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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 (요일 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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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려줍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려면 무한한 능력을 갖고 계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의 존재는 티끌만도 못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나 인간은 유한합니다. 이 세상 나라들의 흥망성쇠와 우리 인간들의 생사화복이 다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며 두려운 분이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엄위하신 하나님으로만 계시하지 않고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시는 분으로 계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이 많으시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전파하는 종교입니다. 전도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인생들을 사랑하시는지를 사람들에게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그 만큼 더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 저는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씀해 드림으로 피차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그것은 하나 뿐인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구원 받기 이전의 우리의 상태에 대하여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그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영이 죽은 상태로 태어납니다. 인간의 영은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역할을 하는데 영이 죽었으니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직 육신의 일에만 몰두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전에 우리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마귀의 종으로 지냈습니다. 마귀가 원하는 대로 이 세상 풍속을 좇고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항상 우리 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 욕심에 따라 죄를 물마시듯이 짓고 살다가 죽으면 영원한 형벌에 처할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곧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기셨으며, 마귀의 종 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인이므로 행위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구원받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거저 하나님의 선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주십니다. 구원 받는 방법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그러나 거저 받은 구원이라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 반대입니다. 너무나 귀하고 귀해서 값으로 매길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께서 하나 뿐인 아들을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사람으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생들의 고달픈 삶을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최후에는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고난 받으신 그 십자가에 달렸어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은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근거한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5장 5절로 8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귀하고 위대한 것은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희생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이 같은 사랑은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에 생명을 희생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고 싶어 하고 또 사랑을 받고 싶어 합니다. 세상에는 사랑의 결핍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한다고 사랑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사랑은 조건부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기적이고 타산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건에 맞지 않으면 사랑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하나님을 소개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합니다. 무조건적이며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사랑에 목말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여자는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었으나 사랑에 대한 갈급함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알게 된 그 순간, 이 여자는 사랑의 갈급함을 완전히 해결 받았습니다.

그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들어가서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하며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사랑에 굶주린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그들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잘못된 방법으로 사랑을 얻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생명보다 귀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목숨을 바친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갈라놓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 38절로 39절에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이처럼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받았으니 우리도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죄를 용서 받았으니 우리도 형제들의 잘못을 용서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613가지의 계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표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사랑이 많은 것을 보니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없어”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세인들의 비난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활이 도덕적이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법과 질서를 어기고 악행을 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다만, 사랑으로 행치 않기 때문에 비방을 받는 것입니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특히,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가 교제하다 보면 서로의 성격이나 취향이나 가정형편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이 때 형제에 대한 사랑이 있으면 형제의 허물이 허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하면 장님이 된다는 말이 맞습니다. 사랑하면 결점이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나의 눈에 형제의 허물이 보이고 그로 인해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든다면 일단 나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증거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에베소 교회는 장점이 많은 교회입니다. 진리를 파수하고 이단을 물리쳤습니다. 열심을 품고 부지런히 주님을 섬겼습니다. 핍박과 환난을 인내로써 이겨냈습니다. 정말로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가 사랑이 없는 까닭에 책망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은혜를 맛보았을 당시에는 마음속에 속죄의 감격이 충만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마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이 찬송가가 다름 아닌 나의 고백이구나 생각합니다. 한 교회의 성도들을 보면 다들 선량하게 보이고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자기의 죄인 됨을 생각하니 다른 형제들의 허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남에 따라 구원의 감격이 퇴색하고 마음이 냉랭해 집니다. 형제들의 허물이 보이고 교회에 대하여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것이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표시입니다. 우리는 사랑 없이 행한 것은 아무리 큰일을 할지라도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베드로는 권면하기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이 됩니다. 계명을 범하면 하나님의 책망과 징벌이 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벌이 무서워서 서로 사랑한다면 진정한 사랑이라고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억지로 하는 것은 사랑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원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부탁하면 기꺼이 들어주려고 합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라도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 일을 함으로써 더 큰 기쁨을 맛봅니다. 부모는 자기 자녀를 위해 수고하면서도 고통스럽게 느끼지 않습니다. 자녀가 행복하게 자라는 것을 보면서 기쁨을 누립니다. 사랑의 힘이란 이처럼 위대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계명이므로 기쁨으로 준행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했습니다(롬 12:10). 그런즉 억지로나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 형제들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사랑할 때 행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미움이 있으면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27)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28)사람이 숯불을 밟고야 어찌 그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잠 6:) 하신 대로, 미움의 감정은 불과 같아서 우리가 미움을 품으면 상대방을 태우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미움은 결국 다툼을 일으킵니다(잠 10:). 다툼이 있는 곳에 행복이 깃들 수 없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입니다.

다툼이 있는 가정은 행복한 보금자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잠언 17장 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였고, 잠언 21장 9절에는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다투는 여인은 여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도 다투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사랑은 주는 것이냐, 받는 것이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사랑을 줌으로써 행복합니다. 사랑을 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입니다. 그래서 행복을 누리려면 사랑을 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이 커집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먼저, 사랑을 자기 가족에게로 확대해야 합니다. 그러면 가족 모두가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 가족만 사랑하는 사람은 내 가족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무슨 큰 희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 되지 않는 금액으로도 후진국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도울 수 있고, 우리 주변의 독거노인이나 소년소녀 가장들을 도울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웃에게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청받아 가셨을 때였습니다. 그 동네에 평판이 나쁜 한 여자가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계신 것을 알고는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향유 냄새가 방안에 가득 찼습니다. 때에 시몬이 속으로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생각을 하시고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셨습니다. “선생님 말씀하소서”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고 하시니 시몬이 대답하기를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기를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하시고, 여자에게 이르시기를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여자는 향유 한 옥합을 주님 발에 송두리째 부어드리면서도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깝기는커녕 행복감이 넘쳤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저의 사랑함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여자는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향유 한 옥합을 다 부어드리면서도 조금도 아깝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행복하려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자식은 부모의 사랑을 받아서 행복합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할 때 행복한 가정이 이루어집니다. 믿음의 형제들이 서로 사랑할 때 행복한 교회가 만들어집니다. 이처럼 사랑은 주고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을 때 사랑의 반응을 해야 합니다. 산에 올라가서 “야호!” 외치면 조금 후에 저편에서 “야호!”라고 메아리가 들려옵니다.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일방적인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하고 쉬 고갈되고 맙니다.

우리는 사랑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말은 그렇게 해도 마음은 그렇지 않다든가, 행동은 그래도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하셨습니다(마 12:34). 마음에 사랑이 있어야 사랑의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미움이 가득하면 가시 돋친 말을 하게 됩니다. 교만한 사람은 남을 무시하는 말을 하고, 겸손한 사람은 남을 존중하는 말을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기 위해 학원에 가서 배우듯이, 학생들이 학교에 가서 지식을 배우듯이, 사랑하는 법도 배워야지 저절로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주님에게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용혜원 시인의 “사랑이라는 말”이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흔한 말이

사랑이라고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말이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들을 수 있을 때도

행복하지만

사랑이라는 말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을 때는

더 행복합니다.




세상에는 그렇게 흔하다는

사랑이라는 말을 듣지 못해서

온 몸을 감싸안고

고독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한 마디의 말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이 말이 행복과 불행의 분기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우리 역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밑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더 풍성히 임합니다. 사랑할수록 행복해 집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불신 이웃들이 보고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다르다고 인정하게 됨으로 전도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아무쪼록 사랑의 계명을 매일의 생활 속에 실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많은 사람과 나누면서 살아가는 행복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 양 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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