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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브낫 바네아 (창 41:37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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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 요셉의 환경을 생각한다면 죽는 편이 훨씬 나은 사람입니다. 요셉에 대하여 시편 105편 17-19절에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계속되는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자기 조절(self-regulation)의 능력을 상실하지 아니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단 한번이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아니했습니다. 만약 요셉이 욥처럼 동시다발적으로 환란이 임했다면 그 짧은 시간에 원망할 시간도 얻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긴병에 효자 없다는 옛말이 있듯이 요셉이 당한 고통은 13년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되는 환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지 아니했습니다.
요셉은 꿈을 해몽해 주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모세나 엘리야처럼 능력을 행하고 기적을 보여준 사람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다윗이나 솔로몬처럼 성전을 짓거나 지혜가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예언자나 선지자들처럼 백성들에게 위대한 메시지를 전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의 제일 많은 분량이 요셉에 관한 기사라고 하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형제들의 시기로 인하여 애굽에 노예로 팔려온 사람입니다. 애굽 천지에서 혈혈단신으로 의지할 데 없는 그가 우리가 아는 대로 약관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애굽의 바로로부터 {사브낫 바네아}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세상의 구세주, 생명의 부자라는 뜻입니다.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어 세상의 구세주라는 이름을 애굽의 바로로부터 얻게 된 것은

Ⅰ.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9장 2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3절에도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39장 21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39장 23절에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요직인 시위대장 집에 팔린 사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러나 보디발이 요셉을 사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요셉의 준수한 용모와 총기 있는 눈빛 등으로 그 당시 고관대작 가문에 품위를 더해줄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의 형통을 위함입니다. 요셉을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은 신정왕국 건설을 위한 의도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보디발이 보니 요셉이 믿는 여호와가 분명히 그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정도였습니다.

마침내 애굽의 실세 중 한사람인 보디발이 자기 소유를 모두 그의 손에 위임할 정도로 요셉은 절대적 신임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 9-19절에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고 했습니다.
보디발의 처가 요셉을 유혹할 때 창세기 39장 9절에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있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도 예외는 아니지만 특히 남의 아내를 범하는 것은 큰 악입니다. 그것은 한 가정을 파괴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동침하자고 할 때 요셉이 그의 옷을 그 손에 버려두고 도망했습니다. 그녀는 그 옷을 증거로 삼아 적반하장 격으로 요셉이 자기를 간음하려했다고 거짓으로 자기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요한 1서 5장 18절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남편은 요셉을 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가둔 그 옥은 일반 죄수들이 수감되는 곳이 아니라 왕의 죄수를 가두는 궁중 옥에 해당되는 곳이었습니다.

Ⅱ. 하나님의 신에 감동받은 계시의존사색(啓示依存思索)의 사람이 기 때문입니다.

본문 41장 38-39절에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이방에서 잡혀온 종과 죄수에 불과했던 요셉이 애굽이라는 대국에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로의 '이 모든 것을'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된 모든 것, 즉 요셉과 관계된 꿈에 대한 일들이 현실로 나타난 일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바로는 요셉이야말로 그가 믿는 하나님이 그에게 보이셨기 때문에 너에게 명철과 지혜가 있었다는 고백적 찬사를 했습니다. 실로 요셉은 꿈의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꿈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즉 그는 일찍이 꿈을 통해 그의 미래에 대한 계시를 받았고(창 37:5-9) 그로 인해 애굽에 팔려오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제 두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줌으로써 장차 바로에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바로의 꿈을 해석함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창 41:14, 41).

그가 꿈을 통해 받은 계시는 성취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특별 계시(特別啓示)가 완성되지 않았던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종종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기 위한 방편으로 꿈을 사용하기도 하셨습니다(창 15:12-16;28; 민 12:6; 욜 2:28).
특별히 바로왕의 두 관원장에 관한 꿈은 요셉이 꿈을 해석함에 있어 결코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여 사실을 숨기지 아니하고 성령에 의해 감동받은 사실대로 해석했습니다.
그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의 뜻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었던 요셉입니다. 그가 성경에서는 특별히 무슨 웅변적인 데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생활 속에서 배어 나오고 있습니다. 요셉을 세상의 구주라고 한 것은

Ⅲ. 하나님의 예언 성취를 위한 섭리적 삶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5장 13-16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라고 했습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세운 횃불 언약입니다(창 15:17). 하나님은 아브라함 자손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즉시로 주시지 않고 400년이 지난 다음에 정식으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숙한 신앙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은 언약은 성취되어야 하는 언약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바로의 꿈 내용은 미래의 일을 꿈을 통해 드러낸 하나님의 특별 계시(特別啓示)였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은 그가 특별한 존재이거나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를 통해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시고 마침내 구속의 경륜(經綸)대로 야곱 일가를 애굽으로 불러들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방편으로 애굽 왕 바로를 일시적으로 사용하신 것뿐입니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25-31절) 근동 지역 전역에 전기 7년간 연속 대풍년과(47절), 후기 7년간 연속 대흉년이 닥쳤습니다(54절). 그러나 요셉은 그에 대한 만반의 대책을 세우고 차질 없이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했던 것입니다(48, 49, 55-57절). 요셉은 흉년을 대비하여 풍년어간에 흉년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말로만 하는 지도자는 아닙니다.
실로 요셉은 어린 시절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였습니다. 노예 시절 보디발의 집에서나, 죄수시절 감옥에서도 변함없었습니다. 그리고 총리가 되어서까지도 변함없이 주어진 상황과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하고 신실한 자였습니다.

한편 요셉은 권좌(權座)에 오른 이후에도 결코 하나님을 잊거나 우상 종교에 동화되는 세속적 삶을 살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철저한 여호와 신앙으로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은 애굽에서 낳은 두 아들의 히브리식 이름과 그 의미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50-52절).
요셉은 과거의 모든 아픔과 고통을 '잊게 해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위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잊어버림'이란 뜻)'라고 지었습니다. 먼 이역 땅에서도 자신의 삶을 '창성케 하신'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차자의 이름을 '에브라임('창성함'이란 뜻)'이라 지었습니다. 두 아들의 이름을 감안해 볼 때 이것은 지난날의 요셉의 뜨거운 신앙 간증입니다.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축복의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을 세상의 구주라고 한 것은

Ⅳ.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론적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5장 8절에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바로가 자신을 애굽의 주(主)로 세웠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애굽으로 보내신 분도, 바로의 아비를 삼으신 분도,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신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파란만장한 요셉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비유되는■것은 성경적 요구입니다. 요셉은 이스라엘(야곱)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 옷을 지어 입혔습니다(창 37:3)

요셉의 채색 옷은 ①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입힌 것과 무관 하지 않
습니다(창 3:21). 신약에 와서 ② 빛의 갑옷 (골 13:12) ③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롬 13:14) ④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⑤ 전신 갑주를 취하라(엡 6:13) ⑥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 3:12) ⑦ 흰옷(계 3:4,5,18, 4:4) ⑧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⑨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고 했습니다(계 19:8).

이러한 성경은 계시의 점층(漸層)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깊은 개연성(蓋然性)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마 3:7, 17:5).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받았습니다(창 37:3).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움을 받았습니다(마 12:14, 요 5:18). 요셉도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창 37:4, 8, 11).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배반당하고 마침내 이방인의 손에 넘겨졌습니다(마 26:4-27:2). 요셉도 형들에 의해 미디안 족속 상인에게 넘겨져서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창 37:18-36).
예수님은 은 30에 팔렸습니다(마 27:3-10). 요셉은 은 20에 팔렸습니다(창 37:28).
예수님은 사단에게 시험을 받았으나 곧 물리쳤습니다(마 4:1-4). 요셉도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으나 그 유혹에서 벗어났습니다(창 39:8-18).
예수님은 고난 받으신 후 높아지셨습니다(빌 2:9-11). 요셉도 고난 뒤에 높아졌습니다(창 41:37-46).

예수님은 이방인 신부(교회)를 취하셨습니다(엡 2:11-19, 5:22-32). 요셉도 이방인의 아내를 취했습니다(창 41:45).
예수님은 회개하는 자들을 용서하셨습니다(마 18:21-35). 요셉도 뉘우치는 자신의 이복형들을 용서했습니다(창 45:1-15).
예수님은 온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십니다(계 19:16). 요셉은 온 애굽 백성을 다스리는 주가 되었습니다(창 41:46-57, 47:20-26). 이렇게 성경은 요셉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시해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의 사랑과 인간적 고뇌와 최후 승리 사건의 진행과 마침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로 마감되어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친구라고 하셨습니다(요 11:11, 15:13, 14, 15). 그 예수는 세상의 구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구원과 땅에서의 부요를 받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현대판 사브낫 바네아들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했습니다(요 16:33).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 1:24).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빌 4:13). 예수님은 부요의 원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의 구주가 되고 우리가 세상의 부요라는 말이 가능한 가 그 속성상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땅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인간을 포함해서 그 어떤 피조물에도 해당될 수 없습니다. 다만 세상의 구주가 되시고 세상의 부요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복음의 핵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브낫 바네아의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리고 사브낫 바네아의 실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데 있습니다. 믿음은 복음을 들음에서 나고 복음을 전하는 자가 없이는 들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우리의 존재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은 곧 구원과 등식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 복음 안에 영육의 부요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사브낫 바네아}라 칭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주요 그는 세상의 부요이기 때문입니다. - 아멘 -
(강 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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