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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루스드라의 앉은뱅이 (행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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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서 주간지, 일간지 등의 신문과 잡지를 많이 봅니다. 그런데 거기에 난 광고 중 제일 과감하고 많이 나는 광고는 다이어트 광고입니다.
  또 하나는 건강식품광고입니다. 다이어트 광고에도 보면 허망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잠자면서도 살이 빠진답니다. 그렇게 쉬운 다이어트가 어디 있습니까? 가시오가피를 만병통치약 같이 선전을 하는데 가시오가피는 단순한 하나의 식물입니다. 우리 몸에는 해롭지 않은 식물에 불과합니다.

  또 하나 제가 놀란 것은 역술인들의 광고가 굉장히 많다는 것입니다. 점쟁이나 무당들이 매일 매일 거액의 광고를 하고 있습니다. 신문 하나만 하는 게 아닙니다. 왜 그렇게 자꾸 합니까? 광고하는 것만큼 효과가 있고 수입이 있으니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주변에 광고가 많은데 이것을 심리적으로 접근해 보면 광고는 우리 눈을 속이고 있습니다. 다음에 우리 마음을 속입니다. 그러니까 광고는 사람을 속도록 해야 일등광고입니다. 사람이 속지 않는다면 그 광고는 별 볼일 없는 광고입니다. 기발한 말 한마디가 좋다 싶지만 그게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주목할 한 사람

  우리는 사도 바울이 전도하면서 만났던 루스드라의 앉은뱅이를 주목합시다.
  루스드라의 앉은뱅이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걸어야겠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앉은뱅이입니다. 내가 한번이라도 걸어보았으면 하는 생각까지도 포기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고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가만히 앉아서 구걸하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사도 바울이 말씀을 전하는 그 집회 현장에 와 있었습니다.

  8절에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전하는 그 자리에 앉아있다는 말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교인이 우리와 함께 예배드리는 이 자리에 와서 환영받겠습니까?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자리에 함께 와 있다면 어느 정도 환영을 하겠습니까? 이 사람을 가족이 데려왔는지, 친구가 데려왔는지, 이웃이 데려왔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는 그 자리에 이 사람이 와서 앉아 있는 것입니다.

  9절에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말한 것을 듣거늘' 이 앉은뱅이가 집회자리에 와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을 지금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바울이 그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보는데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라고 했습니다. 앉은뱅이는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고 있습니다. 앉은뱅이가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앉은뱅이가 일방적으로 듣고만 있던 것이 아니고 듣고 있는 이 앉은뱅이를 사도 바울이 주목하여 보았는데 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앉은뱅이와 바울에게 쌍방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루스드라에 복음을 전하러 갔고 이 앉은뱅이는 바울이 복음전하는 집회현장에 와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을 듣고 있고 사도 바울은 그 듣고 있는 앉은뱅이를 통해서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결과

  굉장한 사실을 여기 묘사하고 있습니다. 앉은뱅이가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10절에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고 했습니다.
  이 세 구절을 한데 묶어서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네 발로 걸어 일어서라'고 할 때 '뛰어 걸었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발로 일어서서 뛰어 걸을만한 믿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바울이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보았다는 그 믿음, 이 앉은뱅이가 가지고 있었던 구원받을만한 그 믿음이 도대체 어떤 믿음인가를 오늘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보았다는 구원받을만한 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앉은뱅이도 위대하지만 그 믿음을 다른 사람은 못 보고 있었는데 바울은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도 루스드라에 사도 바울의 전도집회현장으로 영적으로 가 보시기 바랍니다.

  이 앉은뱅이가 사도 바울이 말씀을 전하는 그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이 아주 중요합니다. 거기에 누가 데리고 왔던 간에 바울이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그 자리에 이 사람이 와서 그 말씀을 듣고 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경험입니다.
  우리는 말씀듣는 자세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들을 기회가 많은 것이 곧 은혜받을 기회가 많다는 게 아닙니다.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말씀을 듣는 자세입니다. 이 자세가 바르면 한 번만 들어도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 자세가 틀리면 아무리 들어도 하나님과 우리와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현장에서 말씀을 듣는 이 앉은뱅이의 믿음을 오늘 우리가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현장과 들음

  이 사람이 바울이 하는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듣는 데에 있어 두 가지를 주목을 해야 됩니다. 하나는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도 전화로 듣는 것과 영상으로 보는 것과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듣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이 사람은 지금 사도 바울을 보고 듣는 것입니다. 바울이라는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도를 현장에서 지금 만나서 듣고 있는 것입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고 듣는다고 할 때 말씀을 듣는다는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TV를 통해서 설교를 들을 수도 있고 테잎을 통해서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 드리는 현장에서 얼굴과 얼굴로 대하면서 성도들이 만나고 설교자를 만나는 것은 영상으로 듣는 것과 전혀 다른 경험입니다.    또 한 가지 요소는 이 앉은뱅이는 경청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집중하여 듣고 있는 것입니다. 경청의 반대말이 무엇입니까? 딴청입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칠 때 딴청 피우는 애들이 많습니다. 들은 척도 안 합니다. 마음을 열고 집중하는 것을 가리켜 경청한다고 합니다. 이 앉은뱅이는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사람은 아니지만 지금 그는 마음을 열고 바울의 입에서 떨어지는 그 말씀을 집중해서 듣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할 때 앉은뱅이에게 배울 점이 이 두 가지입니다. 현장에서 얼굴과 얼굴로 대하며 들어야 됩니다. 설교학에서도 공간성과 시간성과 인격성을 말합니다. 공간성은 예배드리는 현장을 말합니다. 현장이 있는 예배라야 그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공간이 없는 예배가 많습니다. 예배 장소는 안 가면서 예배드릴 수 있는 비디오문화는 우리에게 주는 편리면서도 해독입니다. 몸이 아파서 입원하고 있으면서 영상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이 성한데도 꼭 주일날 예배드리는 현장에 가야 되느냐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야 됩니다. 왜 가야 됩니까? 이 현장이라는 게 무엇을 살려줍니까? 인격성을 살려줍니다. 내가 여기 왔다고 하면 '나'라는 인격이 왔다는 말입니다. 나라는 인격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것을 말합니다. 현장에서 듣는 것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봉사의 현장이 있어야 됩니다. 내가 봉사하는 섬김의 현장이 있어야 됩니다. 현장에 왔지만 주목하지 않고 집중하지 않고 마음을 열지 않고 헛되이 듣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여기 왔으면 마음을 열어야 하고 집중을 해야 됩니다.

  엘리사 선지자에게 찾아온 아람의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고침받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인용을 하면서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음을 받은 자는 오직 나아만 하나뿐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 많은 나환자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단강물에 가서 씻음을 받고 나은 나환자는 나아만 뿐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처음에는 요단강 물에 씻으라고 할 때 발끈했습니다. 다메섹에도 요단강보다 큰 강이 있고 더 맑은 강이 많은데 왜 하필 요단강이냐? 내가 요단강에 가서 씻을 이유가 없다 하고 말머리를 돌려서 가려고 하는 나아만을 종들이 만류했습니다. 종들은 엘리사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엘리사의 말대로 우리 주인이 요단강에 가서 씻기만 하면 낫겠구나 라고 믿고 있는데 나아만은 그것을 못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들이 주인의 말머리를 붙잡고 애걸을 합니다. "주인이여, 병을 고치러 오지 않았습니까? 선지자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로 하면 될 것 아닙니까?"하고 종들이 만류했습니다. 나아만이 가만히 듣고 보니까 그 말이 옳았습니다. 종들이 만류하면서 해석을 해줄 때 들어보니까 옳다는 것입니다. 그게 설교입니다.

  엘리사가 하는 말은 성경계시입니다.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나아만이 이해를 못할 때 종들이 이야기를 할 때 나아만이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게 설교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음성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설교자의 말은 하나님 음성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해석입니다. 이 말씀을 잘 들어보면 이 말씀안에 하나님의 음성이 묻어있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종들의 말을 듣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었더니 어린 아이와 같이 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나아만이 입은 은혜의 분기점이 무엇입니까? 엘리사가 하는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믿음

  여러분, 우리는 이런 사건을 볼 때 자꾸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난 것만 주목을 합니다. '야, 집회할 때 저런 사건이 일어나면 얼마나 흥행이 되겠는가?' 우리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난 것만 치중하는데 이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을 바울은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어디서 생겼느냐는 것입니다. 그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그 현장에 가서 앉아 있는 것만 해도 이 사람에 대해서는 기적입니다. 거기까지 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사람이 거기 나와 앉아 있다는 것이 기적이었고 거기서 이 사람은 자기에게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고 그 말씀이 이 사람의 영혼 속에 지금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는다고 할 때 앉은뱅이 입장에서 듣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 한번 바로 들어보기 위해서 앉은뱅이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 앉은뱅이 팔자가 되어야 말씀을 들을만한 정신을 차리겠습니까? 멀쩡하게 걸어다닐 때 영의 귀를 여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앉은뱅이를 고치려고 루스드라에 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이 따로 있는데 사람들이 계획하지도 않은 앉은뱅이가 걷고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본래 집회계획에 없는 일입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 가서 앉은뱅이를 일으키겠다는 예고를 하고 간 게 아닙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 간 것은 한 가지 목적 밖에 없습니다.

  15절에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죄인들이 예수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바울이 갔는데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이 계획도 하지 아니한 앉은뱅이를 만나게 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 베풀어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집회의 목적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하여 믿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도록 그 기적을 활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목적이 항상 우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일은 제쳐놓고 교회가 목표한 사업을 가지고 이것이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을 보아야

  이 사람이 말씀을 듣고 있는 광경을 바울이 주목하여 보았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으로 보였느냐면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요즘 젊게 보이려는 몸부림이 대단합니다. 이 나라의 최고 지도자들이 선거유세하는 중에 TV에 나오려니까 주름살을 펴고 방송하는 시대입니다. 젊어 보인다는 그 자체가 젊음의 본질입니까? 그 젊게 보이는 자체가 젊음의 능력이 됩니까? 아무리 따져보아도 젊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젊어지려는 몸부림이 지금 보통이 아닙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의 앉은뱅이를 보았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주 신비로운 본문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앉은뱅이를 본 것은 앉은뱅이가 갖고 있는 믿음을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눈에 보입니다. 이 말은 진짜 믿음은 사람 눈에 보여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정말 믿는 자라면 내 믿음이 사람눈에 보여지도록 믿어야 됩니다. 다른 사람이 내 믿음을 보고 '저 사람의 믿음이다'라고 볼 수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본문이 지금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앉은뱅이는 사도 바울의 눈에 보이는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무리 외면해도 바울의 눈에 지금 이 사람의 믿음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보고 살아야 될 것은 못 보아도 아무 소득도 없는 것들을 많이 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속고 삽니다. 눈이 나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영국의 찰리 채플린에 관한 일화가 아주 많습니다. 채플린은 단순한 코미디언이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는 예술성을 가진 코미디언입니다. 이 사람이 전성기 때 쉬기 위해서 아무도 모르게 여행을 떠났습니다. 한 조그마한 마을에서 축제가 있다고 떠들썩합니다. 광고간판을 보니까 '채플린 흉내내기'라 해서 채플린처럼 분장해서 진짜처럼 경연대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난기가 발동해서 진짜 채플린도 신청을 했습니다. 당일 경연대회가 벌어졌는데 모두가 똑같이 분장을 해서 나온 것입니다. 채플린처럼 동작과 말도 하고 콧수염도 달고 헐렁한 바지도 입고 어정어정 걷는 것까지 채플린 흉내를 기가 막히게 내는 것입니다. 진짜 채플린도 신분을 속이고 출연했습니다. 그런데 입상발표가 났는데 진짜 채플린은 3등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진짜보다 더 진짜같이 보이는 가짜들도 있더라는 말입니다. 사람 눈은 그렇게 속습니다. 진짜가 출연했는데도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른 사람앞에 보여줘야 될 최고의 덕목은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줘야 됩니다. 보여지는 믿음이 과연 있을까요?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납니다. 이 말씀은 드러난 계시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감추어진 비밀이 아닙니다. 내가 듣고 이해하고 내가 믿을 수 있는 계시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 주의 말씀은 우리의 믿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할 때 그 사람이 뛰어 걸었다고 했습니다. 이 대목을 자세히 보면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하는 것은 앉은뱅이보다도 이 말을 하는 사도 바울의 믿음이 더 우선하는 말입니다. 바울의 믿음이 이 사람의 믿음과 일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발로 바로 일어서라"는 말씀을 안할 수 없는 사도 바울의 영적인 감동이 그 사람 가슴에 있는 것입니다. 내 발로 일어서라 할 때 그 사람은 뛰어 걸었다고 했습니다.

  받아들이는 믿음

  1829년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미국의 잭슨 대통령이 독립기념일을 맞이해서 모범 사형수에게 특사령을 내렸습니다. 우체국 살인강도범 조지 윌슨에게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모범수로서 특사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특사령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주임판사되는 존 마샬은 판결문을 이렇게 남겼습니다. "특사령이란 본인의 수락여부에 따라 효력이 달려있는 한 장의 종이에 불과하다. 죽을 사람이 용서를 거부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러나 본인이 거절한 이상 이 특사령의 효력은 무효이다." 이 사람이 특사령을 받아들였다면 그는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부했기 때문에 그는 죽었습니다. "네 발로 일어서라"는 이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진다면 이 사람은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지 않는 사람에게는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이것은 바울의 음성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 앉은뱅이는 그 음성이 바울의 말로 들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은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으로 들은 것입니다. 그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는 즉각 반응했습니다. 그대로 뛰어 걸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적의 역사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거부하는 한, 의심하는 한, 내가 이 말씀 앞에 순종을 연기하고 있는 한 거기에 기적은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아멘하고 순종하는 그곳에 말씀의 능력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행동하기까지 수없이 계산하고 망설이다가 말씀의 능력이 다 소멸된 다음에 말씀을 붙잡고 행동하기 때문에 이 말씀의 능력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루스드라의 앉은뱅이는 우리에게 말씀을 듣는 자세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는 사람 눈에 보이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약 60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영국과 미국을 오고가는 증기여객선에 목사님 한 분이 탔는데 풍랑을 만났습니다. 배가 너무나 요동을 하기 때문에 배 안의 많은 사람들이 큰 고통의 밤을 지내는데 이 목사님도 아무리 믿음으로 기도를 하지만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본인도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옆의 한 여 성도가 아주 침착하게 앉아있는 것입니다. 그 얼굴에는 공포의 빛이 없었습니다. 하도 편안하게 기도하고 있기에 풍랑이 어느 정도 잦아진 후에 물어보았습니다.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뉴욕에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풍랑 가운데 어떻게 당신은 그렇게 편안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까? 나는 목사이지만 정말 두려웠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 죽게 되는 게 아닌가? 나도 죽지 않을가 두려웠는데 당신의 얼굴에서는 두려움이 없었는데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여 성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도 두렵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 내 생명과 이 배의 모든 생명을 맡겼습니다. 제가 뉴욕에 가면 큰딸을 만날 것이고 이 바다에서 죽으면 2년 전에 천국에 먼저 간 작은딸을 만날 것을 생각하니까 나는 이래도 저래도 반가운 딸을 만나니까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맺는 말

  여러분, 진정한 믿음은 사람의 눈에 보입니다. 사람의 눈에 믿음의 본질이 보이도록 그렇게 믿어봅시다. 믿음의 능력이 보이도록 믿고 주님 앞에 갑시다. 이 루스드라의 앉은뱅이에게 믿음이 보였습니다. 누구나 이 앉은뱅이의 자세로 우리 주 앞에 나아갈 때 믿음은 보여지고 그 믿음은 기적을 불러옵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 눈을 속이는 것 거기에 현혹되지 맙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사람의 눈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자는 것입니다. 내가 남의 눈을 속이는 위선된 삶을 살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일 때마다 루스드라의 앉은뱅이가 여기에 와 있다고 생각하고 그 사람처럼 말씀을 듣는 자세를 가지고, 그 사람처럼 보이는 믿음을 가짐으로서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용 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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