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은혜 지킴 (마 20:1-16)

  • 잡초 잡초
  • 218
  • 0

첨부 1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다른 때보다도 많이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첫째 ‘요한’이의 이름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는 뜻입니다. 지난 생애를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셨음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운명주의자요 허무주의자로 살다가 무능해져서 장가도 못가리라 생각했던 자에게 아이까지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둘째의 이름을 은수(恩守)라고 지은 것은 풍성하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일생동안 잘 지키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교만해진 사람들의 모습을 마음 아프게 지켜보면서, 자신은 평생 은혜를 잊지 않고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주신 은혜만큼 잘 감당하고 있지 못한 모습으로 인해 주님께 송구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은 말씀을 통해서 은혜 지킴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1). 주인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2). 당시에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한 이스라엘 품꾼은 통상적으로 한 데나리온을 받았는데, 그 품삯이면 노동자 가족의 이틀 생활비 정도 되었습니다. 하루 한 끼 먹기도 힘들었던 시절이라 이른 아침부터 일자리를 얻어서 종일 일할 수 있다는 것은 복이었습니다.

주인은 제 삼시, 곧 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에 장터에 빈둥거리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에게도 적당한 품삯을 약속하며 포도원에 들어가게 했습니다(3-4). 포도철에는 많은 일손이 필요해서 시간제 일꾼도 필요했고, 노동자들은 일한 시간에 비례해서 품삯을 받았습니다. 주인은 12시와 오후 3시에도 그같이 했습니다(5).

그런데 오후 5시에 나가 보니, 아직도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또 있었습니다(6). 주인이 묻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그들이 대답합니다.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새벽에 인력시장에 나가면 튼튼하고 일 잘하게 생긴 사람들부터 차출되어 갑니다. 시간이 지나면 허약해 보이는 부실한 사람들만 남습니다. 아마도 오후 5시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은 품꾼으로 쓸 만한 사람은 전혀 못 되었던 것 같습니다. 관절염이나 골다공 환자라는 사실이 알려져서 아무도 일을 맡기려 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열심히 일하다가 놀고 싶을 때, 놀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여가를 즐긴다고 합니다. 빈둥거린다는 표현을 쓸 때는 어떤 경우일까요? 놀고 싶지 않은데 놀아야 할 때, 혹은 일해야 하는데 하지 않고 있을 때입니다. 취직해서 열심히 일하고 싶은데 아무도 써주는 사람이 없어 백수로 지내야 하는 사람은 시간 시간이 괴롭습니다.

오후 5시가 되도록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거리에서 빈둥거려야 되는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이제 한 시간만 지나면 해가 저물고,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터덜거리는 힘없는 발걸음과 축 쳐진 노동자의 어깨위로 떨어지는 석양은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측은해집니다. 고기 한 근 사들고 당당하게 집에 돌아가 굶고 있는 자식들 배불리 먹여보려고 했던 아침의 꿈도 사라지고, 기다리는 아내의 낮을 볼 면목이 없어집니다. 그럴 때면 가장이라는 신분이 힘겨운 인생의 짐으로 여겨집니다.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는 대답 속에는 가진 것 없는 미약한 인생의 아픔과 비애가 쓰며 있습니다.

주인은 그들의 형편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7) 그들에게 이 말이 얼마나 기쁜 소리였겠습니까? 운전면허 실기에서 한 번 떨어지고 두 번째 응시에서 붙었을 때, 저는 대입 합격한 것 보다 더 기뻤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운전면허 시험 합격과는 비교도 안되겠지요. 수 십 번 공무원시험에 떨어지고, 이제는 연령제한에 걸린 청년이 마지막 시험에서 턱걸이로 통과한 것보다 더 기뻤을 것입니다. 비록 한 시간밖에 일할 수 없지만, 오늘은 토끼 같은 자식들에게 붕어빵 한 봉지라도 사들고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지 돈을 번다는 것 이상이었습니다. 한없이 무너져버린 자존감이 회복되는 것이고, 아침에 꾸었던 꿈이 회복되는 것이며, 가족에 대한 가장의 책임감과 애정이 회복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태신자인지라 아주 일찍부터 주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정오 같은 청년기에 부르심을 받는 사람도 많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오후반에 부름을 받습니다. 인생이 저무는 황혼기에 부름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난해서 끼니조차 어려웠던 시대에, 실업자들은 넘쳐나고 일자리는 구할 수 없던 시대에 아침 일찍부터 일하게 된 사람도 은혜였고, 오후 늦게 일하게 된 사람도 은혜였던 것처럼, 주님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느냐를 떠나서 주님께 부름을 받았다는 자체가 놀라운 은혜입니다.

나이와는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비애를 느낄 때, 혹은 인생허무와 운명주의의 고통 속에서, 때로는 무거운 죄의식과 인생의 짐에 짓눌려 있을 때, 우리를 찾아오시고 불러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열심히 살고 싶어도 의미를 알 수 없어 무료하게 살아가던 인생, 술을 퍼마시며 빈둥거리던 인생을 찾아주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찾아오신 후로 우리는 넘치는 의욕을 부여받고, 열심히 살아갈 인생의 의미를 다시 회복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잃어버린 자존감을 회복하게 되고, 새로운 꿈을 꾸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습니다.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청지기에게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고 했습니다(8). 오후 5시에 온 사람들은 겨우 한 시간 일했기 때문에, 1/12 데나리온의 품삯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9). 당시 노동관습에 비추어보면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오후 5시에 온 사람은 다시 한 번 주인의 놀라운 은혜에 놀라서 감격하며 집으로 갔을 것입니다. 이를 지켜보던 먼저 온자들도 다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동시에 한 시간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 받았으니, 나머지 사람들은 상당히 많이 받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의 품삯만 주어졌습니다(10). 이 일은 또 한 번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품꾼들 사이에 불만이 생겼고, 일종의 노사분규가 발생했습니다. 그들은 집단적으로 주인을 찾아와 항의했습니다.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11-12)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 1/12데나리온의 품삯만 주든지, 아니면 자기들에게도 한 시간당 1데나리온씩으로 품삯을 계산해서 지불해야 공평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시위자 중 대표에 해당하는 것 같고, 오전 6시에 고용된 사람이었습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13-15) 주인은 그를 고용할 때 한 데니리온 품삯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켰습니다. 결코 그들의 품삯을 속이거나 부당하게 착취하지 않았습니다. 오후 5시에 온 사람에게는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주인 스스로 손해를 감수하면서 자비를 베푼 것이었습니다.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에 온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것도 주인이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 은혜를 베푼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항의는 선한 것을 악하게 보는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듣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들의 원망에는 공감하면서 주인이 참 별난 사람이라는 인상을 가집니다. 주인이 새벽에 온 사람부터 품삯을 지불했다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공연히 지켜보게 해서 문제를 일으키는가 하는 아쉬움을 가집니다. 그러나 이 일은 주인은 경영 미숙으로 볼 수 없습니다. 8절을 보면 예수님은 주인이 의도적으로 나중 온 자부터 품삯을 준 것으로 비유를 설정했습니다. 이처럼 뭔가 찜찜한 부분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 곧 비유의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마치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인의 하루는 은혜를 베풀며 시작해서 은혜를 베풀며 마칩니다. 주인은 아침 일찍 어떤 사람들을 선택함으로써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마감시간에도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로우신 주님의 통치로 말미암아 은혜로 계산되는 이것이 세상 나라와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독특한 특징입니다.

문제는 은혜를 잊어버리는 사람에게 발생합니다. 모든 품꾼들이 부름 받을 당시에는 기뻐하며 주인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처음의 은혜를 망각합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은혜로 생각하고 감사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풍성한 은혜를 받을 때 마음이 변해서 자신에게도 수고한 이상의 더 많은 은혜가 베풀어지지 않는 것을 원망합니다. 주님께 데모하고 은혜를 강요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자식들이 자기보다 뛰어나기를 참으로 바라는 부모도, 신앙생활을 늦게 출발한 사람이 자기보다 더 귀하게 쓰임 받을 때 시기심을 느낍니다. 이는 하나님의 방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시기심’이 있고 ‘자비심’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의 결론은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입니다. 비유가 시작되기 직전인 19:30절도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입니다. 결국 비유는 우리로 처음의 은혜를 망각하지 않도록 경고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로 진행되는 ‘은혜의 왕국’에서 은혜를 망각하는 사람은 많은 은혜를 주셔도 늘 불평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시기심과 비교의식에 시달리며 불평하는 그러한 사람은 먼저 되어도 나중 될 것입니다. 한 번 은혜를 강하게 받은 사람이라도 언제나 은혜를 망각하게 될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잘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최 동규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