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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께로 오는 사람들 (눅 6:17∼19, 호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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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하여 오는 생활과 가는 생활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오는 생활은 모든 신앙생활의 시작이요 기초다. 주님이 오라고 하셨기에 초대에 응답하는 모습이지만 오라는 것은 모이는 생활, 예배하는 생활, 기도하는 생활을 함을 의미한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 앞에 나오면 쉼을 얻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오늘의 문제는 믿지 않는 사람은 고사하고 믿는 사람도 주님께 오려하지 않고 오는 일에 게으름을 피운다는 것이다. 사단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의 발걸음이 예수께 향하지 못하게 하려고 작전을 세운다. 누구든지 예수께로 가면 은혜를 받는다. 그러므로 사단은 이 세상의 풍습을 쫓느라고 주께 향하지 못하게 한다. 육체의 정욕적인 것을 건드려 그 헛된 것을 구하느라고 예배 시간도 잊어버리게 만든다. 영원한 것도 아닌 것에 가치를 두게 하고 조금 더 벌자, 조금 더 사업을 넓히자 하고 모든 관심을 물질에 두게 한다.
히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하였다. 예수가 머리되신 교회로 와야 한다. 서로 서로 권면하여 이끌고 나와야 하고 스스로 권하는 자가 없어도 주께로 와야 한다. 모임을 폐하는 자들은 사단의 편이요, 사단을 기쁘게 하는 자들이다. 목회 경험을 통해서 볼 때 믿음은 모이는 곳에서 자라난다. 체험은 모이는 곳에서 경험된다. 교제는 성도의 모임 속에서 활발해진다. 다함께 나와 모이는 것은 힘이요, 능력이 된다.
오늘 주께로 나오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주님의 소문만 듣고 나왔다. 어떻게 이렇게 나올 수 있는가?

첫째,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눅6:17)
눅6:17 "예수의 말씀을 듣고 병고침을 얻으려고..." 하였다. 모이는 일을 잘하는 사람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인가 듣고자 한다. 그리고 무엇인가 얻으려 한다. 그것이 곧 모이는 사람들의 영적 필요성이다. 필요성을 느끼는 것,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는 자는 주께로 온다.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 신앙의 시작이다. 기도의 시작이고 예배의 시작이고 주께로 달려오게 하는 내적 동기이다.

사단은 세상의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눈과 코와 귀를 다 가리고 말씀을 듣지 않아도, 주께서 주시는 치료의 은혜를 얻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속인다. 영적인 것에 배고픔을 느끼자. 히딩크 감독은 4강에 한국 축구를 올려놓았지만 배고픔을 느낀다고 하였다. 더 잘해서 더 좋은 성적을 올리고 싶다는 말이다. 우리는 교회로 달려오는 발걸음이 형식이 되어서는 안된다. 나는 고쳐야 한다. 나는 건강해져야 한다. 나는 병든 신앙이다. 이대로는 안된다. 나는 영적 의원이 필요하다.
1. 남을 무시하는 교만병
2. 예배 시간에 조는 졸음병
3. 하나님의 일을 외면하는 무관심병
4. 기도하지 않는 태만병
5. 사랑이 없는 냉혈병
6. 받았으면서도 불평하는 원망병
7. 시기병, 질투병, 싸우고 다투는 병, 병 투성이다. 병을 고치기 위해 주님이 필요하다.
정말 필요성을 느끼는 영적 목마름이 있어야 모이는 일을 성공한다. 예배에 배고픔을 느끼자. 더 뜨겁게 더 신속히 의원되신 주께로 오는 일이 신나고 즐거운 자가 되자.

둘째, 기대성을 가지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눅6:18)

주께로 나온 허다한 무리들, 그들은 보았다. 눅6: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으리라." 말씀을 듣고 병고침 얻는 것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왔는데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혀 고생하는 자들이 완전히 나음을 받는 것을 보게 되었다. 모여 온 사람들은 처음부터 기대성을 가진 믿음의 사람이었다. 예수께로 오면 예수가 반드시 무엇인가를 해주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모여오지 않을 수 없다. 믿음이란 기대하는 것이다. 고쳐주시고 새롭게 해주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의심하는 자는 오지 않는다. 예수께 아무 것도 얻기를 기대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사람은 주께로 오지 않는다. 예수께 기대성을 가진 사람은 유대 사람과 예루살렘에 사는 선민만의 모습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눅6:17을 보니까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다고 하였다. 두로와 시돈은 선민들이 아니다. 이방의 족속들이다. 그러나 이방의 사람도 주께로 왔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두로와 시돈의 땅에 살면서 게네사렛 호수 주변에까지 달려왔으니 얼마나 먼 거리인가? 기대감을 가지면 믿음을 가지면 거리가 문제되지 않는다. 산본에서, 오산에서, 평택에서, 수지에서도 모여올 수 있다. 안 믿는 자들도 기대성을 가지면 오게 된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에 대한 기대성을 주어야 한다. 믿음의 역사를 기대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고 성도가 교제해야 하는 것에 신나고 넘치는 기대감으로 충만해야 한다.

여기 두로와 시돈 땅의 사람들, 그들은 이방 족속인데도 멀리서 모여 온다. 거리를 생각지 않는 그 열정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는 기대감을 가지는 믿음 때문이다. 반드시 고쳐진다는 믿음이 이런 모여오는 열정을 만든 것이다. 막스베버는 지도자의 덕목 세 가지 중에서 그 하나가 열정이라고 하였다. 시간을 뛰어넘고 거리를 뛰어넘고 물질과 환경을 뛰어넘는 열정을 믿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이란 목사는 대학생 학창 시절에 은혜를 받으려 집회 장소를 달려갔다. 크리스 웰이란 목사님의 인도하는 집회 소식을 듣고 560Km 먼 거리에서 차를 몰고 달려갔다. 그 집회에 대한 하나님의 세우신 종에 대한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믿음이 있었기에 이런 뜨거운 열정의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거기서 안수 받고 거기서 목회자의 새로운 꿈을 가졌고 오늘의 목회자가 되었다.

셋째, 적극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눅6:19)

눅6: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예수께로 온 사람들은 한 두 사람이 아니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고침을 받으러 온 이 무리들은 적극적인 사람들이었다.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는 사람들이었다. 주어진 삶 앞에 문제가 부딪칠 때 소극적인 사람은 일을 시도하다가 그만 두고 만다. 그러나 대개 적극적인 사람은 몸으로 부딪치고 실패하든, 성공하든 시도를 해본다. 여기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는 이 무리들은 인생을 적극적으로 대면하는 적극성을 지닌 이들이다. 신앙과 예배생활을 하면서도 모이는 일을 잘하는 사람은 역시 적극성을 띈 사람들이다. 적극적 행동, 적극적 참여, 적극적 사고, 적극적 헌신, 적극적 선행의 사람들이 모이는 일에도 앞장선다.

6.12 총동원 전도 출석 주일에 온 성도가 적극성을 띄자. 사실 모든 사람을 낫게 하는 예수의 신유도 바로 적극성을 지닌 무리들에게 일어난다. 인생이 변화, 대 역전되는 기적 그것은 적극성을 지니고 모여와 예수에게 손을 내밀어 예수를 만지려 할 때이다. 예수께 나오길 시도하자. 예수께 나오도록 권면하자. 적극적으로 다시 시도하자. 중풍병자를 적극적으로 데려왔을 때 고침을 받았듯이 허다한 무리들, 이방인 무리들, 그 적극성 때문에 다 고침을 받았다.

교회는 무조건 모여야 한다. 너와 나 상관없이 해결을 받아야 할 문제에 적극성을 띄고 손을 내밀라. 예수를 만지려고 힘을 쓰자.
1) 거룩한 삶을 위해 주께 와야 한다. -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2) 신령한 은혜의 배부름을 위해서 주께 와야 한다. - 사55:1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3) 긍휼히 여김을 받기 위해 주께 와야 한다. - 욜2:15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포하고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골방에서 나오게 하고 모두가 나아오면 하나님의 중심이 뜨거워지시고 긍휼히 여겨 주신다.

4) 고침을 얻기 위해서 주께 와야 한다. - 요4:46下
가버나움에 사는 왕의 신하는 아들을 고치기 위해 주께 나와 엎드림으로 치유를 받았다. 겸손히 달려와야 한다.

5) 예배의 감격을 나타내기 위해 주께 와야 한다. - 시75: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위하여 즐거이 부르자.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진정한 삶의 감격을 담은 예배는 주께 와야 한다.

6) 살아나기 위해 주께 와야 한다. - 호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적극적으로 나아오자. 사람들은 오늘날 편리함에 쫓기어 엉뚱한 생각을 한다. 혼자 집에 누워 예수를 믿으려 하고 병든 신앙인줄 모르고 오려고 하지 않는다. 무조건 은혜의 제단으로 나와야 한다.
고독하게 예수를 믿으려는 청년이 무디를 찾아와 선생님 꼭 교회로 나와야 됩니까? 물었다. 무디 선생은 말없이 웃으면서 벽난로에 타고 있는 장작을 끄집어 냈다. 잘 타고 있다. 장작은 불집게에 잡혀 공중에서 곧 꺼져 버리고 말았다. 곧 코를 맵게 하는 연기가 방안을 가득히 채웠다. 그때 무디 선생은 다시 그 꺼져버린 장작을 벽난로 속에 던져넣었다. 장작은 다시 힘차게 불이 붙었고 방안에 연기도 모두 사라졌다. 그때 이 따지고 묻던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함께 모여야 하고 주님께 달려와 예배하고 말씀을 듣는 오는 일을 새롭게 결단하였다.

모이지 않는 것은 나쁜 습관이다. 모이기를 폐하려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기본이 잘못되었고 시작이 잘못된 것이다. 이 시대 풍습에 속지 말자. 생선을 살려면 생선 가게를 가야 하고 비를 맞으려면 비가 내릴 때 집 밖으로 가야 된다. 등산을 가려면 산으로 가야하 듯 고침을 받으려면 교회로 와야 한다. 우리 오목천은 시대를 거슬러 예배를 폐하는 시대, 모이기를 폐하는 시대로 간다하더라도 더욱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 모여서 예수와 접촉하고 예수와 교제하고 예수를 닮는 교회가 되자. 나는 교회에 오므로 쉼을 얻었다. 교회에 다니므로 안식을 얻었다. 세상의 그 어느 곳도 하나님의 품에 오기 전에는 안식이 될 수 없었다는 어거스틴의 고백 그대로 주께로 오는 것이 쉼의 길이다. 이제는 나만 주께로 오는 자가 아니고 모든 사람이 지역의 사람 모두 다 주께로 오는 사람들이 되게 하자. 또 필요성과 기대감을 주는 교회 적극성으로 달려오고 싶은 교회를 만들도록 기도로 헌신하자. (김 철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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