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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타작마당에서 드린 화목제 (삼하 24: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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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과 하를 말씀을 나눈 지가 퍽 오래되었는데, 오늘 사무엘하의 마지막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윗을 중심해서 허락되어진 은혜들이 여러분들이 오래도록 간직되어 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다윗도 때로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가장 훌륭한 신앙의 모습으로 살아가다가도 연약한 모습으로 육신의 정욕에 넘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그가 자신의 명예에 대한 욕망으로 넘어지는 모습으로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본문 말씀은 바로 24장에서 다윗이 인구조사라고 하는 한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그것이 미련한 일이고,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일이였는가를 고백하면서 하나님께서 갓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세가지 형벌에 대한 선택과 그 형벌을 받아가는 다윗의 고통과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 온전히 회개하고 내어 놓는 모습들이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시는 사랑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나타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부모는 절대로 매를 들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자라라고, 아무렇게나 자라도 좋다고 생각한다면 부모는 자녀에 대해서, 자녀의 행위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가 바른 길로, 옳은 길로, 믿음의 길로, 더 나아가서 신앙의 길로 나아간다고 하면 부모는 고민할 것이고, 때로는 채찍을 들어서라도 바른 길로 가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인구조사가 잘 못 되었다고 하는 부분을 분명하게 의사를 밝히셨습니다. 다윗이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기강을 삼고, 그리고 군대의 수를 헤아림으로써 어떤 국가의 통치를 마련하겠다고 하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인구조사의 본심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군대가 되는가를 조사함으로써 자신이 성공한 지도자라고 하는, 강력한 지도자라고하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 인구조사의 본심이었습니다. 그 감추인 본심은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다윗은 결국 10달에 가까운 많은 시간들을 하는 동안에 자신이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기 시작을 했습니다. 요압장군을 시작해서 많은 사람들이 인구조사를 해서 당신의 사람들이 130만명이나 된다고 하는 자랑스러운 통계를 내어 놓았을 때 다윗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는 자신의 행위가 잘 못 되었다고 하는 것을 깨달은 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하나님, 제가 미련하게 행동하였습니다. 하나님, 이 행동은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이나 다름 없는 그런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냥 간단하게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종, 갓을 다윗에게 보내셨습니다. 다윗이 육신의 정욕에 잘못된 판단을 했을 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그에게 보내셨던 것처럼 이번에 인구조사를 통해서 그의 자만심과 인간적 자랑으로 잘못했을 때 갓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를 그에게 보여주시면서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셨습니다. 최소한 네가 책임 있는 지도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지도자라고 하는 것은 권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무와 책임도 따라간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다윗에게 갓은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왕의 땅에 7년동안 기근이 있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서 석 달동안 도망을 하겠습니까? 아니면 왕의 땅에 삼일동안 온역이 있을 것입니까? 온역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무서운 전염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칠 년, 석 달, 삼 일, 이렇게 날짜로 보면 칠년 보다는 석 달이, 석 달보다는 삼일이 좋을 것 같지만 사실 선택은 다윗이 하지 않았습니다. 14절에 보면 이 하나님의 엄청난 선택의 요청에 대해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심이라. 일단 다윗은 하나님께서 형벌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요, 채찍을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라고 인정을 하고 시작합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

무슨 말입니까? 이 세 가지 형벌 중에서 첫째와 셋째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의 내용이고, 두 번째는 간접적인 심판입니다. 왕의 대적, 이웃나라의 군사적 침략을 받아서 왕과 백성들이 피난을 하고, 고통을 받는 그런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직접 빠지기 원한다 이 말은 여호와께 직접 매를 맞기 원한다 이런 표현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두 번째는 제외가 되는 것이지요. 첫 번째 칠 년 동안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기근을 맞을 것인지, 아니면 삼 일 동안 전염병을 선택할 것인지, 그러나 두 번째 다른 나라의 왕을 통해서 매 맞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이왕 매 맞는다면 하나님의 손에 직접 매를 맞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결국 두 번째에서는 선택에서 빠졌습니다. 첫 번째와 세 번째가 남았는데, 그것을 다윗이 선택하지 않고 첫 번째와 세 번째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하나님이 스스로 선택하시도록 돌려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세 번째 온역을 선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칠 년 동안의 기근은 얼마 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왕 시대에 기브온 민족을 학살한 것에 대해서 삼년 동안 기근으로 심판한 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거듭 기근으로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삼 일 동안의 전염병도 엄청난 심판이었습니다.

무려 삼 일동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 제일 북쪽 지역에서 남쪽지역까지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칠 만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그 소식을 듣고서 몸부림을 쳤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잘 못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이 백성을 치십니까? 차라리 나와 내 집안을 하나님께서 심판하기를 원합니다. 얼마나 다윗이 하나님 앞에 눈물로 호소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먼저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13절, 다시 다윗에게 하나님의 세 가지 심판의 내용을 정하면서 그 내용을 잘 읽어보면 아주 중요한 단서가 거기에 나와 있습니다. 왕의 땅에 7년 기근이 있을 것인가? 왕의 땅에 3년동안 전쟁이 있을 것인가? 지금 하나님의 종 갓은 다윗에게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이 땅이 누구의 땅입니까? 그 이야기를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구조사를 한다고 하는 것은 곧 이 땅에서 성공한 지도자라고 하는 것은 온 백성들에게 온 지역에 알리고 싶은 것 아닙니까?

왕의 땅에서 지금 하나님의 종 갓은 계속해서 다윗왕에게 그것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왕의 땅에서, 왕의 땅에서, 하지만 그 땅은 누구의 땅입니까?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실 때 그것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그 땅은 곧 하나님의 땅입니다. 그 땅은 곧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업이 된다.

그런데 그 하나님 주신 축복의 땅을 자기가 자기의 소유로 삼은 것처럼 다윗은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가 강성해 지고, 자기가 부유해 진 것이 자기의 공로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인구조사의 동기는 거기에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하나님의 종은 반어법으로 시작되면서 그를 지금 깨닫게 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 여러분들이 경제적으로 잘 되었을 때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이것은 나의 돈, 이것은 나의 재산, 이것은 나의 물건, 나의 것이 얼마나 많아 졌는가를 여러분,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건강이 좋아지셨을 때 이 건강을 위해서 내가 봄, 가을로 보약을 먹고, 내가 그 많은 시간동안 약수터를 다니면서 건강을 챙기고, 얼마나 내가 헬스를 하고, 얼마나 내가 수영을 하고, 얼마나 내가 에어로빅을 다니면서 이 건강을 챙긴건데, 이 건강은 내 건강이고, 내가 만든 건강이지 이런 생각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잘 될 때, 여러분의 삶이 잘 되어질 때, 그것을 여러분의 땅으로, 여러분의 땅으로 여러분들은 그렇게 외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다윗 앞에 하나님은 당신의 종을 보내서 말씀합니다. 당신의 땅에서 한 번 벌을 받아 볼래요? 당신의 땅에서 한 번 기근을 한 번 받아 볼래요? 당신의 땅에서 한 번 전염병을 겪어 볼래요? 다윗은 기겁을 했습니다. 아, 이게 내 땅이 아닌데, 이게 내 땅이 아닌데, 이걸 내 땅처럼 행동 했구나.

오늘 이 부분은 정말로 많은 부분을 생각하게 하는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겸손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귀한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7만명이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다윗은 쓰러졌습니다. 내 잘못이신데, 하나님 어찌 해서 백성들을 치십니까? 그렇게 부르짖고 있는 다윗에게 다시금 선지자 갓이 찾아왔습니다.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소서. 제단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화목의 제단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제단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입니까? 하나님께서 심판의 사자로 천사를 보내서 단에서부터 저 밑의 브엘세바까지 심판을 하신 후에는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와서 심판의 사자가 이제는 예루살렘을 치려고 할 때다.

바로 그 때 예루살렘 시온산의 가장 중심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었습니다. 심판의 천사가 그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다윗이 회개하시는 것을 보면서 이제는 더 이상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심판의 사자에게 보냅니다. 족하도다. 족하도다. 족하도다. 이제는 심판을 멈추어라. 심판의 사자가 멈춘 자리가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었습니다. 바로 그 곳을 하나님 앞에 화목의 제물을 드리고, 죄사함의 제단을 쌓고, 그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선지자 갓의 권면을 받아들였습니다. 다윗이 여호와를 명하신바 갓의 말대로 올라갑니다. 선지자 갓의 말을 여호와의 명령으로 바꾸도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으로 왕과 그의 신하들이 올라갔습니다. 아라우나가 깜짝 놀랐습니다.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내가 이 땅을 사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단을 쌓기를 원하는데, 이 땅을 내게 좀 팔아라.

22절에서 23절에 보니까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고합니다. 원컨대 내 주 왕은 좋게 원하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왕이 원하시는 것 다 드릴테니까 땅을 원하시면 땅을 가지시고, 소를 원하시면 소를 가지시고, 다 가지소서. 제단을 쌓으신다구요? 그럼 번제에 드릴 소가 필요하실텐데, 그 제 소를 드리겠습니다.

농사꾼에서 농사 짓는 소는 뭐예요? 가보 1호잖아요. 우리가 농사짓는 분들 보면 제일 소중한 것이 소 아니겠습니까? 자식보다 귀한 것이 소라고 하잖아요. 소가 농사를 지어 주어야 먹고 살고, 자녀들 학비 보태기 때문에 얼마나 소를 소중히 여기는가? 소를 쓰다듬어 주고, 쓸어주고,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모릅니다. 농사꾼 그 소를 당신의 제단에 제물로 드리겠다는 거지요.

장작이 없으십니까? 장작이 없다면, 소의 멍에를 내가 장작으로 내어 놓겠습니다. 모자라면 농사짓는 각종 기구, 도구를 뽀개서 제단에 장작으로 제가 드리겠습니다. 아라우나의 헌신의 마음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넉넉하게 남아있어도 드리기 어려운데, 자신의 농사에 가장 중요한 소와 그 소를 통해서 사용되어져야 할 각종 멍에와 마당질 하는 제구까지도 제단에 제물로 내어 좋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아라우나의 헌신의 마음을 통해서 얼마나 감동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정말 자기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그 소중한 것을 제사를 위해서 내어놓겠다는 거예요. 자기의 제사가 아니라 왕의 제사에 그것을 내어놓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헌신의 마음이 있습니까? 우리가 매주일 헌신예배를 드리는데 헌신예배가 뭐예요? 바로 이 아라우나의 마음이 헌신의 마음인 줄 믿습니다. 계산하는 마음이 아니잖아요. 헌신이라고 하는 것은 계산된 행동이 아니예요.

헌신예배를 드리는 부서들은 이 아라우나의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헌신의 예배를 드리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헌신의 마음을 가졌던 이 아라우나보다 다윗은 한 수 위였습니다. 아니다. 고마워. 나는 값없이는 제사를 안 드릴거야.

이것은 내 문제입니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제사이다. 내 눈물이, 내 헌신이, 내 정성이 들어간 제사여야지. 당신이 나에게 모든 것을, 당신이 그 삶의 중요한 소와 멍에를 내게 제공해 주겠다고 하지만 너무나 감사하지만 그러나 내 제사는 내 눈물이 들어가야지.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진다면 예물은 그래서 뭐라고 표현합니까? 하나님, 피묻은 예물을 주님 앞에 드립니다. 피는 뭐예요? 생명이잖아요. 내 생명과 같은 예물을 주님 앞에 드립니다. 여러분의 예물은 여러분의 피묻은 예물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남아서 드리는 게 아니잖아요.

어떤 젊은이가 직장을 다니고, 봉급을 받아왔는데, 부모가 권면합니다. ‘십일조를 드려야지.’ ‘그러면 이거 다 드려요? 그럼 아까운데....’ ‘아니야, 아깝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아까운 마음이 드는거지, 십의 일은 하나님의 거야. 아깝다고 생각하지마. 하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해야지, 내거라고 생각하니까 아까운거야. ’ 장성한 아들에게 부모가 그렇게 가르칩니다.

아들이 저에게 고백합니다. 목사님, 처음에 그것 드릴려고 하니까 되게 아깝대요. 한 150만원 받아서 15만원 십일조 드릴려니까 되게 아깝대요. 그런데 부모님의 그 말씀을 듣고, 제가 그 마음을 정해서 ‘아, 이것은 하나님의 거다.’라고 생각하고 드리기 시작하니까 이제 아까운 마음이 없어졌대요.

우리 젊은이교회, 꿈지기교회의 십일조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요. 왜 그렇습니까? 아까운 마음이 들어요. 내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젊은이교회 목사님에게 그런 권면을 드렸습니다. 젊은이들이 십일조 하는 신앙의 성숙이 되기 전에는 젊은이교회가 독립되기 어렵다. 예배만 따로 드린다고 독립이 아니잖아요. 그들의 정성이 들어가지 않으면 진정한 예배가 드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다윗은 아라우나가 모든 것을 제공해 준다고 하였지만, 그것을 감사함으로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정당한 값을 주고, 내가 땅과 소와 모든 것을 사겠다. 다윗, 정말로 그는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세상은 공짜를 좋아하는 세상이잖아요. 너무나도 공짜를 좋아하면서 살아요. 그래서 우리 사회가 최고로 인기를 끄는게 뭐예요? 복권문화 아니예요? 로또복권으로 시작해서 무슨 복권, 무슨 복권에 목을 매고 살지요. 공짜로 횡재하는 것 아니예요? 온통 거기에 신경을 쓰지요.

저는 여러분들이 장난 삼아, 취미 삼아 한 두장 사는 것은 나무랄 마음은 없습니다만은, 그것을 가지고 목을 매는 사람은 정말 우리교회는 없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니, 넓은 의미에서 우리 크리스찬들은 그런 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그 이야기 드렸지요? 어떤 집사님이 목사님에게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왜요?’ ‘제가 복권을 샀는데요. 이거 당첨되면 반은 교회에 바치겠습니다.’ 목사님이 재밌어요. ‘내가 기도해 보니까 하나님께서 복권 당첨 안 하게 해 준대.’ ‘왜요?’ ‘전부를 드린다는 사람이 줄 섰는데, 절반 드린다는 사람을 왜 기도해 주냐고...’ 복권에 마음을 두지 마세요. 공짜에 마음을 두지 마세요.

하나님의 은혜는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는 너무 귀하기 때문에 값없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에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 무임승차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정성이 담겨진 예배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시간을 여러분이 내어야 하고, 여러분의 물질을 여러분이 준비해야 하고, 여러분의 장소를 이 여러분이 만들어야 돼요. 만약 이 평안의교회가 누군가가 지어줬다면 삼성그룹이, 현대그룹이 공짜로 지어줬다면 예배가 되겠습니까?

해외에 교회를 건축하는 일도 그래서 우리는 어려운 해외에 있는 그 가난한 백성들이지만, 당신들이 헌금을 정성껏 준비해서 땅을 사든지, 당신이 건축비의 일부를 준비하든지, 그렇게 되었을 때에 그렇게 도와드리겠습니다. 선교사님이 후보지를 정할 때에도 권면이 그것입니다.

그들의 헌신이 최선을 다한 헌신이 준비된 교회에 그들의 대부분은 땅을 사거든요? 필리핀 같은 데만 해도 예를 들어서 500만원을 들여서 땅을 한 300평 산다고 하면, 5억도 더 되는 돈입니다. 그 가난한 사람들이 그 돈을 마련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지금도 5억을 준비하라고 그러면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이 정말 어려운 그들이 준비하고 준비해서 일부를 모아놨을 때 교회를 1500만원, 2000만원을 들여서 교회를 완성시켜 주는 거예요. 그럴 때 그들이 그 교회에서 보람있고, 그 교회에 감격이 있는 거예요.

교회 행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부서가 행사를 할 때 100만원 예산 들면, ‘목사님, 백만원 지원해 주세요.’ 그러면 지원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우리가 100만원 예산이면 일일찻집을 하고, 우리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준비를 해서 정말로 온갖 수고와 땀을 다해서 30만원을 준비했다면 우리가 최선을 다했는데, 30만원을 준비했는데, 나머지를 도와달라고 하면 그 손, 그 부서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우리의 눈물과 우리의 정성이 담겨져야 합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은 50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던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드리는 기도를 들으신 줄로 믿습니다.

기도를 들었다는 말은 이제 진노하심을 멈추셨다는 것입니다. 찰스 웨슬리는 이 부분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번제와 화목제를 받으시고, 진노를 멈추셨다고 하는 것은 모두 은혜였다. 그것은 모두 은혜였다.

여러분, 하나님이 진노하신 것도 은혜 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고난과 시련의 시기를 멈추게 한 것도 은혜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서 행동하시는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나의 나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 고난도 은혜요, 고난을 멈추게 하시는 것도 은혜인 줄 믿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멈추게 해 주는 것도 은혜요, 우리가 자식의 종아리를 걷어서 채찍을 때리는 것도 은혜라 그 말입니다. 받아주는 것만 은혜가 아닙니다. 다윗은 바로 그 부분을 알았습니다. 그 은혜를 위해서 자신이 최선을 다합니다. 아무리 왕이지만, 권세를 가졌지만 아무리 기득권이 있지만 그는 은혜에 값싸게 편승하지 않았어요.

왕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왕에게 거저 가져 가십시오 라고 자기의 땅도, 소도, 멍에까지도 내어 놓았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모습이 왕의 모습이 아니라 은혜를 받아야 할, 용서를 받아야 할 다윗이라는 모습으로 그는 하나님 앞에 선 줄로 믿습니다.

1944년 10월 2차 세계대전이 끝무렵일 때 일본은 이제 전세가 기울어서 점점 후퇴하고 있었습니다. 동남아시아를 다 석권하고, 이제는 오세아니아, 호주, 뉴질랜드도 점령할 기세였는데, 거기를 점령하려고 하다가 하와이를 건드리면서 미국이 개입하게 되었고, 결국은 점점 미국을 중심한 연합군에게 밀려서 전세가 심각하게 기울었습니다.

당시의 해군제독이었던 다케시로 오시니라고 하는 제독이 고민 끝에 특단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밖에 없다. 그는 해군 항공대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이제는 정상적인 공격을 해서는 이길 수 없다. 항공기마다 250㎞가 되는 엄청난 폭탄을 싣고, 항공기가 이륙하기도 어려울 만큼 그 적은 항공기에다가 250㎞의 큰 탄두를 싣고서 미국 항공모함과 구축함을 돌진해서 들어가는 카미카제 특공대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의 명령으로 2519명의 해군 조종사들이 카미카제가 되어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도 일본은 역전을 하지 못하고, 결국 1945년 8월15일날 신으로 인정받던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고,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 앞에서 이제는 내가 신이 아니고, 인간이라고 고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이 신 노릇을 하다가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오는 경우입니다. 왕이 신으로 떠받치던 그 천황이 항복선언을 했다는 그 소식을 들은 오시니 제독이 사무라이 칼로 자기 팔을 갈랐어요. 그러면서 나는 죽음으로써 이 용감한 자들과 그의 가족들에게 용서를 빌고 싶다.

하지만 수천명의 그 조종사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그 사랑하는 아들들을 내몰아서 고통받는 가족들에게 이 한 사람의 자결이 해결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살아서 이런 저런 변명을 하는 것보다는 죽음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는 그 부분이 얼마의 용서는 되었을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속죄의 제단으로 삼은 다윗, 자신이 하나님앞에 인구조사를 한 잘 못된 그의 삶을 거저 그는 넘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이 제사에 여러 사람들이 동참하고는 있지만 그리고 이 제사에 소와 장작으로 헌신하려고 하는 아라우나도 있지만, 그러나 내 눈물로, 내 정성으로, 내 피 묻은 제물로 주님 앞에 쌓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제단이 있기에 우리는 희망이 있는 줄 믿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 그 십자가의 보혈로 세워진 이 제단이기에 우리가 여기서 기도할 때 들으시고, 여기서 기도할 때 주님께서 응답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피값으로 세우신 제단이 있기에 우리는 행복하고,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되고, 어떤 인간적 방법으로도 되지 않지만 오직 예수로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오늘 우리에게 능력이 되고, 주님, 그 십자가의 보혈의 힘을 힘 입어 주의 백성된 우리가 다시금 주님 앞에 설 때 타작마당에서 드렸던 다윗의 화목제처럼 오늘 우리 제단에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고백되어지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 채찍을 맞아도, 매를 맞아도, 주님의 손에 맞기를 원했던 다윗, 다시금 교만함과 인간의 자만심을 버리고, 순전한 모습으로 돌아왔던 다윗, 아라우나의 그 헌신과 섬김도 뒤로하고 자신의 피값으로 제단을 쌓기를 원했던 다윗, 그 다윗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원합니다. 성도들의 삶 속에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화목제물로 드려 우리의 삶에 진노하심을 그치게 하는 응답의 삶이 되기를 원하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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