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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따르라 (눅 9:5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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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 리 말

      마태복음 16장 24절 말씀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대학 4년 동안 저의 뇌리를 감싸고 있던 화두의 말씀이었습니다. 우연히 친구로부터 들은 말, "너는 이 말씀의 뜻을 깊이 이해해야 해" 라는 말은 저에게 화두가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너무도 명백했기 때문에 오히려 저에게는 너무도 짐스런 말로 다가왔습니다. 때문에 저는 보다 합리적인 방법으로 그 말씀을 해석하려 했습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말씀이 주어진거야' 생각하면서 제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4년후 저는 이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저에게 진로의 방향을 바꾸는 근본적인 말씀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뒤바꿀 말씀을 주십니다. 그것이 꼭 말씀이 아니라 하더라도, 다른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부름의 신호, 곧 "나를 따르라" 는 신호를 던집니다. 따름의 양태가 주의 종이 되었든지, 아니면 평신도로서 따르는 다른 무엇이 되었든지 상관없이.
     
Ⅱ. 전 개

A. 문제 제기

1. 본문읽기

      예수님의 부르심과 따라감에 관한 말씀이 간단 명료하게 나타나는 곳이 오늘 말씀 마가복음 2장 14절 입니다.

      "또 예수께서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2. 구절풀이

      이 말씀은 너무도 자명합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시다가 세리장인 레위를 부르자 레위가 일어나 좆았다는 내용입니다. 너무도 단순.명료해서 우리 인간들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조금 벅차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단순히 세리장 레위가 그대로 순종했는가? 어떤 상황이었기에 예수님의 부르심에 세리장 레위는 즉각적으로 순종할 수 있었는가?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심리적, 역사적인 방법등을 동원해 그 이유를 찾으려 합니다. 가령 즉석에서 좇은 세리장 레위는 이미 예수를 전부터 알고 있어서 그의 부름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등의 합리적 설명을 통해 이 본문을 좀더 쉽게 받아들이려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런 대답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세리장 레위의 모습은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한 방법으로 뒤를 따라갔다고 하는 행동의 즉각성만을 고수할 뿐입니다. 과연 무엇이 세리장 레위가 자신의 삶의 터전을 박차고 예수님을 따르게 만들었습니까? 세리장 레위의 신앙 고백이 그렇게 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세리장 레위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대로 순종하는 행동을 보여 주었을 뿐입니다.

B. 분 석

1. 본문읽기

      예수님의 부르심과 관계해서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3가지의 반응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오늘 말씀 누가복음 9장 57-62절 속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길을 가고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 그분을 향하여 '당신이 어디로 가시든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다른 사람을 향하여 '나를 따르시오' 하시자 그는 '[주님] 먼저 제가 물러가서 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그러자 그에게 말씀하셨다. '죽은 자들이 자기네 죽은 자들을 장사 지내게 내버려두고, 당신은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알리시오.' 또 다른 사람이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주님. 그러나 먼저 제가 제 집에 있는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를 향해] 말씀하셨다. '쟁기에 손을 얹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나라에 맞지 않습니다.'"
     
2. 구절 풀이

      첫 번째 사람은 따를 것을 예수께 자청하였습니다. 그는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먼저 따르겠다고 나섰고, 스스로 감격하였을 뿐입니다. 그는 먼저 예수님께 나와서 자기가 따르겠다고 자청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첫 번째 사람은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는 말은 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첫 번째 사람에게 얘기해 줄 뿐입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이기적이기 때문에 의도성을 갖고 행동합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 인간은 행동으로 옮깁니다. 첫 번째 사람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영광으로만 보였을 뿐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가신 길은 결국은 승리와 영광의 길이었습니다만, 첫 번째 사람은 그 이전에 있을 고난과 십자가의 길은 생각지 못한 것 같습니다. 승리와 영광의 길은 십자가에 숨겨져 있어서 우리 인간들에게는 결코 보이질 않는 숨겨진 진리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이상의 영역은 오직 믿음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사람은 자신의 이해 타산속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며, 그러면 나에게도 약간의 콩고물이 떨어지겠지 하는 마음에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자청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이 가는 길이 결코 영광의 길, 기쁨의 길이 아님을 말해 주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이 먼저 불렀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사람은 따라가기 전에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유대교에서는 장례를 선행의 극치로 간주하였습니다. 남달리 정결례를 지켜야 했던 까닭에 원칙적으로 문상 가는 일이 없던 제사장들조차 자기 부모.동기.자식의 장례만은 손수 치러야 했습니다. 이것이 유대교의 율법이었습니다. 그만큼 장례를 중요시 했다는 증거입니다. 이는 유교 문화권인 우리나라에서도 잘 볼 수 있는 문화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가기 전에 먼저 아버지의 장사를 치를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르심과 율법과의 충돌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따르겠다고 하면서 먼저 율법을 지키고나서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전에 먼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선순위가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사람은 자신의 전통에 얽매여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일을 하면서도 우선순위를 바꿀 때가 종종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할 때는 우선순위가 뒤바뀌어서는 않됩니다.
     
      세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과 같이 먼저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사람과 다른 것은 자기 쪽에서 조건을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를 따라갈 것을 원하면서도 자신과 예수 사이에 무엇을 끼어 놓으려고 합니다. "당신을 따르겠나이다. 그러나, 우선 이러이러한 조건을 나에게 허락해 주십시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세 번째 사람은 따라가려고 합니다만, 자신의 조건이 이루어져야만 좇겠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이 대부분 여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예수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할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솔직히 예수님을 따르고 싶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문제는 쟁기에 손을 얹고 뒤를 돌아다보기 때문입니다. 이러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면 주여 당신을 따르겠나이다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모습 입니다.

요즘은 확률 시대입니다. 비가 올 확률이 몇%, 안올 확률이 몇%, 사람이 죽을 확률이 몇% 등등. 확률로 따져봐서 가능성이 높으면 실행하고 그렇지 못하면 그만두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확률이 아닙니다. 신앙은 순종 아니면, 불순종인 것입니다. 양자택일중 하나를 하는 것입니다. 확률이 높으면 부르심에 응답하고 확률이 낮으면 응답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지는 못했습니다. 이들은 따를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Ⅲ. 주 제

      그러면, 누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습니까? 누가 따를 수 있습니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민하고 갈등하고 번민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못하여 갈등하고 있는 사람에게 소위 경건하다고 하는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순종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순종할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순종치 않기 때문에 말씀을 들어도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순종치 않기 때문에 그의 은혜를 못 받는 것입니다. 마음 어느 한구석에서 당신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항의하고 자기자신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괴로움은 결국 당신 자신의 죄에서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언뜻 볼 때, 이런 대답은 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양심만 더욱더 죄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이런 신앙 생활은 우리에게 복음이 주는 자유함을 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는 이신칭의의 복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저 완고한 17세기 율법적 정통주의적인 생각에 불과합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의 신앙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율법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과거나 현재의 상황을 무시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를 많이 졌어도, 아무리 우리의 믿음이 연약해도, 예수님께서는 오늘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고 부르십니다.

      문제는, 누가 따를 자격이 있느냐가 아니라 누가 먼저 과감하게 한발을 내디디냐의 문제입니다. 누가 안전한 삶의 터전에서 불안한 삶의 터전으로 과감하게 나오느냐, 누가 먼저 가능성의 세계로 한발을 내디디냐의 문제입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나선다거나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우선순위를 잘못 생각한다거나, 실리를 따져 확률이 높으면 뒤따르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실리를 따져서 75년동안 살던 그 안전하던 고향땅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했을 뿐입니다. 즉각적인 순종만이 복받을 자격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 했을 때 우리가 해야할 것은 즉각적인 순종만이 필요합니다. 단순한 순종만이 필요합니다. 내가 따라야할 자격이 갖추어져 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 아니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따위의 행동은 필요치 않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에는 "예"하고 따라감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순종의 내용이 따로 있습니까? 아닙니다. "나를 따르라!"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 뒤를 따라간다는 것은 철두철미 내용 없는 일입니다. 실현시킬 만한 뜻 있는 프로그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에 따른 댓가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적인 생각에 의하면 가치있는 어떤 내용을 위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따라가기 위한 것 뿐입니다. 버리지 않고는 예수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르는 행동 자체에는 일푼의 가치도 없습니다. 무시와 무의미만이 있을 뿐입니다. 제삼자는 없습니다. 불려 나왔으니 지금까지의 생활을 청산하고 '이리로 나와서' 엄격한 말씀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Ⅳ. 맺 음 말

      성경에서 '나를 따르라' 고 하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인간적인 모든 속박이나 억압, 무거운 모든 짐, 근심과 양심의 고통 등에서 인간을 자유케 하는 부르심이십니다. 이 부르심에 응할 때 인간은 자신의 가혹한 멍에를 벗어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드러운 멍에를 지게 되는 것입니다. 져야 할 멍에를 벗어 버리려는 자에게는 예수의 계명이 가혹하고 무거운 짐이 됩니다. 자진하여 이 부름에 순종하는 자는 무거움을 모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르심 자체가 주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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