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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축복과 부흥을 이루는 성도와 교회 (마 2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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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마 25 : 1 - 13
제 목 : 축복과 부흥을 이루는 성도와 교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열 처녀에 대한 비유입니다.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가 있었지만, 나중에 신랑을 만나 혼인 잔치에 들어간 처녀는 다섯 처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다섯 처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등불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였음으로 신랑이 오는 것을 제 때 알아차리지를 못해 결국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다섯 처녀들을 성경은 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미련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미련하다는 말은 어리석다는 말과 같습니다.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당장의 근시안적인 안목을 가지고 모든 일을 쉽게 결정하는 사람을 향해 미련하다,  어리석다.  그렇게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은, 천국에 관한 주님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천국에 관한 비유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도 보면, 슬기로운 신앙인과 미련한  신앙인, 이 두 가지 부류의 신앙인이 항상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은 신앙인인가?  아니면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은 신앙인인가?  이것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할 줄로 압니다.  여러분은 생각할 때에, 나는 어디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나는 어떤 신앙인인지, 스스로의 신앙을  한번 점검해 보면서, 이 시간 기도의 제목을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슬기로운 신앙인과, 미련한 신앙인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오늘 말씀과 같이, 각 자의 신앙의 등에 기름을 준비했느냐?  하지 못했느냐? 이것을 보면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하나님께서 각 자에게  허락하신 신앙의 등이 다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 등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만, 그 등을 관리하고 기름을 채워 넣는 것은, 누구의 몫입니까? 
전적으로 여러분의 몫인 것입니다.  내 자신의 몫인 것이예요.

그래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은 신앙인은, 언제나 자신의 등을 살핍니다. 
자신의 등에 기름에 부족하지는 않는가?  수시로 확인하며, 모자라면 언제든지 주저하지 않고 기름을 사서 채워 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은 신앙인은 어떻습니까? 
말 그대로 미련합니다.  자신의 등을 살피지 않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습니다. 안일하게 지냅니다.  그러다가 등불이 꺼져 가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서야 허둥지둥하며 남에게 빌어 넣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신앙인과 미련한 신앙인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평소에 미리 기름을 준비하는지 안 하는지를 보면, 알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 5절 말씀을 보세요.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 새” 라고 했습니다. 지금 열 처녀들이 기다리는 것은 누구입니까?  신랑입니다.  언제 올지 모르지만, 그 날이 오면 그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것이 소망인 처녀들입니다. 

그런데 어떻다고 했습니까? “더디 오므로” 라고 했어요. 얼마나 더디었는가?  “다 졸며 잘 새”  무슨 말입니까? 기다리다 지쳐 피곤해 있을 때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밤중에 되어 다 자고 있을 때, 그 때 신랑이 왔다는 것이예요. 

여러분 8절 말씀에 보면,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자기 등불이 꺼져 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는데, 이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등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똑같이 꺼져 가는 상황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준비한 기름이 없었기에, 신랑을 맞아야 할 그 중요한 시점에, 등불을 꺼트림으로  신랑을 알아보지도, 맞이하지도 못하고, 결국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기다린 보람도 없이, 허망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처럼 허망한 인생을 살아  가서는 안 될 줄로 압니다.  우리가 신앙 중에 소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바라고,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를 소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할 때, 우리는 비로서 힘 있는 인생을 살아가며, 기쁨과 감사가 있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모든 성도들 다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과 같이 절반은 이런 은혜의 체험을, 축복의 체험을 하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예요.  똑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은데, 어떤 성도들에게는 그에 대한 열매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만, 기본적인 신앙만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과 4절 말씀을 보세요.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라고 했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기본적인 등은 다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다른 그릇에 담겨진 기름은,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만이 가지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등과 함께 기름을  예비해서 가져갔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나 축복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감나무 밑에 가만히 누워서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라는 성도는, 죽었다 깨어나도 은혜 받지 못합니다.  축복받지 못합니다. 
어떤 성도들이 은혜를 받습니까?  은혜의 날을 소망하며 오늘도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성도들이 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어떤 성도들이 축복을 받습니까?  장차 이루어질 큰 축복을 소망하며 오늘도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는 성도들이 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 은혜의 날과 축복의 날은 아무도 모릅니다.  언제 내게 임할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무시로 예배하고, 무시로 기도하는 성도들은, 홀연히 임하는 은혜의 날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고, 홀연히 임하는  그 축복의 날을 감사함으로 맞이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영광스런 인생의 축제를, 즐길 수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신앙의 등의 기름은, 바로 기도와 예배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그릇에, 기도가 마르지 않게 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그릇에, 예배가 줄어들지 않게 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당장에는 그러한 열심이 소용이 없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여겨져도, 주일 낮에 한 번 예배드리는 기본적인 신앙에, 여러분이 다른 공예배도 더 참석하며 예배의 기름을 채워나간다면, 기도도 예배드리기 전에 잠깐 하는 기본적인 신앙에, 새벽 기도회나, 금요기도회에 자꾸 참석하면서 기도의 기름을 채워나간다면, 여러분의 신앙  생활이 침체되어지는 때에, 또는 인생의 위기 시에, 그것이 은혜로 작용하고,  축복으로 역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다 졸며 잘 새” 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얼마나 잠이 왔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와 같은 줄 압니다.  예배를 드려도 좀처럼 은혜로 와 닿지 않습니다.  기도를 해도 좀처럼 응답이 오질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지요.  피곤합니다.  기도를 해도 이제는 잠만  옵니다.  이제는 기도 생활도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납니까?  지금 여러분의 신앙에 기름이 닳아가는 상황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무엇이든 닳아 없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차에 기름을 넣었는데, 한참 달리다 보면 기름 눈금이 어떻게 됩니까? 
내려가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다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몇 년 하다 보면, 신앙의 등불의 기름이 자연히 닳아 없어집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신앙생활의 기쁨과 감격을 상실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신앙생활의 권태기라고도 말 할 수 있는데, 이런 권태기는 누구에게라도 찾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목회자에게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이런 때를 대비해 미리 기름을 준비해 놓는 성도라면, 또는 목회자라면, 결코 주님이 오시는 그날, 홀연히 임하는 우리가 소망하는 은혜의 날에, 축복의 날에, 허둥대다 불을 꺼트리고 축제의 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는, 생기지 않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 11절, 12절 말씀을 보세요.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미련한 다섯 처녀는 나중에서야  기름을 준비해서 주님을 찾아왔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버린 때였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 미련한 다섯 처녀들을 향해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다른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신앙도 자라면서 늘 새로운 은혜를 받는데, 자기만 늘 한결같고 맹숭맹숭 합니다.  다른 사람 기도의 응답을 통해 축복을 받아 간증하는데, 자기만 아직까지 아무런 체험이 없습니다.
“주님 나는 왜 이런 은혜가 없습니까?  주님 나에게는 왜 이런 축복이  임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 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은혜에 해당 사항이 없어.  너는 이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어.” 

왜요?  하나님이 주신 기본적인 신앙의 등 외에, 내가 따로 준비한 또 다른  신앙의 그릇이 있어야 하는데, 그 그릇에 기도의 기름을 채우고, 예배의 기름을 채워 넣으면서, 모자라면 항상 보충하고 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게 하지를  못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기본적인 신앙만 가지고 세월을 보내며, 자신의 신앙이 점차 메말라 가는데도, 점차 그 불이 꺼져 가는데도, 안일하게 지내다가 결국 은혜의 문이 닫히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축복의 문이 닫히고 말았다는 것이예요. 
이제까지 신앙생활 한 것이, 다 헛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어진 예배 시간과 기도 시간에 충실하시길 바랍니다.  예배시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것이, 등에 기름을 채우는 것입니다. 기도 시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것이, 등에 기름을 채우는 것입니다. 주일 낮에만 예배 참석하고, 다른 시간에는 빠지는 것, 올바른 신앙 아닙니다.
부지런히 예배에 참석하십시오.  아멘!!!!  그것이 여러분에게 결국 유익이 됩니다.  그것이 결국 여러분에게 양약이 됩니다. 

시 119 : 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빛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등이 많으면 많을수록 내 인생의 길이 더욱 더 환해지는 것입니다.  그 환한 길을 걸어가는 인생에 실패함이 있겠습니까?  오직 성공만이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벧엘 교회에, 지난 9월 한 달 동안을  기도 강조 기간으로 선포하셨고, 각 성도들마다 자신의 신앙의 그릇에 기도의 기름을 채워 넣을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채워 넣으셨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기도의 기름을 채워 넣은 성도는, 교인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절반은 미련한 다섯 처녀로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10월 한 달 동안은, 하나님이 우리 벧엘 교회에 예배 강조 기간으로 선포하셨습니다.  모든 공 예배를 한 달 동안만큼은 특심을 가지고 힘써  지키고 드리라는 하나님의 요청입니다.  이 요청에 여러분만 아니라, 우리 벧엘 교회 성도 모두가 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이 시간 여러분이  기도해야 할 줄로 압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을 보세요.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오직 그날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징조를 먼저 보여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때를 짐작하게 해 주십니다. 
믿습니까? 그 징조가 무엇입니까?  특별히 말씀을 통해서 강조하시는 부분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성도들은, 그래서 말씀에 민감합니다. 목회자가 강단을  통해서 자주 언급하고, 강조해서 전하는 말씀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순종해야 할 부분이구나 생각하면서, 그 말씀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그 부분을 무엇보다 힘을 쓰게 됩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런 말 있잖아요?  방귀가 잦으면 뭐가 나온다구요?  똥이 나옵니다.
설교 중에 반복되어지는 메시지가 있다면, “내가 이 말씀 붙잡으면 은혜가  임하겠구나.  내가 이 말씀 붙잡으면 응답의 역사가 나타나겠구나.  아멘!! 내가 이 말씀대로 순종하면 축복의 역사가 일어나겠구나.” 

먹구름이 끼어 있으면 곧 비가 내리듯이, 곧 은혜의 비가, 축복의 비가 내릴 줄 알고, 슬기로운 신앙인들은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미리 은혜의 그릇을, 축복의 그릇을 준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남들이 체험하지 못한 새로운 은혜를, 새로운 축복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이런 슬기로운 성도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한 가지를 더 깨달아야 할 줄로 압니다.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개인의 은혜나 축복만 아니라, 교회의 부흥의 역사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줄로 압니다. 

여러분 어떤 교회가 부흥을 이룰 수 있습니까? 
합 3 : 2절에,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와 같이, 오늘 우리 벧엘 교회 성도 모두가, 이런 부흥을 소망하는 줄 믿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흥의 역사가, 아무 교회에나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망한다고 다 부흥할 것 같으면,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다 부흥하지요. 
그러나 어디 그렇습니까?  아직도 부흥하지 못하는 교회가 이 땅에는 천지 빽깔입니다.  부흥이 뭡니까?  수년이 지나도, 아니 수십 년이 지나도 성장도 못하는 교회가 수두룩하다는 겁니다.

왜 그런 교회들이 부흥을 소망하면서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까?
교회에도 하나님이 기본적으로 허락하신 등불이 있는데, 거기에 따로 준비한  기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기본적인 예배만 있고, 기본적인 기도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외에 더 많은 모임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모임이 있어야 합니까?  성경공부 모임이 있어야 합니다. 
전도모임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모임이 있어야 합니다. 
그 외에도 특별한 모임을 자꾸 만들어서 모임을 가지는 교회가, 결국 부흥의  역사를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흥하지 못하는 교회를 보면, 언제나 그게 그겁니다. 
특별한 모임이 없어요.  특별한 프로그램도 없습니다.  모임을 만들어도 모이지를 않습니다.  왜요?  피곤하다는 겁니다.  관심 없다는 겁니다. 
왜 그런 걸 만드는지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이런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은 교회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에 책망을 받은 교회가 어느 교회입니까?
두 교회지요?  하나는 사데 교회이고, 또 하나는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이 교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열정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정이 없습니다.  사데 교회는 이름만 교회지 실상은 죽은 교회였습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교회가 사데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그래도 사데 교회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평가하실 때는 똑같은 교회입니다.  아니 오히려 책망의 수위가 사데 교회보다 더한 것을 보게 됩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했습니다.  굉장히 기분 나쁜 표현 아닙니까?  왜 이런 책망을 들었습니까?  교회가 열정이 없이 미지근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언제나 활기가 넘쳐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떤 모임을 가지든지 적극적으로 모이시길 바랍니다.  형편이 안 되는데 억지로 모이라는 것 아닙니다.  형편이 되는 분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나를 위해 구역예배에 모이고, 성경공부시간에 모이고, 전도모임에 모이고, 기도 모임에 모이는 것 아닙니다.  나를 위한 것 같으면 안 나오셔도 돼요.

그러나 이런 모임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부흥을 위해 우리가 모이는 것입니다. “내가 이 모임에 참석을 해야 다른 사람도 참석할 것이다.”  아멘!!
그래야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고, 두 사람이 세 사람 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이런 교회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바로 한 알의 밀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한 희생과 헌신, 다른 것에서 찾지 마세요.  이런 작은 헌신이  한 알의 밀알과 같은 진실한 헌신인 것입니다.
그러나 모여서 기도하고, 공부하고, 전도하고, 예배하다 보면, 자연히 또 내가 은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또 공동체 속에서 나누며 간증하게 될 때 교회는 더욱 더 은혜로운 교회가 되어져가고, 결과적으로 부흥하는 교회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오늘 새벽에 살펴본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 56 : 10절에,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향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상태로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러면서도 무엇을 꿈꿉니까?  은혜를 꿈꾸고 축복을 꿈꿉니다. 부흥을 꿈꿉니다. 그저 세월이 지나면 자신들이 꿈이 저절로 다 이루어질 줄 아는, 그야말로 어리석은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신앙인입니까?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은 신앙인입니까? 아니면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은 신앙인입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가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까지는 그렇지 아니했다 할지라도, 오늘 이 시간 이후로는 여러분 각 자의 기본적인 신앙 외에, 또 다른 신앙의 그릇을 준비하시고, 그 그릇에 기도와 예배를 부지런히 채워 넣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교회의 부흥을 위해 더욱 더 간절히 기도하시고, 교회의 모든 모임과 행사에 열정을 가지고, 사명감을 가지고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솔선수범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먼저 된 여러분이 행하셔야 합니다.
모든 면에 신앙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가 한 알의 밀알과 같은 헌신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이후로는 모든 모임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고 헌신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개인의 삶에 새로운 은혜와 넘치는 축복을 받아 누리시고, 교회에도 큰 부흥의 역사를 수년 안에 나타낼 수 있는, 축복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벧엘 교회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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