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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단 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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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앙의 위인들이 성경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내건 사건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바로 종교개혁 때에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포로가 되었다.”라고 선언하면서 교황의 사절의 최후통첩을 담대히 거부한 마틴 루터에서부터 시작하여, 6.25동란 때 성경책을 밟고 지나가라는 공산군의 위협에도 끝까지 굴하지 아니했던 한 어린아이의 일화에 이르기까지 그 예는 수없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생활을 지키기 위하여 그처럼 목숨을 내건 경우는 어떠하겠습니까?
  아마 없지는 않겠지만 교회사에서 전자의 경우만큼 자주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다름 아닌 바로 그 기도생활 하나를 두고 진짜로 자기 목숨을 걸었던 한 위대한 신앙 선조가 나타나고 있는데, 바로 다니엘이었습니다.

  우상국가 안에서 불신 이방인들에게 둘러 싸여 살아가고 있던 다니엘에게 있어서 기도란 그의 신앙의 전투에 있어서 필수적인 무기나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바로 그 기도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처지에 빠지게 됩니다.
  본문 6절로 9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모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말하되 다리오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 나라의 모든 총리와 수령과 방백과 모사와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율법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려 하였는데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이다 / 그런즉 왕이여 원컨대 금령을 세우시고 그 조서에 어인을 찍어서 메대와 바사의 변개치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 그것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매 /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에 어인을 찍어 금령을 내니라”고 했습니다.

  고레스가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킨 후 다리오라는 총독을 세워 바벨론 성을 다스리도록 했는데, 다니엘은 그 다리오에게 총애와 신임을 두텁게 받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승진과 명성을 시기한 다른 두 총리들과 방백들은 그 다니엘을 고소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궁리 끝에 다리오 왕을 부추겨서, 꼭 한 달 동안만은,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하는” 특별법을 제정하도록 합니다.
  여기 ‘무엇을 구하다’라는 말은 바로 기도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바로 그것으로 다니엘을 옭아 넣으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제 삼자가 보기에 다니엘이 취할 행동은 명백했습니다.
  그냥 기도생활만 포기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상황이니, 그 계산은 실로 간단명료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다니엘은 선택은 모든 예상을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사자굴에 던져지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기도생활만큼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랬던 것입니까?
  왜 다니엘은 일견 그처럼 어리석기 짝이 없어 보이는 쪽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택했던 것이었습니까?
  우리는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하여 왜 우리 기독신자들은 자신의 기도생활을 목숨을 내걸고서라도 지켜야 하는지 그 이유들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기도생활은 말씀생활과 직결되는 신앙생활인 까닭에 참된 신자라면 절대로 빠뜨릴 수가 없습니다.

  다니엘에게 있어서 기도생활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본문 1절부터 5절에 기록하기를 “다리오가 자기의 심원대로 방백 일백 이십 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 / 또 그들 위에 총리 셋을 두었으니 다니엘이 그 중에 하나이라 이는 방백들로 총리에게 자기의 직무를 보고하게 하여 왕에게 손해가 없게 하려 함이었더라 /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방백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 /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 그 사람들이 가로되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그 틈을 얻지 못하면 그를 고소할 수 없으리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의 대적들은 처음에는 정치적으로 일종의 정공법을 시도해 보려고 했습니다.
  다니엘이 처리하는 “국사에 대하여 고소할 틈”을 얻고자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았던 것입니다.
  소위 개혁이니 과거사 해결이니 하는 미명 아래 사실은 정적에 대한 인신공격을 일삼는 정치가들의 근성은 예나 지금이나 꼭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권모술수에 도가 트인 간신배들도 다니엘에 대해서만큼은 “아무 틈, 아무 허물도” 그야말로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하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이 다니엘은 그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시빗거리를 찾는 수밖에 다른 아무 도리가 없겠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고, 그래서 그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특별법을 소위 다리오 왕의 권위를 더욱 강화시키기 위함이라는 미명 아래 제정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니엘을 그처럼 시기하고 미워했던 사람들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한 가지 사실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그가 “아무 그릇함도 아무 허물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처럼 완전무결하게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다니엘 자신이 아무 죄 없는 무흠의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바로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 대적들은 다니엘에게 있어서 율법을 충실히 지키면서 산다는 것은 곧 그의 열성적인 기도생활로 불가분의 관계로 이어져 있다는 것까지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그 대적들은 다니엘을 두고 “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그 틈”을 찾으려 시도한 결과 다름 아닌 바로 그의 “신에게 무엇을 구하는” 기도 행위에서 그것을 찾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에게 있어서 말씀생활과 기도생활이 직결되어 있다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아니하던 그의 대적들의 눈에조차 확연히 띄는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기도가 신자의 신앙생활을 위한 필수 요소들 중에서 말씀보다는 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정말 큰 오해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신자가 성경 말씀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끝까지 붙잡아야 하지만 기도는 사정이 급할 때면 잠시 버려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착각인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전화기의 수화기만 통하고 송화기는 고장 나 있어도 전화기 쓰는 데에는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말씀을 듣기만 하고 기도는 올리지 않는다면, 신자가 평소에도 하나님과의 원활한 영적 교통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특히 비상시에 아무 구조 요청을 보낼 수 없을 것은 너무나도 뻔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기독신자들이 이 기도생활이란 것이 말씀생활보다는 무언가 조금 열등한 것처럼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영양 많은 음식이라 해도 그것을 먹기만 하고 에너지로 분출시키기 않으면 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 말씀을 듣기만 하고 기도할 줄 모르는 것은, 아버지의 말씀에 고개는 끄덕이면서도 한 마디도 대답도 할 줄 모르는, 아주 이상한 병에 걸린 자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의 설교에 은혜 받는다고는 하지만 기도는 할 줄 모르는 교인은, 무언가 잘못되어 있는 교인입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교인입니다.
  다른 데서는 유창하게 말 잘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벙어리는 아닌데 유독 자기 아버지 앞에서만 입이 닫히는 자식이라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아주 없든지 아니면 무언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크게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종교개혁자들의 유명하고도 수많은 예들을 굳이 들지 않더라도, 신자가 기도생활 없이는 말씀생활 역시 제대로 영위할 수 없다는 것은 설명이 두 번 필요 없이 자명한 사실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성경중심‘이라는 말 안에는 ’기도생활‘이 이미 포함되어 있고 전제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에게 있어서 성경 말씀을 읽고 상고하고 깨닫고 믿는 것에 조금도 못지않게 기도 역시 항상 거기에 동반되어야 할 필수 신앙생활인 줄을 기억하면서, 늘 받은 말씀을 기도로 되새김질하면서 더욱 구체적인 은혜로 체험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도생활은 신자의 영적 호흡과 맥박과도 같은 까닭에 그 어떤 경우에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다니엘에게 있어서 기도란 바로 자신의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생명 활동 바로 그 자체나 다름없었습니다.
  10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조서에 어인이 찍힌 그날도 집에 돌아가서는 “전에 행하던 대로”, 즉 평소에 하던 꼭 그대로 기도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다니엘의 기도생활은 완전히 습관화, 체질화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기 방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기도했는데 이것은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저희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저희의 일을 돌아보옵시며”(왕상 8:48-49)라고 기원했던 것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는 또 “하루 세 번씩” 기도했는데 이것은 기도생활을 규칙적으로 했음을 뜻합니다
. 사람이 무슨 하기 귀찮으면서도 꼭 해야 할 것은 아예 규칙을 정해 놓고 스스로 채찍질하면서 실행해나가듯이, 기도 역시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의 기도는 “무릎을 꿇고” 드린 것이었습니다.
  규칙적으로 한다고 해서 그저 시간만 때우는 중언부언의 기도를 했던 것이 아니라, 기도드릴 때마다 늘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그러면서도 또한 하나님 앞에서 항상 겸손한 자세를 지킨 기도였던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다니엘이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감사할 것이 있었겠습니까?
  그는 지금 기도하는 것 때문에 사자굴에 던져 넣음을 당할 위기에 몰렸습니다.
  우리 같으면 기도는 계속한다 손치더라도 그 내용은 제발 살려 달라는 것으로 다 채워졌을 터이고 어쩌면 원망 섞인 기도가 되기 십상이었을 터인데, 정말 놀랍게도 다니엘은 그런 와중에서도 감사가 그의 기도의 가장 큰 제목이 되었습니다.
  다니엘의 대적들은 ‘어느 신에게 무엇을 구하는 것’만 기도인 줄 알았지만, 이처럼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자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기도의 주된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평소에 바로 이런 기도의 습관을 가지고 있던 다니엘은 조서에 어인에 찍힌 것을 알면서도 태연자약,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전에 하던 그대로 기도했습니다.
  사실 다니엘로서는 여러 가지 선택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 조서의 효력 기간이 30일이었으므로, 딱 한 달 동안만 기도를 쉬기만 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평생 할 수 있는 기도 그저 한 달만 잠시 쉬면 되는데 그것을 꼭 계속하려고 고집부리다가 일찍 죽을 필요가 무엇이 있나?” - 우리라면 대부분 이렇게 생각했겠지만 다니엘은 그러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기도를 계속한다 하더라도 굳이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지 말고 그냥 닫아 놓은 채로 기도해도 충분할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대적들의 눈에 띄지만 않으면 될 것이었으니, 우리 같으면 열이면 열 다 이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만큼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기도 생활이란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조금도 바꿀 수 없는, 이미 완전히 굳어진 영적 습관 바로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기도생활이란 것은 사실 습관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해서는 한시라도 멈출 수 없는 필수적인 호흡이요 맥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어떤 버릇이나 습관을 바꾸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숨 쉬는 방법이나 맥박이 뛰는 동작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랬다가는 당장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도 역시 신자에게 있어서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신앙 동작이요 영적 활동입니다.

  그런 기도생활을 무슨 바쁜 일정이라는 핑계로 간단히 빼먹고 피곤한 몸 때문이라는 변명을 가지고 쉽게 넘어가는 것을 아주 대수롭지 않게, 아니 거의 당연하게 합리화시키고 있는 우리 자신들을 이 다니엘에 비교해 보면 정말 부끄럽지 않습니까?
  아무리 바쁘고 급하다 해도 사람에게 자기 호흡과 맥박을 멈추어야 할 만큼 바쁜 일, 급한 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기도가 바로 자기의 호흡과 맥박 그 자체인 줄로 알고 그래서 자기 육신 생명이 걸리게 되어도 결코 그 기도생활을 포기하기는커녕 그 습관조차 조금도 바꾸려 하지 않았던 다니엘에 비해서, 우리는 기도 시간을 포기해서 무슨 더 중요한 일을 하겠다는 것이며 기도생활을 희생해서 무엇을 더 많이 얻겠다는 것입니까?
  아무리 어떤 난관을 만나도 그럴 때일수록 오히려 더 열심히 기도해야 마땅할 터인데, 우리는 기도생활을 목숨하고라도 바꾸려 하기는커녕 정말 하찮고 값싼 것들과 쉽게 바꾸어 버리고들 있는 것입니다.
  정말 부끄럽고도 어리석은 모습 아니겠습니까?

  기도생활은 우리의 육신 생활을 위해서 좀 줄이거나 잠시 중단해도 되는 취미생활이나 과외활동이 결코 아니라, 한 순간도 멈출 수 없는 신자의 호흡과 맥박 바로 그 자체임을 잊지 말고, 평생 고치려야 고칠 수 없는 규칙적인 습관이 되도록 부지런히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성도님들이 꼭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기도생활은 환난과 시험에서 유일한 구원의 활로인 까닭에 무슨 일을 당해도 결코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다니엘이 그처럼 끝까지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도 바로 기도만이 실제로 자기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인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어지는 11절 이하 15절에 보면, 다니엘의 기도하는 장면을 포착한 그의 대적들은 당장 다리오 왕에게 보고하여 그 법을 집행하도록 요구했으며, 다리오 왕은 심히 근심하고 다니엘을 구원해 보고자 애를 써 보기는 했지만 결국 자신의 법령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마지못해 그를 사자굴에 던져 넣도록 명했습니다.
  본문 19절부터 24절에 그 다음의 일을 기록하기를 “이튿날에 왕이 새벽에 일어나 급히 사자굴로 가서 / 다니엘의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는 슬피 소리 질러 다니엘에게 물어 가로되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 다니엘이 왕에게 고하되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끝까지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던 다니엘은 오히려 사자굴 속에서도 이처럼 놀라운 기적의 구원을 얻게 되었는데, 이 모든 일을 두고 성경 말씀은 결론적으로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고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다니엘을 향한 총애는 있었지만 용기와 결단력은 없었던 다리오 왕은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라고 그를 부르면서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라고 물어보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니엘이 평소에도 얼마나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이었는지를 이 불신 임금 다리오도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 던져지기 직전까지 기도했을 뿐 아니라, 그 사자굴 속에 던져진 후에도 계속 기도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남들 보기에는 오직 기도를 포기해야만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끝까지 기도하는 것만이 살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께 그 모든 위기 상황을 맡기고 의지하는 것만이 문제 해결의 최상책이며 또한 사실상 유일한 방책인 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끝까지 하나님을 의뢰하는 다니엘의 신앙이 옳은 선택이었다는 사실은 결국 그가 사자굴에서도 구원받게 됨을 통하여 여실히 증명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자기 생명을 구하려 하는 대신에, 끝까지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가운데 자기 생명까지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의뢰하고 맡겼던 것이고 그 결과 오히려 생명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가 기도생활을 그 어떤 경우에도 포기해서는 아니 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아무리 당장은 막막해 보여도, 아무리 현실은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는 것처럼만 보여도, 기도하는 성도를 위하여서는 하나님께서 항상 최상의 것을 바로 그 다음에 준비해 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 사실에 대하여 장담하지 않으셨습니까?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틀림없이 보증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자기에게 닥친 난관을 두고 기도하지 않고 그 시간을 절약해서 스스로 해결해 보겠다는 것이 얼마나 바보짓이겠습니까?
  혹은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시겠지.’라는 식으로 방관하는 것은 얼마나 ‘간 큰’ 발상이겠습니까?
  더욱이 끝까지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일찌감치 ‘될 대로 되어라, 망할 테면 망해라.’하고 자포자기하는 것은 또 얼마나 큰 불신앙의 죄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것은 그냥 말씀을 듣고 아멘하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의뢰하는 신앙이 실제로 유지되고 구체적으로 발휘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의뢰하고 기도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하늘의 아버지께서 결코 모른 체하고 내버려 두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 모든 기독신자들에게 그야말로 비장의 카드와도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저것 다 해 보고 최후에 쓰는 카드가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이것 한 장만 쥐고 있으면 무슨 일을 당해도 절대로 질 수 없는, 필승의 카드인 것입니다.
  그 어떤 사태가 닥쳐도 오직 기도를 통하여 하늘 아버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철저히 의지하는 신앙을 발휘함으로써, 끝내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그 놀라운 기도의 열매와 승리를 꼭 체험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미국의 독립전쟁 때 미국의 워싱턴 장군이 가장 고전했던 전투는 필라델피아의 밸리포지라는 마을에서였습니다.
  그의 군대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탈진 상태였으며 적군과의 전력 비교는 상대도 되지 않았고, 누구의 눈에도 패배는 이미 목전에 다가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워싱턴의 비서였던 루이스는 필승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그 이유를 설명하기를 “워싱턴 장군은 하루 네 번씩 성경을 펴놓고서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장군의 얼굴은 너무나 평화로웠습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그 필패가 뻔해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워싱턴 장군은 오직 성경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마음의 평안과 승리의 확신을 지켰고, 실제로 바로 그의 믿음대로 그 전쟁을 이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밸리포지에는 지금 워싱턴 기념교회가 있으며 그 교회당에는 “민족의 지도자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백성을 섬기게 하소서”라는 기도문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이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받고 기도로써 그 겸손을 유지하여 결국 조국을 살리고 나라를 세운 것을 그 이후의 모든 미국의 지도자들이 본받게 해 달라는 뜻의 기도라고 생각됩니다.

  이처럼 기도생활이란 목숨이 걸려 있어도 절대로 포기할 수 없고 목숨이 위태로운 때일수록 더욱 필수적인 신앙생활의 요소입니다.
  그것은 신자가 말씀생활을 영위하는 데에 있어서 필수적이며, 신자의 영적 생명이 유지되는 데에 있어서 없어서는 아니 될 호흡과 맥박이며, 또한 신자가 이미 예비된 축복과 궁극적인 구원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 결코 중도에서 버리지 말고 끝까지 붙잡고 있어야 할 최대의 희망인 동시에 확실한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고 박윤선 목사님께서 생전에 국내의 어느 신학교 교장으로 지내실 때 어느 신학 논문집에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는 제목으로 쓰셨던 글을 자주 기억합니다.
  박 목사님께서는 특히 신학교수들 중에 기도를 등한히 여기는 풍조가 있음을 한탄하면서 그와 같은 글을 쓰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그 한 구절 한 구절 속에 담겨 있는 박 목사님의 뜨거운 영적 열정을 피부로 그대로 느끼는 듯했습니다.
  신자가 성경 말씀을 읽을 때 그것을 깨닫고 믿도록 감동시키는 것도 성령의 역사이지만, 꼭 마찬가지로 신자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고 응답받고 선한 일을 이루는 것 역시 꼭 같은 성령의 귀중한 사역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연구한다는 신학자들이, “신학교는 기도원이 아니다.”라는 말을 변명으로 내세우면서 기도생활을 등한시하는 것은 결국 그 성령의 불을 스스로 꺼뜨리는 행위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고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당신의 영혼이 맺힌 듯한 소리로 그 글을 쓰셨던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목사는 교인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엄청난 고통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자기 교회의 교인들이 기도생활에 약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목사로서는 그 교인들이 자기 설교에 은혜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만큼이나 아프고 또한 부끄러운 일입니다.
  기도회에 모이는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목사로서는 주일예배의 헌금이 줄어드는 것만큼, 아니 오히려 그보다도 더 괴로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무슨 일 생긴 후에 사후 약방문 격으로 급한 불끄기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닙니다.
  기도는 성도와 교회가 평소에 영적으로 자고 있느냐 아니면 늘 깨어 경성하고 있느냐를 가름하는 요소입니다.
  기도는 성도와 교회가 위기상활을 맞이할 때 시험에 빠지게 되느냐 아니면 간단하게 극복하느냐를 결정짓게 만드는 원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기도는 그 성도와 그 교회가 진정 살아 있느냐 아니면 내면적으로는 죽어 가고 있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라는 것은 목숨이라도 바꿀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는 일이 되는 것이며, 그러니 기도하다가 그 기도 때문에 순교당하더라도 아무 억울한 것 없을 만큼 소중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두세 사람이 모여 내 이름으로 기도하는 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우리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이 교회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마음이 두 명 세 명 모이는 시간만 끊이지 않으면 적어도 예수님께서는 항상 이 교회 안에 계실 것이고, 그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임에 늘 임재하신다면 우리 교회의 앞날은 실로 소망스럽고도 복스럽지 않겠습니까?
  항상 자신의 골방에서 기도하고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고 교회에 모여서 기도하는 가운데, 말씀 생활에 더욱 은혜가 충만하고 개인의 영혼은 살아서 생기와 활력이 넘치며 또한 영육 간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을 늘 충만히 체험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멘 -
(석 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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