 암송하시는 시편 23편도 다윗이 지은 것입니다. 거기 보면, 하나님을 목자로, 자신을 양으로 비유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가는 그의 행복을 노래했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던 목동이었습니다.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베들레헴은 작은 시골 마을입니다. 그는 여덟 형제 중 막내로서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와서 이새를 불러 연회에 그의 아들들을 다 오게 하라고 했더니 이새는 다윗을 제외하고 일곱 아들만 그 자리에 참석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날 사무엘에게서 기름부름을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다윗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삼상 13:14). 다윗의 어떤 점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그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중에서 첫째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착한 일을  행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솔로몬처럼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 바치는 것일까요? 아니면, 많은 제물을 바치는 것일까요? 성경은 이르기를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고 하였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묻기를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고 하셨습니다.

율법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온전히 지킨 것과 같습니다. 간혹 보면,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웃 사랑을 거론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순서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비록 다윗이 시골에서 양 몇 마리를 먹이는 초라한 목동에 불과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서 사울 왕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기 위해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던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신이 언제 어디서나 다윗과 함께 하셨습니다. 다윗이 초라한 목동의 차림으로 막대기와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상대하러 나가는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누가 보아도 다윗은 골리앗의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다윗은 단 한 번의 물매질로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이 일로 다윗은 일약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으나 곧 사울 왕의 미움을 받아 쫓기는 몸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살려두어서는 자기의 보좌가 위태롭다고 여기고 기필코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근 십년 동안이나 사울을 피하여 숨어 다니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다윗의 처지가 이처럼 불리하게 되자 그 동안 다윗을 지지하던 백성들이 다 등을 돌려 사울 왕의 협조자들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어디에 있든지 보는 족족 사울에게 고해 바쳤습니다.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었으면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라”(삼상 20:3)고 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시니 사울 왕은 수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추적했어도 결코 다윗을 해치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는 사람을 얼마나 귀히 여기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저는 본문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축복이 무엇인지 말씀해 드림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힘이 되어 주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일컬어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18편 6절에 보니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고 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그의 시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사울 왕은 하나님을 일컬어 “나의 하나님”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사무엘 선지자에게 “당신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을 쳐서 사람과 짐승을 다 진멸하라고 명하셨으나, 사울은 아말렉 왕 아각을 사로잡고, 살지고 기름진 우양을 남겨두었습니다. 그러고도 사무엘이 오자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말하기를 “그러면 내 귀에 들어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찜이니이까” 하니, 사울이 말하기를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31장 29절에 보면, 라반이 야곱에게 말하기를 “너를 해할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라반은 야곱이 경외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위대하신 신이심을 알았으나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았습니다. 라반에게 하나님은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지 그의 하나님이 아니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정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 제가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저를 아는 어떤 사람이 “당신이 믿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저는 귀한 진리를 하나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아무나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시라면, 어찌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먼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요 1:12).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요20:17)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분이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 가운데는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먼 친척 정도로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는 부모와 불화한 자식처럼 하나님과 서먹서먹한 관계로 지내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그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이 생길 리 만무합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지 못하며 또한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라’고 고백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진실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부족함을 용납해 주십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고도 남으리만치 위대합니다(벧전 4:8).

다윗은 키가 3미터나 되는 적장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의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승리를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91편에 “14)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15)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받아 밀려오는 세속의 도전을 이겨내고 그리스도인의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기 원하십니까?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하나님께 진실한 사랑을 고백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보호해 주십니다.

성경을 통해서 다윗의 생애를 살펴보면 철저하게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시편 23편에서 이 사실을 감동적인 필치로 묘사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철저하게 보호와 의존의 관계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보호할 책임을 지고 양들은 목자에 의존해서 살아갑니다. 양들이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그리로 인도합니다. 양들의 먹고 마시는 것과 쉬는 거처를 마련하는 일은 목자의 몫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자나 곰이나 늑대와 같은 맹수로부터, 양을 훔쳐가려는 도적으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도 목자의 책임입니다. 양이 할 일은 단지 목자의 인도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목자는 때로 양떼를 이끌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기도 합니다. 어두컴컴하고 습하고 뱀이 나오고 맹수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골짜기를 통행하려면 겁도 나고 다리도 아프고 고달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목자는 양들을 떠나지 아니하며 함께 합니다. 양들이 할 일은 다만 제 목자를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한 목자는 목숨을 걸고 자기 양들의 안전을 지켜내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양이 목자의 말을 듣지 않고 제 마음대로 행하면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역시 자신을 선한 목자로, 그를 믿고 따르는 우리를 양으로 비유하셨습니다. “11)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3)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14)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으면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셨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습니다(고전 13:7).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 인도하심에 따르는 것은 다른 데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니까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마음 놓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다윗은 말씀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반석은 험한 암벽으로 둘러싸인 땅을 가리키며, 요새는 높은 언덕이나 산꼭대기를 말합니다. 바위는 석산(石山)의 험봉(險峯)을 가리키며, 산성은 높은 산꼭대기에 쌓은 성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곳들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을 지켜 줍니다.

그리고 방패는 적의 화살이나 창으로부터 보호해 주며, 구원의 뿔은 곧 구원의 능력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다윗이 이 안전한 피난처들을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비유한 것입니다. 우리가 다윗의 시편을 신뢰하는 것은 그것이 단지 그의 소망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그의 체험을 고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다윗을 모든 환난과 위기에서 건지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변함없는 능력으로 그를 믿는 자들을 보호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8)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7-29)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위험에 노출된 채 살아갑니다.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작년 한 해 동안 교통사고 사망자수는 6,563명으로서 80분마다 한 명 사망한 셈입니다. 그리고 부상자수는 346,987명으로서 시간 당 약 4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지난 해 자살자수는 11,523명으로서 하루에 32명꼴로 자살했습니다. 그만큼 자살의 유혹이 강한 시대입니다.

여기에다 강절도, 성폭력 등은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범람하는 영화나 잡지, 소설 등이 사람들의 정신을 타락시키고 있으며, 물질만능주의가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합니다. 각종 스트레스로 인해 우울증, 공항증, 화병, 노이로제 등에 걸려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신앙의 세계에도 각종 이단 사이비가 출현해서 기독교인들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헤매는 형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호자가 되셔서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을 주 강림하시는 그 시간까지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원수들에게서 구원해 주십니다.

다윗은 목동시절에 사자나 곰이 양 떼에서 새끼를 움켜 가면 쫓아가서 그것들과 싸워 양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자나 곰을 물리친 공로를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는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 사울 왕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삼상 17:37)고 했습니다.

과연, 그의 믿음대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골리앗의 손에서 건져내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골리앗을 다윗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그 후에,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애썼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에서도 다윗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에 다윗은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하며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라고 자기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했더니 그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환난과 역경을 만났을 때 다윗이 즐겨 사용한 방법은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인생의 곤란한 시기에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한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성도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지속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기도의 문이 닫히고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의 일로 범죄했을 때, 다윗은 근 일 년 동안이나 기도의 문이 막히는 경험을 했습니다. 죄가 하나님과 다윗 사이를 가로 막았습니다. 그는 당시에 겪은 영혼의 고통에 대하여 “3)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시 32:)고 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등진 것이 얼마나 고통인가를 실감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서 죄를 지적하자 순순히 자기 죄를 자백하고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그는 원수들에게서 구원받는 것보다 죄 사함 받는 기쁨이 더욱 큼을 알았습니다. 이에 그는 고백하기를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죄의 유혹을 이기려면 세상을 사랑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현대인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합니다. 문제는 이 같은 풍조가 교회 안으로 밀려들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들 가운데 세상을 사랑하여 믿음의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신자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과 같은 위대한 사람도 범죄 하였다면 여러 모로 부족한 우리는 더욱 조심하여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죄에 빠지지 않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5)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 21)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은 성도들이지만, 동시에 매일같이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구원은 완성된 측면과 이루어나가는 측면을 아울러 갖고 있습니다. 어떤 잘못된 자들은 성경을 오해해서 한번 예수 믿은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하십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리면 범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유혹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이 세상의 모든 사악한 세력과 죄로부터 날마다 구원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다윗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의 유일한 척도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인간의 신념에 불과하므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며, 사랑이 없는 봉사는 자기만족과 자랑을 위한 것이므로 상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의 힘이 되시고, 보호자가 되시고, 구원자가 되시므로 역경과 시험과 죄를 이깁니다. 아무쪼록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고 한 다윗처럼 진실한 사랑의 고백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날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 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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