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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곱교회 순례(7) : '라오디게아 교회' (계 3: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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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디게아 교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교회」

<부유가 넘치는 도시, 라오디게아>
오늘 우리는 소아시아의 7교회 중에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6교회 중 대부분은 책망도 받고 칭찬도 받았습니다.
교회가 잘한 것도 있었고, 잘못한 것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칭찬만 받았습니다.
주님이 평가하실 때 두 교회는 그만큼 건강했기 때문에 책잡을 일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말씀드릴 라오디게아 교회는 책망만 받았지 칭찬은 하나도 받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칭찬할 거리가 하나도 없는 교회, 참으로 비참한 교회입니다.
도대체 라오디게아 교회의 어떤 모습이 이 지경으로 몰고 갔을까요?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 중부 지방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순으로 내려오는 도시들 중에 최남단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하면 아주 부유한 도시의 대명사였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 각지로 통하는 교차 무역로로서,
은행과 상업과 특히 고리대금업이 크게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의류 산업이 번성했는데, 그리 비싸지 않은 의류를 대량 생산해서 세계 각처에 수출했습니다.
부드럽고 질감 좋은 검정색 양모와 양탄자 산업도 융성해서 큰 수입을 올렸습니다.
이렇게 부유한 도시이다 보니까 소아시아 지방 전체를 휩쓴 지진이 찾아와도
밖으로부터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서도 자립으로 재건할 수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에는 또한 세계적인 의과대학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생산해내는 안약이 특히 유명했습니다.
본문 18절에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는 말씀은
라오디게아가 안약의 도시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본래 군사요새 도시로서 손쉽게 물을 구할 수 있는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도시로부터 약 8-9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수원지(水源池)로부터
지하 수도관을 통하여 물을 끌어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쟁이 일어나 사면이 포위라도 당할 때에는 물을 얻지 못해 곤혹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수로를 타고 들어오는 물은 대개 뜨거운 온천수였는데
이 뜨거운 물이 도시에 도착할 즈음에는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물이 되고 맙니다.
본문 15절에서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교회라고
책망하시는 것은 이와 같은 지리적인 특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골로새 교회의 형편을
바울에게 알린 에바브라에 의해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골 1: 7; 4: 13-16 참조).
중요한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가장 부유한 도시 안에 있다보니
교회 역시 가장 부유하고 화려한 교회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다른 교회들과 비교해서 밖으로부터 환난과 핍박을 받은 적도 없었고,
안으로부터 이단의 유혹을 당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저 부유하고 편하다 보니 신앙의 생기가 죽은 이름뿐인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미지근한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라오디게아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4절 말씀을 보세요.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여기에서 주님은 '아멘'이신 주님이십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진실로 그러하다"고 확증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신실하시고 참된 증인이신 분입니다.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틀림없이 진실하신 주님이십니다.
또한 라오디게아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은 '하나님의 창조의 으뜸'이신 분입니다.
온 우주만물의 으뜸이시라는 것이지요.

주님이 아멘이시요, 신실하고 참되신 증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진실치 못하다는 사실과 은연중에 대비되는 말씀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최고의 으뜸이시라는 말씀 역시 라오디게아 교회가 주님을 으뜸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들의 물질적인 부와 인간적인 자랑을 최고로 여긴다는 사실을 부각시킵니다. 

이제 이러한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15-16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이 말씀 속에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든 치부가 숨겨져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주인이 되시는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행위를 아시는데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마치 라오디게아 도시 외곽에서부터 수로를 타고 흘러 들어오는 온천수가
도시에 도착할 즈음에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게 되듯이 미적지근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견디지 못하시는 주님은
주님의 입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토해 내시겠다고 경고하십니다.

여러분, 혹시 음식물을 토한 적이 있습니까?
맛이 가서 변질된 음식을 잘못 먹어 급하게 내뱉은 경험이 다 있을 것입니다.
저도 상한 굴을 잘못 먹어 모조리 토해내고 위경련까지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가끔 신문에 보면 독버섯을 잘 못 먹어 식중독을 일으켜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독버섯은 겉보기에는 먹음직스러워도 그 속에는 독을 품고 있어서 사람의 목숨을 빼앗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보시기에 라오디게아의 교회 형편이 꼭 그렇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는 부요하기 짝이 없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데,
주님 입맛에는 도무지 맞지 않아서 토해 낼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주님께서 왜 라오디게아 교회를 토하여 내치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라오디게아 교회가 뜨겁든지 차든지 해야 할 터인데 미지근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흐리멍덩한 상태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를 믿으려면 확실히 믿어야 할 터인데 교회와 세상에 양다리를 걸치고 믿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자교회였습니다.
세상에 다 성공하고 돈 많은 부자들이 교회에 다녔습니다.
교인들의 수준이 높고 편안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생활은 사교 생활이요 액세서리 같은 생활이 되고 말았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사라졌습니다.
좌우에 날선 예리한 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 받는 것 자체를 싫어합니다.
십자가 반지며 십자가 목거리 십자가 뺏지 등을 달고 다니기는 하는데
십자가의 능력은 체험하지 못합니다!

흔히 현대 교인들은 이기적이라고 합니다.
부담 주는 교회는 다니기 싫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울의 어떤 교회는 상당수의 교인들이 등록도 하지 않은 채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게 익명성을 철저히 보장받으며 신앙 생활한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의 십자가는 하나의 장식물에 불과할 뿐,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키는 능력도 아니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사명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한탄하시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은 번지리 하고 대단한데 도무지 속 알맹이가 없습니다!
뜨겁든지 차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어정쩡합니다.
세상 사람 같기도 하고, 교인 같기도 하고 양다리를 걸치고 있어서 정체성이 분명치 않습니다.
그래서 견디다 못해 주님께서 입에서 토해내시겠다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내리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왕 신앙 생활 할 바에는 뜨겁든지, 차갑든지 해야지 미지근해서 안 됩니다!
우리의 가슴은 성령의 불길로 늘 뜨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늘 불이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머리는 늘 차가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분별하는데 냉철하고 밝아야 합니다.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에 빠져서 안 됩니다!

이제 겉으로는 부요하다고 자랑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적나라한 형편을 지적하십니다.
17절 말씀을 보세요.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자기들이 부요해서 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랑하나,
주님이 보시기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형편없이 빈곤한 교회였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교회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스스로는 언제나 자랑스럽고 안온(安穩)했습니다.
돈 많고 갖고 싶은 것 다 갖고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했고 출세했다는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눈썰매도 있고 눈도 밝았으며 옷도 화려하게 입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반대로 비참했습니다.
불쌍했습니다.
눈이 멀었고 헐벗었습니다.
겉모습만 화려했지만 속사람은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만 다녔지 구원의 체험이나 감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세상적으로는 부자였지만 영적으로는 한없이 가난했습니다.
자기가 누리는 부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믿음이 없었기에
감사도 없고 나눔도 없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많은 재물,
많은 권세, 많은 학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부요하지 않는 한, 세상의 부라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는 한없이 가난할 뿐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눈이 멀고 헐벗었습니다.
영적으로 눈이 멀고 헐벗었다는 것이지요.
시력이 1.5, 2.0이라고 할지라도 주님 보시기에 눈 먼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수백 만원을 호가하는 최고급 옷을 입고 있어도 헐벗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엄청난 물질을 투자해 최고로 화려한 시설을 갖춘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공허하게 느껴지고 헐벗은 느낌을 주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진리가 그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내리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가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자랑할지라도
주님 보시기에는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주께서 주시는 생명과 진리는 없고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자랑만이 남을 때 그렇게 되고 말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치유를 위한 세 가지 처방전>
이제 이와 같은 지경에 빠진 라오디게아 교회가 치유받는 길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세 가지 처방을 주십니다.

① 불에 정련한 금을 사고, 흰 옷을 사서 입고, 안약을 사서 발라야 합니다.
18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첫째로, 영적으로 헐벗고 가난한 사람이 부요하게 되려면
불에 정련한 금을 주님으로부터 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적인 부가 진짜 부가 아닙니다.
세상적으로는 굉장한 부자인데 영적으로는 한없이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으로 부요케 되려면 주님으로부터 연단한 금을 사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참믿음이 되려면 불같은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영적으로 부요케 되기를 원한다면 불같은 시험을 믿음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둘째로, 영적으로 벌거벗은 수치를 면하려면 흰 옷을 사서 입어야 합니다.
굉장히 화려한 옷을 입었지만 실상은 벌거벗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흰 옷을 사서 입어야 합니다.
흰 옷은 순결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죄씻음 받은 성도의 순결을 의미합니다.

사 1: 18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오늘 우리가 아무리 죄가 많아도 주님 앞에 참마음으로 회개하기만 하면
주홍 같은 죄가 흰눈처럼 희게 될 것입니다.
진홍 같이 붉은 죄가 양털같이 희게 될 것입니다.
죄로 인한 영혼의 수치를 면하려면 죄사함의 흰 옷을 입어야 합니다!

셋째로, 영적으로 눈이 밝아지려면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눈이 밝히 떠지지 않아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을 삽니까?
보이는 것이 전부인양 얼마나 착각하며 삽니까?
육신의 두 눈은 멀쩡한데 영혼의 두 눈은 먼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세계적인 안약으로 육신의 눈병은 잘도 고쳤지만 
영혼의 눈병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이제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진리로 된 안약을 눈에 발라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세상이 달라져 보입니다.
나 중심, 세상 중심으로 살 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웃 중심, 하나님 중심으로 살 때에는 신기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으로 영적인 분별력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우리를 만들어주셨을 때의 그 청순한 눈으로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②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19절 말씀을 보세요.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우리가 믿는 주님은 사랑하시는 사람을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하십니다.
자녀를 키울 때 사랑하는 자녀일수록 책망을 더 할 때가 있습니다.
아예 포기한 자녀일 경우 아무 책망도 징계도 없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입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토해내고 싶을 정도로 실망하셨지만,
그 교회를 깊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열심을 내라고 격려하십니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가 열심을 내어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영적인 잘못을 뉘우치라고도 당부하십니다.

오늘 우리 내리교회도 혹시 주님 앞에 열심을 못 냈다면 열심을 내야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미지근했다면 가슴은 성령의 불로 뜨거워져야 하겠고
머리는 하나님의 지혜로 차가워져야 하겠습니다!

③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야 합니다.
20절 말씀을 보세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여기에서 주님은 문밖에 서 계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밖에서 문을 두드리시는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점은 주님은 모시지 않고 자기들끼리 모여 있는 교회였습니다.
주님이 들어갈 수 없는 교회, 불행하게도 그런 교회들이 많습니다.
주님을 믿노라고 고백은 하면서도 주님에 대한 자랑은 하나 없이 인간적인 자랑만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주님에 대한 사랑은 없고 인간적인 교제만 있습니다.
이런 교회는 주님이 아무리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는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리교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말씀의 식탁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함께 생명의 말씀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주님과 더불어 보좌에>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21절 말씀을 보세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이기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차든지 뜨겁든지 신앙의 태도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마음의 문, 교회의 문을 꽁꽁 걸어 잠가놓고
세상적인 관심만 가득찬 교인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이 사람들끼리만 모여 있는 교회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유혹을 다 물리치고 이기는 사람은 주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신 것처럼 주님의 보좌에 앉게 되는 축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주님의 보좌에 앉게 되는 영광을 다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김 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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