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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더 가까이 (약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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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친밀감이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듣고 쓰는 단어 중 하나는 <웰빙>일 것입니다. 웰빙은 우리말로 <참살이>라고 하는데 저는 그냥 <행복>이라고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제는 무엇을 먹고 사느냐의 문제 보다는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까하는 문제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행복은 생활 전반에 대하여 느끼는 주관적 자기만족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가? 사회학자와 심리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친밀한 대인관계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는 남들이 나를 원하고 받아들이고 함께 기뻐하고 사랑하게 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욕구가 있습니다. 어딘가에 속하고 싶은 이런 욕구를 ‘친밀함의 욕구’ 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다른 사람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며 살고자 하는 끊임없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살면서 우리가 절대 착각해서 안 될 것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고도 괜찮을 정도로 강하고, 재능이 많고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존 던은 “인간은 결코 섬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 관계 속에서만 살아 갈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외로움,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은 홀로라는 느낌일 것입니다.

하나의 섬과 같은 나와 너를 이어주는 것이 <관계>입니다. 관계가 편하면 좋은 사람, 불편하면 불편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행복한 사람은 관계가 좋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이것을 정확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의란 관계의 회복입니다. 곧 옳은 관계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행복했습니다. 관계가 정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늘 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음성을 들을 만큼 친밀했습니다. 둘째는 너와의 관계입니다. 함께 있는 하와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할 만큼 친밀했습니다. 셋째는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아담은 자신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아담은 이 세 가지 관계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행복했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자신에게 한번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인가?”
하나님과 혹시 불편하지는 않습니까? 가 하나님하고 생각하면 의무와 책임감으로 늘 마음이 부담스럽습니까? 가까운 사람 중 지금 만나면 피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까? 자신을 바라 볼 때 불편하지는 않습니까?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십니까? 가끔 관계가 불편하다고 그 관계를 깨뜨리고 혼자 살려고 하시지는 않았습니까? 홀로 사는 것은 인간에게 독이 됩니다. 그것이 인간을 비인간화 시키는 요인입니다. 물론 여기서는 육체의 혼자가 아니라 관계에서의 혼자입니다.

그런데 관계는 한번 맺었다고 늘 있는 게 아닙니다. 꽃이나 나무처럼 늘 관심을 가지고 가꾸고 돌보아야 합니다. 이 관계를 측정하는 기준이 친밀감입니다. 친밀감이란 무엇일까요?

창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 하니라.
내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 주어도 비난받지 않고, 나를 꾸미거나 감출 필요가 없는 사이. 여기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친밀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 사이에 친밀감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좋은 관계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친밀감이 가장 높은 관계는 부부관계 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집에 살고, 함께 밥을 먹고 산지가 수 십 년이 지났어도, 아직 그 속을 다 알지 못해 오해하고 갈등하는 것이 우리들 부부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보면 친밀감이란 오랜 세월 함께 산다고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모태로부터 부모님의 신앙을 물려받은 사람일지라도 강박관념처럼 반사적으로 행동하는 신앙습관, 자동 응답기처럼 흘러나오는 신앙고백 같은, 형식적이고 의미 없는 껍데기들로 치장한 관계라면 그것은 죽은 관계일 뿐입니다.

되돌아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시작 한 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까? 그 오랜 세월만큼 하나님과 나 사이에 친밀감은 얼마나 높아졌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이 자리에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한 마음이 있어서 앉아 계십니까? 아니면 감사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앉아 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예배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아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예배하는 것입니까?

이 시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다른 무엇을 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아버지가 들고 오시는 선물에나 관심을 두었다면 이제는 아버지 자신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대답을 구하셨다면 이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그 현존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래 동안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왔는데도 왜 주님이 가지셨던 그 깊은 친밀감, 연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까요?

2. 친밀감이 없는 것은 게으름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이 너무 어렵고 힘이 든다. 바빠서 시간을 못 낸다, 마음만 가지면 되지 꼭 열심을 내야 하나? 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핑계일 뿐, 하나님과 친밀해 지지 못하는 실제이유는 게으르다는데 있습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인간의 죄는 근본적으로 3가지 뿌리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교만, 둘째는 거짓, 셋째는 게으름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거듭났다고 해서 즉시 뽑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 사는 동안은 계속해서 우리 안에 남아 있습니다.

그 가운데 껌 딱지처럼 줄곧 인간에게 붙어 다니며 인간을 괴롭혀 온 것은 게으름의 문제였습니다. 여러분, 잡초와 채소 둘을 가만히 두면 어느 것이 훨씬 더 잘 자랄 것 같습니까? 열심히 성경 읽는 것과 누워서 티브이 보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쉽습니까? 예배에 참석하는 것과 집에서 쉬며 노는 것 중 어느 것을 더 쉽게 할 수 있겠습니까?

게으름은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본성에는 그런 욕구와 능력이 들어 있기 때문에 노력하고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식대로 사는 것은 노력해서 배워야만 합니다. 정직하고 서로 평화 하는 일은 땀과 눈물과 희생이 들어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겉보기에 늘 편한 길, 쉬운 길, 쾌락을 좇는 길을 선택한다면 하나님의 식, 하나님의 방법대로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높이는 일도 저절로 되는게 아닙니다.
본문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노력하는 만큼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열정, 시간, 헌신이 들어가야 합니다. 믿음이 자라지 않고 하나님과 가까워지지 못하는 것은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니라 <게으름> 때문 이기가 쉽습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시기를 원한다면 먼저 게으름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게으른 사람을 일꾼으로 부르신 적이 없습니다.

3. 그러면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높이기 위해 해야 할 노력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성경은 “죄인들아 손을 씻으라”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려면 손을 씻어야 합니다. 죄의 속성은 있는 그대로를 부끄러워하여 감추고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직하십니다. 정직하다는 것은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반대입니다. 사탄은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지 않고 없다고 하며, 없는 것은 없다고 말하지 않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한마디로 감추고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을 거짓의 아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친구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완벽함이 아니라 솔직함입니다. 둘 사이에 감추고 속이는 것이 있다면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코 완벽함을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어떤 사람도 완벽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인간적인 실수와 잘못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잘못과 느낌에 대해서 솔직했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려 애쓰는데도 안 되는 분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과의 관계가 불편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서툴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과장하거나 학대합니다. 사람들은 남들이 자신에 대해 평가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남들의 평가에 민감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조작하기 위해 자신을 꾸미고 포장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과장하는 것도 문제지만 자신을 학대하고 비난하는 것도 똑같이 문제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허물과 실수를 하게 되면 그런 자신을 거절하고 미워합니다. “내가 예수를 이렇게 오래 믿었는데 아직도 이런 실수를 하다니, 정말 내가 믿음이 있는 건가? 정말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나?” 하면서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다 보면 나중에는 “아무리 믿어도 할 수 없어,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 하며 복음으로 인간이 변화된다는 것 조차도 믿지 않게 됩니다.

우리 신앙생활을 보면 어떤 때는 잘 나가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한 순간 추락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신앙이 잘 자랄 때 도 있지만 어떤 때는 제자리에서 맴돌 때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진정한 나입니까? 그러나 어느 때이든 변치 않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상처, 허물, 실수가 있는 자신과 함께 살지만 죄의 종으로 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무슨 일에 잘못하면 “야, 이거 내가 잘못했구나. 그러나 이 잘못 자체가 곧 나는 아니야, 나는 이럴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 라면서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여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또 누가 나를 칭찬하면 그것 때문에 교만해지지 말고, “하나님, 못난 죄인이지만 붙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지팡이일 뿐 저를 끌고 다니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잖아요.” 그렇게 고백하시고, 그러다 또 누구의 비난을 받게 되면, 기분 나빠하거나 열등감에 빠지지 말고 “괜찮아, 그 사람은 그렇게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잖아. 내가 비록 못났어도 하나님이 받아 주시고 구원해 주셨잖아.” 그렇게 고백하면서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보시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의 현주소는 내 행동에 달려있는 것도 아니며, 남들의 평가에 달려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나를 사랑으로 용납하시고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가치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며 받아 주신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으면 결코 자신을 과장하거나 열등감에 빠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은혜의 공간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잘라낸 존재가 아닌 자신의 그림자를 그대로 갖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평생을 자신의 그림자와 함께 동고동락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 그림자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게 되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은혜의 공간에 설 때만 자신을 사랑으로 보듬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순종할 때 친밀감이 쌓입니다.
순종이 왜 중요할까요? 순종은 두 사람 사이에 얼마나 신뢰가 쌓였는지를 보여주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그 곳에서 예수를 만난 <찰스 콜슨>이 간증 집회 도중에 기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왜 닉슨을 도왔습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모두들 당황해 하고 있을 때 <콜슨>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닉슨은 내 친구입니다.” 그 때 사람들이 와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습니다. <콜슨>은 친구를 믿었기 때문에 그 일이 잘못되어 가는 줄 알면서도 가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죄 값을 치루면서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친구가 부탁하면 도둑질이라도 같이 하라는 말인가? 라고 하시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배울 것은 진정한 친구의 우정입니다. 내가 불리해도 끝까지 친구를 믿어주는 믿음입니다. 비록 불신자였지만 자신의 지위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들어가는 대가를 지불하는 한이 있어도 친구와의 관계를 지킨 콜슨에 비해,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으면서도 우리는 어떤 대가를 지불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키려 애쓰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15:14)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려면 내 인생에 어떤 상황, 어떤 시간이 닥치더라도 주님에 대한 믿음은 변치 않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어 드릴 때, 손해가 따르고, 고난이 따르는 데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온전히 믿어 드릴 때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주님이 오늘 나의 믿음을 보시면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부끄러워하실까요? 주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을 한번 내어 놓아 보십시오. 믿음을 알아보는 방법은 쉽고 간단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진짜 믿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순종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의 순종을 보며 그 사람 믿음이 있구나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여 믿습니다. 철야하며 외쳐도 순종이 없으면 거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아닙니까? 그에게는 당연히 순종이 있었습니다.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해되지 못했지만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은 믿었습니다. 그 순종을 보시며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생명보다 더 귀한 독자 이삭까지도 포기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였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가 죄의식 때문에 또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순종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죄에서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에 대한 감사와 사랑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결코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사람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나를 위해 독생자 아들까지 포기하신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을 안다면 어찌 순종이 부담이 되고 의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나오실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마3:17)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30년을 도대체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길래 그토록 아버지를 기쁘게 하셨을까요? 성경은 그 30년의 예수님의 삶을 단 한 구절로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눅 2:51절/ 예수께서 내려 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며 사셨던 30년의 세월을“순종하며 사셨다”라는 두 단어로 요약한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할 거야” 그러면서 현재 생활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은 하찮다고 순종을 미룹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몇 년에 한번 하는 순종보다는 비록 사소하거나 작을지라도 일상생활에서 순종하는 것을 더 중히 여기십니다. 위대한 기회는 일생에 한번 올까 말까 하지만, 작은 기회들은 언제든지 우리 주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순종하는 만큼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립니다.

결국 매일의 순종이 쌓여야 일생에 단 한번 밖에 없는 위대한 순종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어제와 오늘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내일도 순종하지 못합니다. 순종은 연습해서 되는 것입니다. 용서하라는 말씀도, 사랑하라는 말씀도, 공과 의를 행하라는 말씀도 작은 일부터 그리고 자꾸 연습하다보면 언젠가는 할 수 있게 되는 법입니다. 순종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처음부터 척척 용서가 되고 사랑이 되는 게 아닙니다. 한번해서 실패하면 두 번째 도전하고, 두 번째도 실패하면 세 번째 다시 시작하고.... 순종은 연습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순종이 어려운 것은 우리의 본성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원래 내 안에는 없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종은 저절로 안 됩니다.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순종하려면 밖으로부터 그 능력이 들어와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입니다. 성령을 받아 성령의 능력을 의지할 때 비로소 순종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성령에만 맡겨서는 안 됩니다. 순종하려는 내 의지와 노력이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기를 원하십니까? 더욱 친밀해 지기를 원하십니까?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친구로 인정해 주십니다.

셋째로 하나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본문은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단 마음은 순수한 마음, 성결한 마음입니다. 마음 하나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지 조각을 내어 하나는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는 내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혼합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면 마음이 한 가지 색깔이어야 합니다.

암 3:3에 두 사람이 의합하지 않으면 어찌 동행할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마음이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마음으로 같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의롭다는 것은 옳음입니다. 옳음이 있어서 틀림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기준이시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지식이나 논리에 동의하는 것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가 살던 이전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식, 하나님의 방법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 것은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연습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시간과 공이 들어가야 합니다. 어찌 단 시일 내에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내 식과 내 마음대로 하고 살면서 하나님과 가까운 척, 하나님을 너무나 잘 아는 척 오래 동안 사람들과 하나님을 속여 오지는 않았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되면 하나님의 가치관과 같아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나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이 하찮게 여기는 것을 나도 하찮게 여깁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면 나도 미워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나도 기뻐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사사건건 하나님의 가치관과 충돌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자이시기 때문에 살아있는 서로가 계속해서 만나고 이야기하고 함께 하면서 관계는 살아있고 친밀감이 쌓여갈 수 있습니다. 많이 만나서 이야기할수록 그리고 오래 함께 지낼수록 더욱 가깝게 되고 마침내 두 사람은 연합하게 됩니다. 친밀감의 절정에서 <연합>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을 나누는 자리에서 이런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해주십시오.” (요한 17: 21) 예수님이 그 고통스런 십자가를 질 수 있었던 것은, 빗장처럼 굳게 잠긴 아버지의 침묵 앞에서도 순종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아버지와의 깊은 친밀감, 죽음조차도 끊을 수 없는 연합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원하는 만큼,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해 지는 것은 우연이나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선택이며 노력입니다. 이제부터는 주일 낮 예배만 드리지 말고 수요 예배도 드리고 한 주일에 한번은 새벽기도회 날로 정해보고, 하나님의 일에 구경꾼만 되지 말고 교회가 부탁하면 내 것을 드려 순장도 해보고, 뷔페에도 나가보고 이러면서 하나님과 친밀해 지지 않겠습니까? 어떤 관계도 노력과 희생 없이 발전하는 관계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냥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관계로 만족하며 살다가, 시련을 만났을 때 당황하지 마십시오. 시련은 영적 무기력함에서 우리를 일으키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씨 에스 루이스는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다’ 고 했습니다. 보통 때 말해서는 듣지 않다가도 감당할 수 없는 큰 환란과 역경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십시오. 자신을 과장하거나 학대하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는 부어지며, 비로소 자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나의 가치는 내가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 그 사실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어 드리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는 늘 순종이 따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믿음도 사랑도 헌신도 거짓입니다. 오늘의 순종이 내일의 순종을 낳고, 작은 순종이 쌓여 일생에 한번 밖에 없는 위대한 순종을 만듭니다.

하나님과 연합하십시오. 두 마음을 버리십시오. 단 마음으로 주님을 섬겨야 평생을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감해 지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세상에서 모든 관계는 끝이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영원히 지속될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어떤 일보다 하나님을 더 알기를 원합니다. 어떤 것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구합니다”
(권 영 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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