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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크고 놀라운 은혜 (마 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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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쁘게 돌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임금의 마음은 흐믓하기만 합니다. 그 입가에는 내내 미소가 감돌고 있습니다. 귀한 아들을 낳아 그 아들이 어엿한 성인이 될 때까지 정성껏 보살폈습니다. 이제 그 아들이 성장하여 배필을 만나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살아갈 시점에 와 있습니다. 임금의 아들의 혼인 잔치를 치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한쪽에서는 잔치에 쓸 음식들을 장만하기에 바쁘고 또 한쪽에서는 그 음식들을 그릇에 담아 나르기에 분주합니다. 초대받은 손님들이 앉을 자리도 정성껏 마련했습니다. 준비한 음식들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맛있는 음식들입니다. 잔치 자리를 장식하고 꾸미는 데에도 많은 정성을 쏟았습니다.

  왕실 가족들뿐 아니라 일꾼들에 이르기까지 복장에도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손님들을 불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여러 모로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물론 결혼하는 아들 내외와 왕실의 기쁨이 넘칠 수 있도록 각별히 신경을 쓴 것이 사실입니다. 이 정도면 임금의 아들의 혼인 잔치로서 결코 부족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봐라! 가서 전에 초대한 손님들을 오라고 해라!” 유대 나라 풍습에 따르면 혼인 잔치에 손님을 초대할 경우 두 번 초청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먼저 혼인 잔치가 있기 전 주인이 하인들을 보내서 손님들에게 앞으로 혼인 잔치가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여기서 손님들이란 주인과 관계되는 주로 상류 계급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혼인 잔치가 실제로 시작될 때 다시금 하인들이 가서 그 손님들을 모셔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손님을 맞을 준비를 다 마치고 그 손님들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임금에게 종들이 돌아와서 멋쩍은 듯이 말합니다. “손님들이 오기 싫다는데요...” 치솟는 화를 억누르고 다시 한 번 종들을 보내서 손님들을 모셔 오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종들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모든 준비를 다 갖추고 기다리지만 손님들은 임금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임금이 보낸 종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 일을 찾아서 가 버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갔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사업을 하러 갔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임금이 보낸 종들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뜻하지 않은 손님들의 태도에 우선 임금은 매우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몹시 화가 났을 것입니다.

  바야흐로 결혼 시즌이 되었습니다. 결혼식장에 붐비는 하객의 수가 혼인 양가의 사회적 지위와 명성, 평소의 대인 관계와 사회성을 가늠하게 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때로는 좀 지나치다 싶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평소 혼주로부터 은혜를 입고 살아온 사람들 중에서 당연히 참석해야 할 사람이 오지 않는 것은 혼주에 대한 심한 모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임금의 은혜를 입고 살아온 사람들이 막상 임금의 기쁨에 동참하지 않는 그런 태도를 뭐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임금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고 또 용납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임금은 심히 노한 나머지 군대를 보내서 그 살인한 자들을 다 죽여 없애 버렸습니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려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 동네까지 싹 불살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임금의 눈에 더 이상 특별한 자들이란 없습니다. 임금의 초대는 더 이상 상류 계급 사람들에게 국한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좋습니다. 임금의 기쁨을 함께 나눌 사람이라면 누가 와도 괜찮습니다. 임금이 뭐라고 지시합니까? “네 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마 22:9) 그 지시에 따라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하게 되었더라고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해마다 어린이날이 되면 청와대에서 낙도 어린이들을 초대하곤 합니다. 비록 상징적인 행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낙도 어린이들을 비롯한 많은 소외된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는 의미있는 행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받은 어린이들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밝게 피어나지 않습니까? 아주 잊혀진 줄로 알았던 자들이 찾아졌을 때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우리 주님도 바로 그 일 때문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시인 김춘수의 그 아름다운 ‘꽃' 이야기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주님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보잘것 없는 우리를 우리로서는 꿈도 꿀 수 없없던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무엇이 되었습니다. 무의미한 삶이 아니라 참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이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주님이 우리를 성령으로 새롭게 빚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마 22:12) 그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 대꾸도 할 수 없는 것은 당시 풍습에 따르면 아무리 가난해도 예식에는 예복을 입고 가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예복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 옷을 빌려주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임금을 무시하는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면 보잘것 없는 자기를 초대한 것을 볼 때 제대로 된 잔치가 아니겠지 하고 잘못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볍게 생각한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합니다.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22:13) 이 비유의 말씀을 마치시면서 주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그렇다면 여기서 임금이 찾는 예복이란 무엇입니까? 아니 우리 주님이 찾는 예복은 과연 무엇입니까? 흔히들 말하는 은혜입니까? 은혜를 말한다면 이미 선한 자나 악한 자나 초대받은 것이 은혜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 대답을 야고보 사도를 통해서 들을 수 있습니다. 그가 뭐라고 말합니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 2:18) 그는 거듭 강조하여 말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받은 바 은혜를 은혜로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바로 혼인 잔치에 제대로 된 예복을 입고 참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청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택함을 받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값싼 동냥이 아니고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베푸신 귀한 은혜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스웨덴 출신 가스펠 가수 레나 마리아의 찬양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은 그녀의 삶 속에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이 묻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팔도 없고 한쪽 다리마저 짧아서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그토록 항상 기뻐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이며 그녀가 부르는 찬양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까닭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녀 자신이 은혜를 은혜로 알고 진심으로 감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녀가 "Amazing Grace"를 찬양할 때 느끼는 감동은 차라리 전율에 가깝다고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어린 양 혼인 잔치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그 잔치 자리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가 영생의 소망을 간직하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자리에 예복을 입고 나아가는 것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크고 놀라운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그 주님의 복음을 널리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받은 바 크고 놀라운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죽기까지 충성하기로 다짐하고 결단하는 여러분 모두의 삶의 현장에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땅의 기름진 복이 항상 넘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강 석 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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