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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 여호와의 그 모든 은택을 잊지말라 (시 103: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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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이 추수감사절은 17세기 영국의 제임스 1세와 촬스 2세에 이르는 100여 년 동안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심한 박해가 영국을 휩쓸었을 때
개신교도들인 청교도(Pilgrim Fathers) 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1620년 9월 2일 신대륙인 현재의 미국으로 이주하여 첫 수확을 하나님께 바친 것에서부터
비롯된 행사입니다.

이러한 추수감사절 행사는 일찍이 우리 나라에서도 비슷한 것이 있었는데
고구려의 ‘동맹’이나 부여의 ‘영고’나 예의 ‘무천’
혹은 신라의 ‘가배’ ‘한가위’라는 행사가 추수감사절과 비슷한 행사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사들도 다 일종의 추수감사절과 비슷한 행사라 볼 수 있겠지만
이것들이 기독교의 추수감사절과 다른 것은
이것들은 삼위일체 하나님과는 무관한 하나의 샤마니즘적인 행사인데 비하여
기독교의 추수감사절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행사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기에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1864년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인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11월 4째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명명(命名)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경건한 우리 조상이
    이 아메리카 땅에 감사의 씨를 뿌린 그 신앙을
    만대에 계승하기 위하여 이 날을 국가 축제일로 정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375년 전인 1620년 9월 2일
남자 78명 여자 24명 도합(都合) 102명은 영국 웨일즈 남단 플리머스(Plymouth) 항구에서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 도착하게 됩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먼 바다를 건너간 청교도들은
신대륙에 도착하자마자 맨 먼저 도착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그 다음엔 성전을 세우고 그 다음에는 학교를 세운 후
자기들이 사는 집은 맨 마지막에 세웁니다.

그리고는 낯선 이국땅에서 열심히 살아보려고 일은 시작했지만 그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그들이 신대륙에 도착한 때는 가을이라, 날씨는 점점 추워왔고
또 겨울 준비도 제대로 되지 못하였기에 너무나 고생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수십 명이 병에 걸려 죽고 맙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망망대해를 건너 이국 땅에까지 와서
농사도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땅에 묻은 가족들의 마음은
이루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또 어찌할 수도 없었습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된 어느 날
천사가 보냈는지 어떤 인디안 청년이 그들을 찾아오게 됩니다.
그리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끝에 옥수수, 콩, 밀, 보리의 종자를 주면서
경작하는 방법을 알려주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농사를 시작하게 되는데
열심히 농사를 지어 그해 가을엔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온 이후
첫 수확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니 그들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들 모두 마음 속엔 기쁨이 넘쳤으며 얼굴엔 웃음이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물론 씨도 그들이 뿌렸습니다. 거름도 그들이 주었습니다.
노력도 일년 내내 그들이 했습니다.
그러나 가을이 되어 풍성한 열매가 맺힌 것을 보면서
그것은 노력의 산물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 모든 수확은 다 하나님의 은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맨 처음에 그들에게 옥수수, 콩, 밀, 보리의 종자를 준 인디언 족을 초청하여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는 예배 후에 야생 칠면조와 팬케익(Pancake)도 굽고 함께 큰 잔치를 나누게 되는데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시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하나님 앞에서 감사의 진정한 의미와 본질을 되새김질 하기 위하여
시편 103편을 본문으로 택하였습니다.

또 제가 왜 이 시편 103편을 본문으로 택하였는가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누구시며 우리는 또 누구이며
감사는 무엇이며 찬양은 무엇인지, 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해야 하는지에 대한
원론적이면서도 아주 중요한 부분들을 말씀하여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1-2절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오늘 말씀은 내 영혼 뿐만 아니라 내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성이든 감정이든 영혼이든 무엇이든지 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호를 송축해야만 한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마땅히 송축해야만 하는 이유를
1차적으로는 3-5절에서 개인적인 이유에 대하여
그리고 2차적으로는 6-18절에서 공동체적인 이유에 대하여 2번 나누어 말씀하시는데
먼저 3-5절에 기록된 1차적 이유 개인적인 감사이유 개인적인 송축이유에 대한 말씀입니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이 내용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성호를 송축해야 할 개인적인 송축이유를
크게 3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죄의 은총 때문에 여호와의 성호를 송축해야 하며(3절)
둘째는 건강을 지켜 주심에 대하여 송축해야 하며(3-4절)
셋째는 우리의 소원을 만족케 하여 주셨음에 대하여(5절) 송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3가지를 보면 오늘 설교 제목처럼 여호와께서 그동안 개인에게 내려 주신
그 모든 은택 때문에... 여호와의 성호를 송축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이 3가지는 모든 개인에게 적용되는 근본적인 송축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감사라... 볼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고민의 깊은 원인은 다 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며
또 모든 불평과 불만, 감사치 아니함이나 원망의 깊은 뿌리도
다 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오늘 우리는 추수 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 각자를 돌이켜 보면서 이러한 측면에서의 감사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죄악을 사해 주셨음에 대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시어 저를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죄사함과 구원을 얻게 하심에
마음 깊은 곳에서 부터 감사와 송축을 하나님 아버지께 올려 드릴 수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건강과 안전에 대하여 감사하고 송축하고 있습니다.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고...
 
오늘 본문은 103편 표제에 나타나 있듯 다윗의 시로서
다윗은 한평생 살아온 자신의 생애를 돌이켜 보며
이렇게 진심으로 건강과 안전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는데
우리도 이 점을 본 받아야만 하겠습니다.

  금년 한해동안 나의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심에 감사드리오며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워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옵나이다....

금년 한해를 돌이켜 보십시다. 얼마나 위험한 순간들이 많았습니까?

우연으로만은 그냥 넘겨버릴 수 없는 사건들의 뒤안길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이 있었던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처럼 감사하며 고백하고 여호와의 성호를 송축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자신의 소원을 만족케 해 주셨기 때문에 감사하며 송축하고 있습니다.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소원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큰 소원이든 작은 소원이든 소원이라는 것은 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한해를 돌이켜 보면 그 여러 소원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가운데
만족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표현이 참 좋습니다.

우리의 소원이 다 이루어졌다는 말이 아니라...
소원이 이루어진 것도 있을 것이고 이루어 지지 않은 것도 있을 것인데
중요한 것은 그 소원들이 일단 만족케 되었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다윗도 지난 날을 회고해 봅니다.

사울 때문에 죽을 고비를 얼마나 많이 넘겼습니까?
자기를 잡으려고 군사들을 풀어 수색하질 않았나!!
직접 자기를 죽이려고 창을 던지기도 하고 칼로 위협하질 않았나!!
생각해 보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힘든 한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정말 힘들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지나간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소원을 만족케 해 주셨고
자신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길로 인도하시고 축복의 길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어떤 사람은 남편을 전도하기 위하여...
어떤 사람은 아내를 전도하기 위하여...
어떤 사람은 부모를 전도하기 위하여...
수많은 오해와 핍박을 받으며 지내왔는데
지금와서 지난 날을 생각해보니 다 꿈만 같고
그땐 그렇게 힘들었지만 지금 와서 결산해 보니
다 나의 소원이 이루어졌고 만족케 된 것을 보면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성호를 송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내 인생 내가 사는 것 같지만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인도하시며 나를 간섭하시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도우셔서 다 되게 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시편 121:1-2).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다음 6-18절에서는 우리가 여호와의 성호를 송축해야 할 공동체적인 송축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6-18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고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며 행하는 자에게로다.

이 내용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성호를 송축해야 할 공동체적인 이유를
크게 3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선조 이스라엘 백성을 430년 동안 압박 받으며 종살이 하던 애굽 땅에서
    출애굽 시켜 주셨음에 대하여 여호와의 성호를 송축해야 하며(6-7절) 
둘째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벌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성호를 송축해야 한다는 것이며(8-14절)
셋째는 연약한 인생의 실상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 분을 경외하고 언약을 지키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에(15-18절)...
    여호와 하나님의 성호를 송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3가지를 보면 또 오늘 설교 제목 처럼 여호와께서 그동안 공동체를 향하여 내려 주신
그 모든 은택 때문에... 여호와의 성호를 송축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이 3가지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
교회공동체나 사회공동체나 민족공동체가 여호와 하나님의 성호를 송축해야할
가장 기본적인 작은 것에서 부터 큰 것에로까지 다 포함한 감사라... 볼 수 있겠습니다.

먼저 6-7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사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 민족 위에도!!
똑 같이 적용되는 귀한 말씀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36년동안 일본의 압제 밑에서 신음하던 이 민족 위에 해방의 은혜를 주신 것!!
그것이야 말로 6절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신 것이며
압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절을 맞이하여 공동체의 이런 일을 회상하며
감사하며 여호와의 성호를 송축할 수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다음 8-14절 말씀을 보면 공동체의 죄악을 물론 기뻐하시지는 않으시지만
그렇다고 당장 징계하시고 징벌하시지는 않으신다는 것인데
사실 그래서 이 사회가 그렇게 부패하고 잘못되어 있지만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시면서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감사해야 하며
또 여호와 하나님의 성호를 송축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8-9절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고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도다.
 
또 14절 말씀입니다.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다음 15-18절 말씀은 공동체를 향한 가장 원론적이면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 생각되는데
그것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어떻게 임하는가에 대한 말씀으로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이점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성호를 송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종교가요 기도의 사람인 윌리암 로우(William Law, 1686-1761)의 일화(逸話)입니다.
그는 인생에 있어서 만족과 행복을 가장 빠르게 찾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고는
그 정답이란.. 모든 일.. 모든 사건.. 모든 상황.. 즉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데 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인생의 행복과 만족을 찾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사람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났든지 그 사건에 대해서
  무조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얼른 보기에는 불행한 재화(災禍)같이 보이는 사건이라도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다..보면
  그것이 도리어 축복의 결과가 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인(聖人)이라고 하는 사람을 보면...
  기도를 특별히 많이 하는 사람도 아니고
  금식을 자주 하는 사람도 아니고
  구제품을 많이 내어주는 사람도 아니고
  절제를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의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성인(聖人)이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항상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고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자기도 하려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무슨 사건이든지 다 하나님의 선의(善意)로 받아들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감사에 대하여 유명한 말을 남긴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데 그 중 몇분의 말을 생각해보면
죤 밀러(John Miller)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가는 그의 감사의 깊이에 달려 있다”....
정신과 의사인 후치다는... “하루에 1만번씩만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며 산다면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이 자신의 병도 치료해줄 것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불평과 불만, 원망과 저주라는 것은 모든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감사는 인간의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특효약이 될 수도 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임 정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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