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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 십자가를 대할 때 (눅 23: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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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이야기를 들을 때 감동이 있는지요?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 더 깊이 깨닫고 나서 크게 감사한 것 중의 하나가 십자가를 들을 때 감동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눈물이 없던 저였지만 이제 십자가를 들으면 눈물을 흘립니다. 어느 CF에서 한 탈렌트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있는데 기자가 그 신인 연기자에게 눈물 흘리는 연기가 힘들지 않았냐고 질문을 하더군요. 그러자 그 연기자는 그 CF장면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가 계란에 맞는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라 쉽게 눈물이 흘렸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우리도 쉽게 눈물이 흘러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고난에 애통의 눈물을, 그 깊은 사랑에 감사의 눈물을 흘려야 하지 않을까요?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십자가를 대할 때 감동이 있고, 십자가를 찬양하며 감격이 있는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영벌 가운데 있던 나

십자가를 알기 전 우리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영벌의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름답게 창조하신 모습을 벗어던지고 죄 중에 빠져, 죄의 대가로서 인간은 영벌이 예약되어 있었습니다. 인간은 이 땅에서 영벌의 대가를 기다리면서도 계속 죄에 죄를 쌓는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영벌이란 무엇입니까? 영벌이란 끊이지 않고 받는 벌을 의미합니다. 영원히 죽지 않고 영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벌을 받는 것이 영벌입니다. 손을 들고 서있는 벌을 받은 적이 있는지요? 한 1분은 버틸만 합니다. 그러나 5분만 지나도 참 힘이듭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가장 싫은 것이 선착순입니다. 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이 벌로 주던 선착순은 참 끔찍했습니다. 그런데 그 벌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힘든 벌을 영원히 받는 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신의를 저버리고 죄 가운데 빠진 존재로서 영벌을 받게 된 존재입니다. 영벌은 그 형량이 너무 끔찍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영벌이라는 가장 끔찍한 형벌을 주셨습니까? 죄값이란 항상 죄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벌이라는 끔찍한 형벌을 받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죄가 크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하나님은 인간을 가장 소중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자연의 어떤 것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습에 그 자신의 형상까지 덧입히셨습니다.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큰 사랑을 저버렸습니다. 사랑이 큰 만큼 그 사랑에 배반한 것이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범하지 않도록 미리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국 하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이것이 너무나 큰 죄입니다.

그 영벌은 항상 유효합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 인간은 모두 영벌가운데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영벌에 상응하는 죄를 범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받는 세상의 고통은 크게 생각하면서 후에 받을 영벌에 대해서는 비웃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한 강도가 조금후면 영벌을 받게 되는데 그것도 모르고 예수님을 비웃듯 말입니다. 말씀에서 지옥에 대해 말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옥이 그들의 것이 됩니다. 가장 존귀한 존재로 창조함을 받았지만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되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탄생(우리의 뿌리로서의 십자가)

영벌 가운데 있는 사람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사형틀입니다. '사형수'라는 말만 들어도 끔찍한데 이 십자가는 가장 고통을 주는 사형틀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입에 거론하기도 싫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처절한 사형틀인 이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하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벌을 주신 것이 그 분이 우리를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영벌의 주인공이 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그 사랑이 말뿐인 사랑이 아니라 온 몸으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죄를 범한 인간은 그 죄값으로 영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죄 값은 사망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법이기에 영벌은 정해진 절차입니다. 그런데 그 죄중에 영벌을 받을 인간을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중대한 결정을 하십니다.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조금은 특별하고도 유일한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자신의 아들로서 죄가 없으신 성자 하나님을 (죄가 없도록 하기 위해) 조금 특별한 방법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게 하시고 그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난 성자 하나님이 인간들을 위해 대신 죽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대신 죽으신 곳입니다. 인간은 참 대단합니다.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예수님을 인간이 발명한 가장 고통스러운 사형 방법인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그 분의 고통은 어땠겠습니까? 그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고통이 전혀 없으셨겠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그 분의 고통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을 택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처참하고 추한 죄를 조금이라도 더 깨끗이 씻기 위해 그 분은 더욱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방법을 택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분의 이 처절한 고통이 동반한 십자가의 죄씻음에 의해 우리 기독교인들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이 무엇입니까?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무엇에 의한 것입니까? 십자가의 대속의 사랑에 의해 그 모든 죄가 대속함을 입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영벌에서 영생으로 바뀐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뿌리된 십자가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제1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소요리 문답에 보면 인생의 제 1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자가가 없다면 이 인생의 목적은 결코 이룰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 죄 많은 우리가 어찌 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악취를 풍기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죄 사함은 우리를 죄인에서 의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죄 많은 삶이 십자가의 피에 의해 정화되어 순결한 삶만 남고 죄로 얼룩진 삶은 씻어져서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십자가의 죄 씻음을 받기 전에는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하나님을 숨은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피해 다니는 존재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죄 씻음은 우리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의인으로서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하실 때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의인으로서 대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과 함께 함이 우리에게 복이 되고 두려움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 죄 지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자녀로서 하나님을 대하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를 대할 때

십자가를 대할 때 감격이 있는 삶, 그것이 인생의 의미를 아는 우리의 첫걸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목숨을 건져주고 대신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할 때 그 사람의 자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관심 갖지도 않는다면 그것이 사람됨의 도리입니까? 자신 대신 죽은 그 사람에게 감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의 기초가 안 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인생을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어떤 삶인들 온전한 삶이겠는지요? 온전한 삶, 인생의 의미를 알고 제대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인생의 기회를 준 그 십자가 앞에서 감사하고 감격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진정 그 십자가를 믿는다면..

십자가 앞에 설 때 우리는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의 사건은 가장 감동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에는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진실이 담겨져 있습니다. 고난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처절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요 목사님이신 스펄젼 목사님이 어느날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아니 왜 눈물을 흘리십니까?" 이에 스펄젼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생각하면서도 감동이 없으니 그것이 슬퍼서 울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감동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던 스펄전 목사님은 어느날 십자가를 생각하면서도 감동이 없자 그것이 슬퍼서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입니다. 그렇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이 심각하게 생각하였던 '십자가 앞에서 감동이 없다'는 그 것은 실제로 이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기독교인이 십자가를 대할 때 감동이 없을 때 그 사람은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던지 아니면 죽은 사람이든지 아니면 이제 기독교를 알아가는 지극히 믿음이 작은 자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 십자가의 감동이 없다는 것은 가장 큰 비극입니다. 십자가를 대할 때 예수님의 고난의 사랑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되야 합니다. 금주 한 주 동안 십자가를 묵상하십시요. 십자가를 묵상 할 때 감동하고 감격하여 가슴을 주체할 수 없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요.

십자가를 대할 때마다 감격과 감동이 있는 크리스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는 아무리 많이 묵상하고 찬양하여도 부족한 그 무엇인가를 남기는 주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십자가를 가슴에 품고 사는 크리스챤이 되야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감동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음을 증거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를 가슴에 품고 살며 십자가를 사랑하는 크리스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장석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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