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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스승주일] 하나뿐인 참 스승 (마 2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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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힘의 가장 중요한 힘의 근원은 교육. 대학 입학률은 일본보다 더 높고, 최근에는 미국보다 더 높아짐. 그러나 동시에 너무 많은 문제. 아무도 한국의 교육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 그래도 좀 개선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교회도 무관심할 수 없음. 오늘은 교육과 교육자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

기독교는 교육의 종교. 그런 점에서 불교와는 다름. 불교는 스스로 깨닫는 것을 강조. 그러므로 스승의 위치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음. 

기독교는 사람이 지식과 진리를 스스로 갖지도 못하고 혼자서 발견하지도 못하는 죄인이라 가르침. 그러므로 참된 지식은 사람 바깥으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하고, 그것을 계시라 함. 기독교가 계시의 종교란 사실은 기독교가 배우는 종교란 것을 뜻함. (롬 10:14)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외부로부터의 정보가 중요. 즉 교육이 중요함.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는 거의 전적으로 우리가 누구로부터 무엇을 배웠느냐에 결정됨. 특히 어릴 때의 교육은 결정적. 기초가 되는 교육이 그 다음 교육의 성격과 정도를 결정. 어떤 “언어”를 배웠느냐에 따라 그가 어느 나라 국민이 되는가가 결정되고, 그 다음에 읽는 책의 종류가 결정되고, 어떤 태도를 갖게 되느냐에 따라 취사선택이 결정.

우리의 생각은 물웅덩이와 비슷해서 어떤 물이 들어오느냐에 따라 그 맑기와 색깔이 결정됨. 교육, 영향, 환경, 독서 등이 모두 영향을 끼침. 특히 주일마다 듣는 설교가 흙탕물인지 맑은 물인지가 믿음의 질을 결정. 

그래서 성경 여러 곳에서 “배우다” (105번) “가르치다”((210)는 말이 많이 나옴.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딤후 3:14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설교란 말은 성경에서 “가르침” (didache)이란 뜻을 가지기도.

그런데 배우려면 가르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따라서 기독교에서는 스승이 중요함.  물론 성령이 우리에게 가르칠 수 있음: 눅 12: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그러나 성령의 직접적인 가르침은 특수한 경우이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인간인 선생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도록 만들어진 교과서가 성경.

그러므로 기독교에서는 선생이 중요함. 선생에 대한 언급이 많음. 딤후 3:14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마 10: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그래서 제자들과 심지어 바리세인들은 주님에게 “선생님!”이라 불렀음. 엡 4:11-12에서는 교회의 직분을 나열하면서 주로 가르치는 직분을 말함: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선생이 중요하기 때문에 선생을 존중해야. 교회에서도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존경하라고 성경은 가르침. 딤전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 할 것이니라”, 갈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설교하는 사람과 주일학교 선생님들 - 매우 중요한 역할. 어떤 의미에서 어른들에게 설교하는 설교자보다 더 중요. 어른들 - 좀 비판적이고, 머리가 굳어져 있고,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들어갈 자리도 별로 없고, 그래서 예배가 끝나기가 바쁘게 잊어버리는 사람들 많음. 그대로 사는 사람은 더더욱 적음.

그러나 어린이들에게는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침. 어릴 때 배운 언어가 일생의 독서를 결정하는 것처럼. 어린 마음에 하나님 말씀을 심어주면 그만큼 더 중요. 더 오래가고 더 깊이 마음에 새겨지며 일생동안 그에게 영향을 끼치므로. 학교의 지식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배우는 것은 그보다 더 중요. 영원한 생명뿐 아니라 땅위에서 올바로 사는 것을 성경에서 배움. 그러므로 학부모들이 학교 선생님들만 중요하게 생각할 뿐 아니라 주일학교 교사들도 중요하게 존경해야. 스승의 날에 그분들의 중요함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

그런데, 모든 소위 선생이 다 좋은 선생은 아님. 요즘 많은 교사들과 교수들이 문제가 되고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음. 교실붕괴는 교사에 달림. 모든 선생이 반드시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님. 그래서 우리는 좀 비판적이고 현실적이 되지 않을 수 없음. 즉 존경할 선생을 존경해야지, 법적으로 선생이란 직업을 가졌다 하여 다 존경해야 하는 것은 아님. 배울만한 지식과 존경할 인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존경하면 오히려 낭패. 학생은 어느 정도 분별력도 있어야 하고 비판능력도 있어야 함.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심.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도 스스로 선생이라 했음. 그런데 그 사람들을 존경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심.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고, 자신들이야말로 그 말씀을 매우 사랑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차는 경문을 넓게 했다 함. 여기서 경문 - 차고 다니는 장식물로 거기에는 율법 구절들이 새겨져 있다 함.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옷의 술을 크게 만들어 달고 다녔다 함. 그리고 회당의 상좌에 앉고, 사람들로부터 인사 받고 “선생님” 하는 소리 듣기 좋아했다고 예수님 꼬집음.

무엇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서 그렇게 비판적이었는가? 본문에는 그들이 율법을 제대로 가르치기는 하나, 자신들은 그 가르친 데로 지키지 않았다 함. 자신들은 지키지 않을 뿐 아니라, 매우 까다롭고 어려운 규칙들을 만들어 배우는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움. 즉 행하기가 매우 어렵게 만들어 두고 자신들도 지키지 않았다 함. 그런데 주님은 그들이 가르치는 내용은 그렇게 엉터리가 아니므로 지키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심. 그들은 위선자들이었기 때문.

여기서 예수님의 스승관이 분명히 들어 남. 선생은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 올바른 소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로. 요즘 세상의 교사, 교수는 주로 지식만 가르치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음. 그리고 어떤 과목에서는 그것이 불가피. 수학, 과학, 역사, 지리 등- 그 내용대로 행동할 수는 없음. 그대로 행하지 않으면 교사, 교수 자격이 없다고 한다면 대부분은 사표를 내야 할 것.

그러나 그런 교사, 교수들이라도 학생들이 본을 볼 수 있도록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윤리는 스스로 지켜야. 그런 것도 지키지 못하고 기본적인 인격도 갖추지 못한 교육자들이 여기 저기 섞여 있기 때문에 교육자들이 한꺼번에 욕을 먹고 있음.

예수님은 여기서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는 선생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영역의 선생에 대해서. 오늘날 주일학교 교사들, 교역자들, 설교자들이 해당될 것. 여기서는 특히 말만 하고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아무 자격이 없음을 강조. 따라서 성도들은 그들의 가르치는 내용은 배우되, 그들의 위선을 본받지는 말아야 하고, 따라서 존경할 가치도 없는 것.

야고보는 선생 된 사람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약 3:1이하에서 지적함. 선생은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사람이고, 그러다 보면 실수도 많이 할 것이기 때문. 그리고 야고보서 전체를 살펴보면 역시 말한 대로 지키기 어렵기 때문.

그리고 지도자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는 자라고 하심. (마 23: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그래서 주님은 아예 랍비라, 아버지라,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명령. 랍비는 선생으로 번역되지만, 문자적으로는 “위대한 자”란 뜻을 가짐. 어떤 선생은 그 시대에 “아버지”라 불리었다 함 (9절). 대개 이미 죽은 위대한 선생들을 그렇게 불렀다 함. 그리고 매우 뛰어난 선생은 “지도자”라 했다 함 (10절). 그런데 우리 아무도 그런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다 하심. 그런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는 분은 오직 한 분이라 하심. 곧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인 것. 그리고 땅위에 오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지도자라 하심. 우리는 모두 동일한 형제, 자매일 뿐, 아무도 다른 사람 위에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자격이 없다 함.

사실 그러함. 땅위의 선생, 땅위의 지도자들은 모두 유한하고 이기주의자임. 틈만 있으면 자기의 사익을 챙기고 음흉한 생각과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는 별 수 없는 존재들임. 전 인격적으로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될 수 있고, 그의 말과 행위를 그대로 받아 들여도 될 만 한 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땅위에 오신 그리스도뿐.

우리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바쳐서 섬길 가치가 있고 존경할 가치가 있는 분은 인간가운데 존재하지 않음.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그에게서 배우고 그만 본받음. 우리의 진정한 스승은 다만 그리스도.

좋은 스승은 적어도 두 가지 자격을 갖추어야 함을 알 수 있음: (1) 가르치는 데로 행하고 살아야, (2) 겸손해서 성도들을 섬겨야. 그러므로 목사라 하여, 선생이라 하여 무조건 존경하는 것은 옳지 않음. 너무나 많은 교회가 그 가르치는 내용, 그 인격보다는 단순히 목사란 이유로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 이것은 목사를 마술사로 취급. 비기독교적.

물론 땅위에서도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스승은 필요. 바울이 그런 분.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바울과 같은 스승은 우선 참 스승이신 예수님을 올바로 소개할 수 있어야 하고, 올바로 소개하려면 단순히 하나님 말씀을 가르칠 뿐 아니라 스스로 예수님을 본받아서 다른 사람에게 본을 보여야 함. 그리고 본을 보이려면 낮아지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음. 그것이 바로 참 스승이신 예수님이 보여 주셨던 본이기 때문. 본을 보이는 것은 곧 낮아지는 것. 장기려 박사, 한경직 목사. 그들은 말씀을 올바로 가르치고 그 말씀대로 살고 행동하면서도 존경과 섬김 받기를 원하지 않고 오히려 섬기심. 그런 분들만 존경할 가치가 있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려 한 것 그 자체가 이미 본을 보이지 못하는 것이고 스승의 자격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

자녀를 진정 사랑하는 부모들은 자녀들의 좋은 스승이 되어야. 그렇게 하려면 예수님 같은 스승, 바울과 같은 스승이 되어야.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모든 분들, 이 말씀에서 경고를 받아야.
(손봉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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