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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목하게 하는 직책 (고후 5: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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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고후 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1. 새로운 피조물의 모든 경험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의 결과이다.

사람들은 막연하게나마 미래를 향한 어떤 기대를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그 기대를 향한 발걸음의 기초는 언제나 자신의 과거의 경험들입니다. 미래를 향한 새로운 능력을 의지하며 그 기대를 향해 나가야 하지만 미래를 경험해 보지 못한 인간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과거의 경험들이 유일한 기초입니다. 승리의 경험뿐만 아니라 실패의 경험들까지 미래를 향한 기대에 동원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과거의 경험에 의지한 인생의 결국은 기대에서 멀어지고 동일한 결말에 도달합니다.

솔로몬은 전 1:14에서 그러한 인생에 대해서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나의 경험”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생은 모두 헛된 인생의 종국을 맞이한다는 고백입니다. “나의 경험”은 세상에서 외형적으로 잘 나가는 모습들을 만들어 낸 경험이라 할지라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들입니다. “나의 경험”은 지식을 채우고, 물질을 채우며, 쾌락을 채울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평강과 안식은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러한 인생들을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가운데 보내주시고, 죄인 된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평강과 안식을 누리는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만이 새로운 능력으로 미래를 향한 새로운 기대를 향해 나갈 수 있습니다. 고후 5:17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하며 우리에게 그러한 능력이 주어졌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능력은 영원히 새로운 것을 향해 나가게 하시는 특별한 경험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통 경험입니다. 이 경험은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경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시며, 부활 승천하신 역사적인 사건과 함께하는 경험입니다. 세상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경험이 실패한 경험이며, 저주 받은 경험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복된 소식인 복음의 경험입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사 52:13에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라고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사 52:13-53:12에서 예언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형통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과 우리에게 “형통한 일”이라는 선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회복을 위한 일이었기 때문에 형통한 일로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피조물 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경험은 이러한 경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고난의 경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죽음의 경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부활의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형통한 일의 경험입니다. 세상은 고난이나 실패를 형통한 일로 보지 않습니다. 연약함과 부족을 형통한 일로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할 때마다 형통한 일이라고 보십니다.

모든 성도들은 그 모든 형통한 일의 근원이 되는 경험을 지닌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 경험입니다. 이 경험은 미래를 향한 새로운 능력을 주는 경험입니다. 인간 스스로의 수고와 노력으로 얻은 경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에게 주신 경험입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주신 역사적인 경험입니다. 그래서 고후 5:18의 첫 문장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라고 선포합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경험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은 “만물”이 아닙니다. “모든 것”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즉 “그 모든 것”으로서 고후 5:18에 이르기까지 사도 바울이 말해왔던 진리이며, 특별히 고후 5:17에서 언급하는 새로운 피조물로의 변화를 말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모든 변화의 경험”이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입니다.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여 주신 새로운 피조물의 경험을 통하여 아름다운 미래를 향해 나갈 수 있습니다.

2.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화목의 두 경험을 통해 살아간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만들어 주신 새로운 피조물의 경험은 두 가지로 구분되어 설명됩니다. 고후 5:18의 두 번째 문장부터 그 두 가지의 경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이루어진 첫 번째 경험은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경험은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경험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 자신과 화목하게 하신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려놓으신 경험입니다. 인간의 조건이나 상태나 반응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지로 일방적으로 이루어 주신 선물로서의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짊어지신 십자가의 일을 통하여 우리들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려놓으신 경험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서의 경험입니다.

여기서 “화목하다(카탈랏소)”라는 단어의 어근은 “교환하다, 바꾸다”입니다. “화목”은 두 당사자 간에 서로 주는 것이 있고, 받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하게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있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그 화목의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일방적으로 진행한 사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없는데, 일방적으로 받기만 한 왕의 선물입니다.

두 번째 경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람들을 하나님에게로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신 경험입니다. 여기서 “직책(디아코니아)”은 “집사”로서, 종으로서 봉사하며 섬기는 직분을 담당하는 직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받은 경험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과 같은 화목의 직책을 요구하십니다. “화목의 직책”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요구와 조건이 담긴 명령입니다.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종 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요구하시는 직분의 명령입니다.

“화목의 직책”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은 경험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그들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직책은 우리들이 선택한 경험의 직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요구하신 직분으로서의 경험입니다. 순종과 불순종에 따라 복과 저주가 갈라지는 하나님의 요구 명령입니다. “집사(디아코니아)”라는 직책은 성도로 부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처음부터 받은 은사로서의 직책입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책”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는 은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선물로 주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신 십자가의 경험과 우리에게 명령으로 주신 화목케 하는 직책의 경험은 우리들이 아름다운 미래를 향해 나아갈 때마다 출발선이 되는 경험이며, 모든 인생을 하나님의 평강과 안식 가운데 누릴 수 있게 하는 경험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 두 경험의 능력으로 만들어져 갈 때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신명기 28장에서 언급하신 “복과 저주” 중에서 언제나 약속하신 그 복을 누리는 형통한 역사가 되어집니다.

지난 세월 동안의 우리의 삶이 “내 경험”을 통한 삶이었다면 과거의 삶은 모두 헛된 삶입니다. 그리고 미래의 삶도 헛된 삶을 향한 무모한 도전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과거의 경험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로서의 경험이었다고 고백한다면 그 모든 경험은 “하나님과 함께 했던 공동 경험”으로서 승리의 경험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 자신과 화목하게 하시는 역사적 경험 속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경험을 깨닫고 확신하는 가운데서 미래를 향한 기대 가운데로 나가도록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상처받은 과거의 모든 삶들, 우리의 곤고했던 지난날들, 우리의 억압받은 자유 상실의 모든 날들, 우리의 포로 되었던 과거의 모든 슬픈 역사들은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이 아닙니다. 죄악 가운데 탄식하던 우리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내기 위한 하나님의 눈물과 사랑 가운데 이루어졌던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물의 역사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공통 경험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그 모든 경험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슬픔을 알며,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고후 5:17에서 정리되어지는 “이전 것”이 되며, 미래의 “새 것”을 맞이할 준비가 됩니다. 과거를 정리하는 경험으로서 하나님과 화목케 된 성도들은 “화목하게 하는 직책”의 경험으로서 미래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화목케 하는 직책에 순종할 때마다 열려집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형통함이 함께하십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는 “화목케 하는 직책”의 수행에서 나옵니다.

3. 새로운 피조물의 화목하게 하는 직책은 용서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우리의 왕 되시며 만왕의 왕 되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의 경험은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영원한 경험입니다. 반면에 우리의 주인 되시며 주권자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으로 주신 화목케 하는 직책의 경험은 언제나 우리들이 순종하며 감당해야 하는 우리의 책임이 되는 경험입니다. 이 두 경험 속에서 이루어지는 화목케 하는 직책의 수행은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받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평강과 안식을 누리는 지상 최고의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책임을 다해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잊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뢰할 만큼 “자기 저주적 맹세”까지 하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보호와 축복의 약속을 알려 주셨습니다. 노아의 홍수 후 무지개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향해 화살을 겨누게 하시며 맹세하셨습니다. 지금도 무지개의 화살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만을 의지하며 우리의 책임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의 견고함을 근거로 우리의 순종과 책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이 율법이며 명령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견고한 약속 안에서 우리의 책임을 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종 된 우리의 책임인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순종하며 감당할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할 때 복을 누렸던 것처럼 우리의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고후 5:19에서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라는 말씀 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여 주신 화목의 직책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 직책에 대한 구체적인 명령도 담겨 있습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책은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행해 주신 공통경험을 통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화목”은 양 당사자가 서로 주고받으면서 이루어집니다. 그중에서 “화목케 하는 직책”은 한 편이 다른 편과 관계하여 변하는 것입니다. 다른 편이 변하지 않고 있는 그 때에 그 편을 위하여 내가 변하는 것이 “화목의 직책”입니다. 고후 5:19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화목케 하신 방법을 네 단계로 설명해 주십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목케 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셨습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둘째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세상(코스모스)”은 관사가 붙지 않은 표현으로서 “사람”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 자신에게” 화목할 수 있게 변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어떤 요구를 하여 그것이 이루어질 때 자신이 “사람들에게” 화목으로 다가가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즉 화목을 위해 하나님 자신이 변하여 다가가셨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경험들은 상대가 변하여 자신에게 다가올 때 화목하고자 하지만 하나님은 그 반대이셨습니다.

셋째로,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화목의 당사자인 인간의 죄를 인간에게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직접 짊어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인간에게 돌리지 않는 것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목은 “용서”를 전제로 합니다. 용서는 화목의 상대가 변하지 않을 때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모든 것을 용서하며 그의 죄값을 내가 대신 짊어짐으로써 상대와의 적대관계를 무너트리는 것이 화목의 직책입니다.

넷째로,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라고 하십니다. “화목하게 하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하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 짐을 짊어지신 십자가 사건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험하게 하셨던 “십자가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직책뿐입니다. 이것이 화목의 상대편인 우리들을 향한 유일한 요구입니다. 우리가 지금 지닌 직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의 화목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이 직책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유일한 요구입니다. 우리의 모든 능력, 은사, 소유, 시간, 생명은 하나님의 명령인 “화목의 직책”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경험케 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며,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화목의 경험도 맡겨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김 종 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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