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1) (시 23:1)

  • 잡초 잡초
  • 214
  • 0

첨부 1


[안소니 드 멜로]라고 하는 사람이 쓴<일분지혜>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는 스승이 그 제자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말라. 그냥 바라보아라. 그러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가 스승에게 다시 물었습니다.“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라보란 말입니까?”스승은 대답했습니다.“무엇을 바라볼 때마다 거기 있는 그대로만 보고 다른 것을 보려고 하지 마라 그래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혹스러워하는 제자를 보고 스승은 다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예를 들면, 달을 바라볼 때에 달만 보고 다른 것은 보지 마라. 배고픈 사람이 달을 보면서‘저게 빵떡이 아닌가.’생각하면서 보면 달을 달로 볼 수가 없느니라. 또 사랑에 빠진 사람은 달빛을 쳐다보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만 생각하니까 달을 바로 볼 수 없느니라. 그렇듯이 하나님을 볼 때에는 하나님만 보아라. 그래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같은 것을 바라보면서도 어떤 이에게는 이것으로, 어떤 이에게는 저것으로 보이는 것은 그가 보고자 하는 것에 온전히 마음과 생각을 두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날마다 하나님을 보십니까? 아니 더 정확히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하나님을 보려다가 정작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매일 매일 엉뚱한 것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종교 개혁자[마르틴 루터]가 아침식사를 하는데 자신의 집에서 키우는 개가 무릎 앞에 앉아서 루터가 빵을 집으면 빵을 보고 고기를 집으면 고기를 보고 입으로 올라가면 입을 보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열심히 쳐다보는 겁니다. 몇 번을 반복해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쳐다보다가 고기 한 조각을 찢어서 주었더니 얼른 물고 내려갑니다. 이것을 본 루터가 무릎을 탁 치면서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이 개가 이 고기조각을 쳐다보는 것 같이 내가 하나님을 쳐다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이 개는 이 고기조각을 쳐다보는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오로지 고기만 바라본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알아가는 것을 지식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지식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 봅니다.
먼저는<논리적 지식>이란 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성의 기능을 통해서 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올바른 이성이 있을 때 온 세계를 똑바로 볼 수가 있습니다. 이성을 통해서 비판하고, 추리하고, 분석하고, 통합하면서 논리적으로 이해가 될 때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생각으로 봅니다. 유명한 과학자[아인슈타인]은 과학적 지식에 의한 하나님을 설명하는 그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그는 만물의 근원을 Energy즉, 보이지 않는 어떤 힘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힘이라는 것이 물질이냐 인격이냐를 두고 생각하다가 물질로부터 물질이 나올 수는 없고 인격적 생명체로부터 물질이 온 것인데 그 인격적 생명체란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얼마나 멋있는 논리적지식입니까? 유명한 신학자[칼 바르트]는“하나님은 우리의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지식의 주체”라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것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심으로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맑은 이성으로 그 능력을 따라, 그 기능을 따라서 논리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성이 병들면 이것이 문제입니다.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성이 건강해야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감성적 지식>이 있습니다. 가슴으로 아는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아기가 울 때에 무엇이 필요한지 엄마는 압니다. 가슴과 가슴으로 압니다. 그 아기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어린아이의 사정을 충분히 어머니는 이해합니다. 마음으로 압니다. 감성 중에 최고는 사랑일 것입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서로 가슴이 열립니다. 그래서 말을 안 해도 알 수가 있습니다. 미워하게 되면 가슴이 닫힙니다. 가슴이 닫히면 아무것도 모르게 됩니다. 즉 지식의 문이 꽉 닫히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감성 중에 의심이란 것도 있습니다. 여러분, 의심하게 되면 가장 먼저 생기는 것이 오해입니다. 의심이 이미 마음에 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해도 오해가 됩니다. 이래도 오해하고 저래도 오해합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감성이 깨끗하고 마음이 깨끗해야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특히 하나님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경험적 지식>입니다. 말 그대로 몸으로 경험하면서 얻어지는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때로는 유익한 것입니다만 때로는 아주 위험한 것이 이 경험적 지식입니다. 그래서 이 경험적 지식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자칫 이기주의나 자기우상 주의로 빠져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지식 위에 경험적 지식이 적절하게 더해져서 알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하겠습니다.

또한<감각적 지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특수하고 아주 고난도의 지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축선선수들이 축구하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스포츠가 그렇습니다만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없습니다. 축구선수들 대단한 겁니다. 축구를 하다보면 자기가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갑자기 공이 옵니다. 정말 잘하는 선수는 어떤 상황 어떤 위치에서 공이와도절대 실수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정확하게 자기가 의도한 곳으로 공을 보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급박한 상황에서 자기 발에 와 닿기 전에 볼을 보고‘가만있어보자, 이렇게 차면 어떻게 될까? 저렇게 차면 어떻게 될까?’이렇게 생각하고 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때 그 생각하고 있으니까 볼이 엉뚱한 상대방에게로 패스가 되고 마는 겁니다. 이건 처음 축구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즉 감각적인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감각적 지식이란 이런 것이 아닙니다. 벌써 많은 시간이 훈련이 되어서 볼을 보자마자 벌써 탁 갖다 대는 데 방향도 세기도 정확합니다. 이걸 감각적이라 말합니다. 아주 자동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여유가 있는 상황이라면 모르겠지만 급박한 여기에 무슨 판단하고 생각 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래서 감각 화 하라는 말은 아주 몸에 익숙해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축구 선수라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축구공에 완전히 익숙해진 감각적 지식, 다시 말하면 감각 화된 지식이 있어야 잘하는 선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프로 화된 지식이라 할 수 있겠고 그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2002년 월드컵 4위로 국가적 위상이 한껏 높아진 우리나라 축구국가대표팀이 그 명성에 걸맞지 않게 파란만장한 과정을 겪으면서 드디어[아드보카트]라는 명감독을 영입하고 새로운 도전에 나섰습니다. 며칠 전에 대표팀이 파주에 있는 축구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에서 첫 훈련을 하는데 이 감독이 훈련하는 선수들을 묵묵히 그러나 아주 세밀하게 주시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뭘 보는 겁니까? 쉽게 말하면 저 선수에게 축구선수로서 감각 화된 지식이 얼마나 있나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지식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이 모든 지식, 논리적 지식, 감성적 지식, 경험적 지식, 감각적 지식을 총 동원하여 정말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결국 이 지식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기 위한 것들입니다. 우리의 궁극적 지식의 목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곤고함과 고통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이 문제에 대해 분명히 밝힙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천명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곧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분이라고 밝힙니다. 그런데 이 시를 쓴 다윗은 정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자기의 인생 중에 가장 곤고하고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서 오히려“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합니다. 가장 결핍이 많은 인생의 시기를 지나면서 오히려“모자라는 것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의 인생을 돌이켜보십시오. 인간적인 안목으로 볼 때 지극히 불행한 일생을 살아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사랑으로부터 소외 된 가운데 자라야했습니다. 다른 형들만큼 고귀하게 자라지 못했습니다. 형제들에게도 살붙이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던 아내 미갈에게도 존중히 여김을 받지 못했습니다. 자기는 사울을 미워한 적이 없었지만 사울은 그의 생명을 노렸습니다. 어쩌다 낳은 아들은 왕위를 빼앗겠다고 칼을 들고 일어섭니다. 이 모든 것을 보면 다윗의 인생은 부족한 것 투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확신인 동시에 현재 그의 삶을 주관하고 있는 목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풍부한 환경이 그 고백을 만들어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신앙생활의 여건이 이런 불후의 고백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쉬지 않고 그의 믿음을 흔들기 위하여 다가오는 모든 세상의 파도와 믿음의 시련과 유혹받게 하는 결핍과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게 만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여기고 그의 목양의 그늘아래 있는 것을 즐거워하며 그의 음성을 들으며 그와 함께 신뢰 속에서 살아가는 그 관계가 그로 하여금 이런 고백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자신의 영적인 어려움과 신앙의 침체를 환경에서만 찾으려고 했던 우리들이 오늘 본문을 통해 보여 주는 이 복음 앞에 새롭게 깨달아야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아시고 나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길이 없다고 믿는 절대 의존적인 신앙만이 우리로 하여금 어둡고 힘든 세상을 믿음을 살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다윗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다윗의 처지에서 도무지 나올 수 없는 고백을 그는 오늘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만족의 세상이 있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이 얼마나 곤고합니까? 아무리 뛰어도 다다르지 못할 삶의 부족이 눈앞에 있습니다. 잡은 듯하면 어느 샌가 멀어져 버리는 평안이라고 하는 것은 멀고먼 남의 이야기 같습니다. 벌어도벌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같이 새어나가는 돈은 힘을 주기는커녕 늘 우리의 애간장만 타게 합니다. 아무리해도 부족합니다. 만족되지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현실인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여러분, 참고 달리십시오. 언젠가는 하나님이 채우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나는 그의 목양에 따라 살아갈 때에 만족케 해 주시는 하나님을 알기만 하면 틀림없이 여러분에게 만족케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칠 것입니다. (김 철 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