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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어도 살아납니다 (요 1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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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털가죽을 가진 호랑이가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한 여인이 그 호랑이와 만났습니다. 그 여인은 태양 아래 반질반질 윤이 나는 호랑이 털가죽에 반해 버렸습니다.
“저 호랑이 털로 몸에 두를 수만 있다면 너무 행복할 텐데…….”
호랑이는 호랑이대로 여인의 적당히 오른 흰 살집을 보며 군침을 삼켰다.
“저 여자를 입에 넣을 수만 있다면 오늘 점심식사는 해결 될 텐데…….”
여인은 호랑이의 윤나는 털가죽이 너무도 간절히 갖고 싶어 호랑이와 의논하여 보기로 했습니다. 둘은 합의를 위해 동굴로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 여인은 소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호랑이도 점심이 해결 되었습니다. 여인이 호랑이 몸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도대체 산다는 게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사는 걸까?

전도서 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참 좋은 것입니다.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은 반드시 죽습니다. 생명 있는 것은 반드시 죽습니다. 그렇다면 산다는 것은 결국 죽기 위해 사는 것 아닌가? 이것은 어느 누구도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렇다면 사는 동안 사람들은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살아 있을 때는 사는 것을 생각해야지, 살아있는 동안에 죽을 거라고 생각하며 어떻게 살겠는가? 그리 말할 겁니다. 그럼요. 살아있을 때 멋지게 살아야지요. 신나게 살아야지요.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죽음 앞에서도 후회 없도록 행복하게 살아야지요.

그런데 문제는, 누구든지 죽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겁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죽으면 그 만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겁니다. 죽으면 그만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호랑이 털 코트 한 번 입어 보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가 아닙니다. 돈 한 번 실컷 써 보고 죽는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다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은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해야 합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당장에 가시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려면 그 즉시로 가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루 이틀을 그냥 계셨습니다.
아마 제자들의 생각, “역시, 예수님도 유대는 두려우신가 보다.” 왜냐하면, 유대에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8절, “유대로 가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제자들의 대답,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그런 걸 보면, 예수님도 유대에 가시는 건 선뜻 내키지 않으신가 보다 그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39, “저희가 예수님을 잡고자 하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시니라”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로 가시기를 꺼려하시나 보다” 그리 생각한 겁니다. “더군다나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다는데도 불구하고 안 가시는 것을 보니…….”
그런데 느닷없이 예수님께서 “유대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유대로 가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서 한 제자들의 물음이 8절,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십니까?”고 되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 “유대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만약 나사로를 살리실 의향이시라면 “베다니로 가자” 그러셨어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어 있는 곳을 베다니니까.
유대는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유대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앞서 예로 든 여인은 호랑이 털로 된 곳을 입고 싶어서 호랑이 굴로 들어갔다지만, 예수님은 굿이 유대로 들어가실 이유가 없으십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도 아니고, 잠들어 있고, 예수님의 말투로 보면 당장 없으시다. 큰일 날 것 같지 않은데…….
그렇다면 꼭 반드시 굳이 가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다니로 가자”가 아니고 “유대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고민, 갈등.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번에 유대로 올라가면 틀림없이 어려움 겪을 텐데……. 만에 하나 죽을지도 모르는데…….”
아마 제자들이 모여서 수군거렸을 것입니다.
“무슨 소리냐? 예수님께서 유대로 올라가시면 무사하실 것 같으냐? 예수님이 만에 하나 무슨 일 당하신다면 우리는 무사 할 것 같으냐?”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님이 유대로 올라가시는 것을 말리자” 그럴 겁니다.
“그렇다고 선생님이 가신다는데 우리가 이러쿵저러쿵 할 수는 없잖아” 그럴 수도 있고, “아니 그럼 죽는 걸 뻔히 알면서도 가야 한다는 말이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의논 하였겠는가를……. 우리들도 어디 놀러 한 번 가는데도 별 생각, 별 이야기가 다 나오잖아요. 하물며 죽을지도 모르는 길, 게다가 꼭 가지 않아도 되는 길을 간다고 할 때 얼마나 생각이 많고 말이 많았겠는가?
그렇게 고민하면 갈등하며 수군거리고 있을 때 디두모라하는 도마가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성경학자들의 주석 중 하나는 도마의 체념적 고백이라는 겁니다.
“할 수 없다. 죽으러 가자” “주님께서 가시겠다 하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할 거냐?” “모든 것 다 팽개치고 여기까지 왔는데 어쩌겠냐? 죽으나 사나 예수 따라 가야지”
또 하나는 도마의 신앙적 고백입니다.
“어차피 져야 할 십자가라면 지자”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피할 수 없는 길이라면 가자” “주님께서 죽으신다면 우리도 죽자”

확실한 역사적 근거는 없지만, 인도 남쪽지방에 가면 “도마교”라고 하는 교파가 있는데 그것은 도마가 그곳 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죽었다고 하여 생긴 교파라고 합니다. 그곳에는 도마를 기념하는 예배당도 있다고 합니다. 인도 사람들은 도마가 인도까지 왔다고 하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하고, 많은 역사가들도 그리한 사실을 인정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도마는 마지막 까지 주님을 위해 산 자요 주님을 위해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백을 누가 했든, 이 고백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는 고백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아멘.
이 고백은 하나님의 때와 시간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복음서를 읽으면서 발견하는 것이 ‘때’라고 하는 단어가 많습니다. “때가 찾다.” “때가 되었다.”
요한복음 2:4,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요한복음 7:30, “저희가 예수님을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음이러라”
요한복음 8: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음이러라.”
요한복음 12:23,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
요한복음 13:1, “유월절 전에 예수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요한복음 16: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다.”
요한복음 17:11,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이 예수님의 때는 모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가 아니라 유대로 가자하신 것도, 실상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가시는 길이 아니고, 하나님의 때에 따라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다니로 가자.” 하신 것이 아니라, “유대로 가자” 하신 것입니다.
다만 가시다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예수 자신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한 죽음인 것을 미리 보여주고, 또한 당신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듯이 죽지 않을 수도 있으나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죽으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때는 어디에 연결 되어 있습니까?
모두 자신의 유익과 자신의 욕심에 연결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계획, 자기의 때를 주장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지 아니하고, 준비도 없이, 자기 욕심 따라 때를 정하고 계획을 만듭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때가 아니라고 하시지만, 우리의 욕심은 오히려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며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고백은 바로 내 계획, 내 때를 고집하는 것을 주님의 때에 맞추자고 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보세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고 예수님을 죽일 수 있었습니까? 사람들 앞에 당당히 서서 말씀하셨지만 아무도 예수님을 잡지 못했습니다. 잡으려 했지만 손도 대지 못했습니다. 아직 예수님의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했으나 유월절 명절이라 혹시 군중들의 소란이라도 날까 싶어서 유월절 명절이나 지나서 예수님을 잡아 죽이자고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그들에게 팔아 넘겨서 유월절 명절 기간에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때와 시간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간의 분량 누가 길게 하거나 짧게 할 수 있는가?
장례식. 장지까지 가는 동안은 조용합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은 웃음소리, 찬송 부르는가 하면 노래까지 부릅니다.  갈 때는 ‘나도 언젠가는 죽을 거야’ 그리 생각합니다. 그러나 올 때는, 그 죽음하고 엄청난 거리가 있습니다. 마치 죽은 사람 묻으며 자기의 죽음도 묻고 온 듯합니다.

어떻든 연세 많으신 분은 대체적으로 우울합니다. 반면에  젊은 사람들은 신이 났습니다. 그럴까요? 나이 순서대로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간대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날 수를 정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내 사는 날 수를 정해 놓으셨다면,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죽음 앞에서 비굴해야 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낮 열두 시가 아니냐?”고 말씀하십니다.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아직 일 할 시간이 충분히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 낮 열 두 시인데도,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벌써 10월. 지난 10달 동안 무엇 때문에 바빴어요? 누구의 일 때문에 바빴어요? 아직 낮 입니다. 시간은 충분해요. 시간이 모자라서 하나님의 일 못한다는 핑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남은 시간이 많다는 것도 아닙니다. 낮 열두시는 새벽보다 더 어둠의 시간에 가까이 있다. 낮 열두시라는 말은 반드시 어둠의 시간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하셨습니다. 허송세월 보내지 말라는 겁니다.
땀 흘리며, 허둥지둥, 죽기 살기로 살았는데 막상 뒤 돌아 보면 “난 뭐하고 살았지?” 그럴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세상의 시간을 살지 말고 주님의 시간을 사십시오. 그러면 1분 1초라도 보람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똑 같이 60년 살았다고 그 삶이 같은 것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은 시간은 신나고 즐거운 시간일 거고, 그러나 빚쟁이나 미워하는 사람과 앉은 시간은 지루하고 답답하고 괴로운 시간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은 신나고 즐거운 시간인줄 믿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입은 시간이요, 영원한 생명을 약속 받은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없는 시간은, 인간적으로 보면 재미있고 신나고 즐거운 시간 같지만 거기엔 주님의 은혜도 없고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사는 동안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난 뭐 하고 살았지?”라고 통곡 할 수밖에 없는 시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때 주님의 시간에 맞추어 사십시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가자.” 아멘.
이 고백은 주님과 함께 죽을 때 또한 주님과 함께 살아난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보려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다’가 무슨 말입니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겁니다.
어떻게?

로마서 6:4-5,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세 생명 가운데서 행하며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 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으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겁니다.

나병에 걸린 아람나라 군대장관 나아만. 그가 엘리사의 사환의 말씀 듣고 기분 나쁘다고 자존심 세워서 화를 내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면, 이스라엘과 아람나라 사이는 엄청 큰 전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자존심 죽이고, 즉 자기 지식 고집, 체면 다 죽이고 말씀에 순종하여 요단강 물에 그 몸을 일곱 번 씻었더니 그 살이 어린아이 살 같이 되었습니다. 깨끗하게 고침 받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스스로를 죽이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믿습니까? 꼭 믿으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이해하든 못 하든, 받아들이든 못 받아들이든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보세요. 예수 힘이 없이 죽으셨어요?
아닙니다. 그분은 천군천사를 동원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열왕기하 6장,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전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 말이 먼저 엘리사를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멀리 있어도 아람 왕이 침실에서 이야기 하는 것까지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엘리사를 죽이려고 말과 병거와 많은 병사를 보내서 엘리사가 머물고 있는 도단 성을 에워 샀습니다. 아침에 엘리사의 사환이 나가 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와 성을 에워싼 것을 보았습니다. 엘리사 찾아가,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그때 엘리사가 사환의 눈을 열어 보게 했는데, 사환이 보니까, 불발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돕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엘리사가 죽었을까요? 살았을까요? 당연히 그 전쟁을 엘리사가 승리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엘리사만도 못 합니까? 본말과 불 병거가 하나님의 종인 엘리사를 지켰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왜 못 지키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시려고 말입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자는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기에 우리 주와 함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죽어야 합니다. 죽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31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날마다 죽을 수 있어요?
그 말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께 쳐서 복종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에게서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시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는 죽음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가 아닌 죽음은 멸망의 죽음 입니다. 예수 안 믿고 죽는 죽음은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가는 죽음입니다. 그것을 계시록은 둘째 죽음이라고 합니다. 영원한 죽음입니다.
예수 믿고 죽는 죽음은 그 죽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나라에서 부활 합니다. 이 ‘다시 살아남’이 전제 된 죽음이 주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따라서 “날마다 나는 죽는다.”는 말은 “날마다 산다.” “날마다 부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바울은 “날마다” 라는 말로 순간마다, 매일, 우리에게 전하는 예수님의 생명과 부활의 능력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매일 죽음의 위기를 맞이하지만, 그때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능력을 체험 하면서 산다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8,(현대어 번역) 바울사도의 생생한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면에서 닥치는 고통에 짓눌리지만 움츠러들지도 쓰러지지도 않습니다. 너무도 어처구하 없는 일에 당황 할 때도 있지만 절망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박해를 받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 하셨습니다. 우리는 얻어맞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달려 나갑니다. 우리 몸은 예수님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부단히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살아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를 통해서 증거 되고 있으며, 나타나고 있으며, 체험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얼마나 멋진 고백 입니까?
우리가 날마다 죽는 체험을 하고 더 나아가 날마다 부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맛볼 수 있다면…….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날마다 당하는 고민, 고통, 염려, 근심 등. 이럴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와 함께 죽으십시오. 그러면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려 주실 것입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주와 함께”
죽음에서의 부활은 그야말로 죽은 뒤만이 아닙니다.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날마다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낮의 의미입니다.
낮은 빛의 시간입니다. 그것은 빛 되시는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입니다. 빛 되시는 주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결코 실족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나, 이제는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어떤 배가 폭풍을 만나 항로를 이탈하였습니다. 높은 파도와 싸우다가 겨우 어떤 무인도에 도착 하였으나 배는 이미 부서져서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승객들은 섬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그들에게는 무인도에서 몇 달 동안 살 수 있는 식량이 남아 있었습니다. 게다가 다행인 것은 그 땅은 비옥해서 씨앗을 심기만 하면 몇 달 후에는 풍성한 식량을 추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씨앗을 심기위해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땅을 파다가 황금 덩어리가 묻힌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했고, 다른 곳에도 황금이 있는가 해서 여기저기 땅을 팠습니다.
몇 달 후, 그들이 찾아낸 황금이 산더미 같이 쌓였습니다. 그런데 그즈음 그들의 식량의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밭에 나가 땅을 일구어 씨를 뿌렸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파종할 시기를 놓치고 만 것입니다. 그들은 산더미 같이 쌓인 황금 덩어리를 바라보며 모두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산다는 게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사는 겁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십시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십시오. 그러면 부활과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죽음과 같은 절망과 염려와 고통에서 건져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십시오. 그러면 날마다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살아 있는 삶을 경험 하실 것입니다.
(이 영 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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