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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행 17: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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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2차 전도 여행은
유럽의 관문 빌립보를 거쳐 데살로니가, 베뢰아를 거쳐
당시 헬레니즘의 산실이요 문화와 예술과 철학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아덴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아덴 전도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전도계획과 방법을
오늘 우리도 본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아덴 전도가 우리에게 주는 전도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핍박 때문에 베뢰아에서 급히 아덴으로 왔습니다.
그곳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는 중에 아덴 도시를 돌아볼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서 아주 기막힌 광경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아덴이 어떤 도시입니까? 아덴은 지금 아테네를 말합니다.
이 아덴은 고대 헬레니즘 세계의 문화와 예술과 교육의 중심지로
많은 석학들을 배출한 명성 높은 도시였습니다.
역사적 유물에 의하면 주전 4,5세기경에 이룩한
조각, 문학, 예술, 수사학은 이미 세계 최고에 이르렀던 터였습니다. 이 도시는 소크라데스, 플라톤의 출생지요
아리스도텔레스, 에피쿠루스, 제논의 제 2의 고향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세계적 철학인의 산실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도성에서 사도 바울의 눈에 거슬린 것은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온 성에 가득한 우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유대인의 회당도, 여러 학파의 철학자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아덴 사람들을
우상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주지도, 또 그 늪에서 건져주지도 못했습니다.
아덴은 인간의 기준으로는 문명한 도시였으나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매우 어둡고 기만을 당하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아덴 전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문화와 철학과 예술이 발달된 곳일수록 우상과 미신이 많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발달하면 미신이 없어질까요?
예술이 꽃을 피우면 미신이 없어질까요? 아닙니다. 더 많아집니다.
우리는 신비를 초지식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최고의 지성은 최고의 미신과 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일본을 보면 이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2>
일본이란 나라는 첨단 과학이 이끌고 가는 나라이면서도
미신과 우상의 구덩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곳곳에 사당을 지어 놓고 왠 축제가 그리도 많은지
일본에 우상이 800만 개 이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상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럽에 가보면 지금 우리나라도 T.V 체널이 많아졌지만
아직은 점치는 체널은 없지요
유럽에 가보면 점치는 체널이 아주 인기가 있는 것 있지요
선진국 중에 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이라는 나라 보세요
물질문명 속에 온갖 범죄의 온상, 도덕적인 타락
뉴에이지 운동, 록 음악 사탄숭배 등이 꽉 차 있습니다.
이것은 역설 중에 역설입니다. 그러나 아덴이 바로 이런 곳입니다.
한 번 보세요. 공장에서 최첨단 장비를 들여다 놓고
돼지 머리 갖다 놓고 고사지내는 모습 얼마나 아이러니컬합니까?
그러니 우상이라는 것은 미개한 나라의 전유물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전유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아덴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양면 작전을 세웠습니다.
그는 회당에서는 유대인들과 경건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 시장에 나가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노를 느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거룩한 분노를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진짜 분노는 못 내면서 쓸데없는 일에 너무 화를 잘 냅니다. &nbsp;&nbsp;&nbsp;&nbsp;
왜? 이 땅에 죄가 없어지지 않는가?
그것은 죄를 보면서 분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역사를 보면서도 분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 하고 상관없으면 그냥 덮어두고 넘어가는 무관심 때문입니다.
바울은 분노를 느끼면서
시장 거리에 나가서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을 했습니다.
여기에 변론을 했다는 말은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죄와 사탄의 세력에 분노를 느끼며
저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인터넷 안티 기독교 사이트에 들어 가보면
정 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소위 도시락 사들고 기독교에 대하여 악을 쓰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바로 사탄의 계략인 것입니다. 여기에 말려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시내에 나가서 변론하는 가운데 철학자들과 변론을 하게 됩니다.<3>
세상 철학과 복음이 어떻게 다릅니까?
18절에 [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 쌔 ]
그 당시 아덴은 매우 철학적이었습니다.
특히 두 철학 학파가 그 도시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에비구레오 즉 현대어 발음으로는 에피쿠로스(Epicurus)학파로서
에피쿠로스는 주전341-270년에 생존한 그리스의 쾌락주의 철학자로서
그 추종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는 쾌락을 인간의 최고의 선으로 여기며 가르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스도이고는 현대어 발음으로는 스토아(Stoic) 학파라 해서
주전 336-260년에 생존한 제노(Zeno)에 의해 주창된
아덴의 금욕주의 철학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는 금욕을 인간의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며 가르친 사람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범신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 철학에서는 신화를 빼고 나면 이야기가 안 됩니다.
이 두 다른 학파의 철학자들이 바울과 쟁론하는데 비상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이야기가 그들에게 매우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변론에는 저들의 철학에서는 전혀 볼 수도 듣지도 못한
새로운 인생관과 구원관이 담기어져 있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바울의 이론이 이단 같기도 하고
이방의 신을 전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18절 하반 절을 보세요.
[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
바울은 특별히 예수님의 부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당시의 에피큐리안들과 스토아 철학자들,
그리고 경건한 유대인들이 삶의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온갖 우상들을 섬기며 방황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내세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복음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합니까?
결국 우리가 내세를 참으로 믿는다면
물질, 쾌락, 지식을 대하는 자세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말을 들은 어떤 사람은 바울을 가리켜
[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 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시골 약장수 같이 입만 살은 것이 무슨 말하려고 하느냐?
그것은 저들의 변론이 딸리기 때문에 억지를 쓰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배우게 되는데 <4>
그것은 복음은 세상의 철학과 종교와 견해를 전혀 달리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교와 철학은 모두가 비슷해지기를 원합니다.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나 불교에도 구원이 있고
천리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철학과 종교가 기독교에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같이 착한 일을 하자,
같이 부정부패를 막자, 휴머니즘을 갖자.
이런 쪽으로 치우치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미국 하바드 대학에서 2002년 9월 11일,
9·11테러 1주년을 기념하는 식을 가졌습니다.
거의 수천의 사람들이 하버드 메모리얼 채플 광장으로 모였습니다.
추모예배라고 해서 기독교식 예배를 드릴 줄 알았는데
이상한 형태의 추모예배가 열렸던 것입니다. 유대 랍비가 양각나팔을 불면서 식이 시작되었고,
이어서 이맘이라는 이슬람 성직자가 나와 환영인사를 하고,
그 다음 티베트 라마승과 힌두교 사제가 나와 주문을 외웠습니다.
소설책에만 나오는 줄 알았던 조로아스터교 사람들이 나와서
그들의 신(神)인 아후라 마즈다를 부르고 경전(아베스타)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한 동양계 학생이 나와 불교 경전을 낭독하고
힌두교의 우파니샤드를 낭독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기독교인이 나왔는데
롬8:35~39절만 달랑 낭독하고 들어갔습니다.
미국의 종교적 주류가 기독교인데
여기서는 기독교가 십분의 일도 안 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류인 기독교가 뒷전에 밀려나 있는 모습 이것이 미국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다원주의가 우리나라에도 급속히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내일의 하나님 가족 여러분 !
우리는 세상적으로 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세상과 우리는 엄연히 다릅니다. 같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행4:12절에
[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
그러니 인간이 만든 종교와 철학이 어떻게 우리에게 구원을 줄 수 있겠습니까?

아덴의 철학자들은 바울이 전하는 이상한 철학적인 이론을 듣고 <5>
한편 의아해 하면서 다른 한편 그가 전하는 철학 사상에 대하여
더 상세한 내용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붙잡아 아레오바고란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아레오바고> 란 아레오 언덕 이란 뜻으로
지금도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지역을 아레오바고라고 합니다
이곳은 그 당시 재판과 입법을 주관했던 의회의 모임 장소 같은 곳으로
이 법정은 재판권도 행사되었지만 종교와 도덕을 논쟁하기도 했으며
새로운 학설에 대한 일연의 발표장으로도 활용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새로운 교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고자 하노라 하며
바울을 이 법정에 세운 것입니다.
바울의 이 아레오바고에서의 논증을 <아레오바고의 설교>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 절호의 기회에 수많은 아덴 사람들과
아덴의 세계적인 철학자들 앞에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1절에 보세요.
[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아덴 사람들은 20절에 이상한 것과 21절에 새로 되는 것에 관심이 있지
다른 것에는 별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도시의 특징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뉴욕이나 파리나 동경이나 서울도 마찬가지이지요.
이런 대도시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이상한 것에 관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특히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즉 유행에 민감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첨단 유행을 걷는 사람들이 대도시 사람들입니다.
왜 이런 새 것을 좋아합니까? 속이 허 하니 그렇습니다.
지금 가진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니 자꾸 새 것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늘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는 삶에는 공허함만 남을 뿐입니다
이런 아덴 사람들에게
야~! 아덴 사람들아 너희들 속이 허 하구나 !
이렇게 다가가지 아니했습니다.
뭐라고 합니까?
22절 [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
바울의 시작이 놀랍습니다. 바울은 확실히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 같으면 절대 이런 식으로 접근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6>
아마 유대인들 같았으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 형제들이여 당신들은 참 신앙의 전통을 잘 지키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래서 율법이 어떻고 우리 조상이 어떻고 ] 하면 듣는 거예요.
일단 들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종교심이 많다고 치켜세워 주었습니다.
아마 아덴 사람들도 자존심이 있으니
아하~! 우리를 물질적인 사람으로 보지 않고 종교적인 인간으로 보구나
그러니 아덴 사람들도 기분이 좋아졌을 것 아닙니까?
이것을 복음의 접촉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내 관심을 먼저 주장하면 안 됩니다.
상대방의 관심, 그 사람의 장점을 인정해 주면 마음의 문이 열려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속이 부글 부글 끓지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참고는
내가 도시를 두루 두루 보니 얼마나 신이 많은지
여러분들의 종교성 알만 합니다.
그런데 신들마다 이름을 짓다가, 짓다가 너무 많으니 한 곳에 가니
[ 알지 못하는 신에게 ] 라는 팻말이 있는데
내가 오늘 그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해 당신들에게 알려 드리겠소
하고는 아레오바고의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럼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의 핵심 즉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바울은 다섯 가지로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1)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바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24절 [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 ] 바로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
이것 모르면 사람은 쾌락주의나 허무주의로 빠져
거기서 더 진도가 나가면 파멸하거나 자살하는 거예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는
하늘이 없다고 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시14: 1절에
[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
2)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이시다. <7>
24절 [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 천지의 주재시니 ]
천지의 주재가 무슨 말입니까? 천지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천지 만물을 만드셨을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만들어 놓고는
구경만 하시고 방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 진리를 바로 알고 나면 우리 인생이 달라집니다.
이 진리를 바로 깊이 깨달은 성경의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다윗입니다. 대상29:11절-12절
[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능력과 권세가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
감기는 광동탕 들고
[ 이 손안에 있나이다 ] 하는 탈런트 김 무생씨 손 안에 있는지 모르지만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은
만유의 주재가 되시는 하나님 손 안에 있다는 것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왜냐? 하나님의 천지의 주인이시오 만유의 주재이시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은 손으로 지으신 곳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4절에 [ 손으로 지으신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
이는 지금 우상 구덩이 속에 사는 아덴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우상은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팔공산 돌부처를 사람이 만들어 놓고
동양 최대의 불상이니 하며 예술품이니 하지만
사람의 손으로 만든 물건입니다.
돌부처 금부처가 우리에게 복을 주는 것 아닙니다.
하물며 돼지 머리 같다 놓고 천지신명에게 복을 빌고
액댐 해달라고 절하는 사람들 - 몰라서 그렇지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이 어떻게 우리에게 복을 줍니까?
갓 바위한테 가서 비는 사람 - 참 불쌍한 사람들입니다.시57:15절 [ 하나님은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시며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신다 ] 고 합니다.
그러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마음이 겸손해 지면 복을 받을 줄 믿습니다.
4)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니라고 합니다.
25절 [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오늘날 교회 안에서 우상 숭배를 닮아가는 예배자들이 있습니다. <8>
하나님은 교인들이 바치는 헌금이나 재물을 받아먹고 사는 신이 아닙니다.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인 하나님이신데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에게 가져오라고 하겠습니까?
되려 사1:11절
[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짐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너희에게 누가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
그러니 헛된 마음 버리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가 되시기 바랍니다.

5)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며
필요한 모든 것을 친히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25절 [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니라 ]
생명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호흡 주신 하나님께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시150:6절 [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찌어다 할렐루야 ]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nbsp;&nbsp;&nbsp;

바울이 지금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를 하면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26절에
(1)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신 하나님
(2) 이 인류로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신 하나님
(3) 거주의 한계를 정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이렇게 하심은
27절에 사람들로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바울의 아레오바고의 설교의 결론이 무엇인가 하면
31절 마지막에 [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다 ] 는 것입니다.
그 믿을만한 증거가 무엇인가? 하면
1) 27절에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멀리 떠나 계시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롬1:19절에도 [ 이는 하나님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 합니다.
특히20절에 보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그의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어 있으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한다고 했습니다.
2)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힙입어 살며 기동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9>
28절 [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
우리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야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만약 태양의 존재와 혜택을 거부하면 모든 사람과 식물은 다 죽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집 안에 앉아서 태양이 안 보인다고
태양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비유하는데
만약 부모 자식 간에
그 자식이 아무리 출세하고 유명해져도
부모를 모르는 자식은 자식 축에 넣어 주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형통한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도 기동도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하는 것
즉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아셔야 합니다.

바울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하여
당시 어떤 시인의 시를 인용을 합니다.
28절에 [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
우리가 그의 말 대로 신의 소생이 되었으니
그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손으로 새겨놓으면 말이 되겠느냐?
말도 안되지,
그러나 30절에
[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
31절이 말하는 것은
그 증거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 예수가 우리가 핑계치 못할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를 듣지 못해서 예수를 안 믿었다면 모르거니와
이제 예수 믿으야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면 심판날 그 심판을 면치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김 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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