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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순수성 (창 2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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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순수성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덮었다가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형제여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하란에서 왔노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이르되 아노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이르되 평안하니라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야곱이 이르되 해가 아직 높은즉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 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동안에 라헬이 그의 아버지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더라) (창세기 29장 1절-9절)

오늘은 하란 근처에 우물가에 있었던 이야기를 먼저 하려고 합니다.
형의 장자권을 탈취한 <야곱>은 형 <에서>의 노여움을 피하여 도망치다시피 집을 나와 외삼촌이 사는 하란으로 피신하는 길이었습니다.
하란으로 가다가 브엘세바 들판에서 노숙을 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음성을 듣기도 하였고, 물어물어 하란까지 당도하여 어느 우물가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해가 중천인데 양떼를 몰고 온 목자들이 우물가에 서성거리고 있었고, 양들은‘음메 음메’목말라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자들은 양떼들에게 물을 주지 않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우물은 입구가 돌로 덮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그 우물 뚜껑을 열어 제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 이 우물은 봉한 우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중동 사막지역에서 우물은 생명의 젖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우물을 깨끗하게 오래오래  보존하기 위하여 필사의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나 개인적으로 우물을 열수 없도록 뚜껑을 봉해 놓았습니다.
이것이 저들에게는 불문율이었습니다.
누구나 함부로 열수 없고 다만 공동으로 합의하에 열게 되어 있었습니다.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덮었다가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양떼들이 다 모이도록 일찍 온 목자들은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무도 우물 뚜껑을 열려고 하지 않고 있는데 야곱이 이 모습을 보고는 이상하게 여겨 목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어디서 온 사람들이오?”
“우리는 하란에서 왔소이다”
“그러면 <라반>이란 분을 아시오?”
“알고 말고요 우리 동네분인데요”
“그분이 잘 계시오?”
“저기 그의 딸 라헬이 양떼를 몰고 오네요”
이 말을 들은 야곱은 목자들에게 이릅니다.
“빨리 우물을 열어 양들에게 마시게 하고 다시 풀을 뜯도록 해야지 왜 이렇게 있소?”
“아니오, 다른 양떼들이 다 모이고 목자들이 다 함께 모여야 하오”

이러는 동안 라헬이 양떼를 몰고 왔습니다.
자, 이제 이상한 행동을 야곱이 했습니다.
그 내용이 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의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이것은 돌발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물을 열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돌발적 행위를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의 기질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행동입니다.
장자권을 자기의 것으로 빼앗았던 야곱 기질이 여기서도 발휘되었습니다.
라헬의 양떼들에게 먼저 물을 먹이고는 어떻게 했습니까?
11절 이하에 이렇게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버지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 됨을 말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버지에게 알리매 라반이 그의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며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말하매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오늘 이 드라마틱한 내용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아가서 4:12절에“내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대로 보면, 교회를 <신부>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교회의 신랑이라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교회를 일컬어‘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신랑이 신부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오늘의 교회를 향한 마음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정결한 신부’‘순결한 신부’더럽혀지지 않은 샘물과 같은 모습을 기대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교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 것일까?
즉 우리들의 신앙이 어떠해야 할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1. 교회는 마실 수 있는 우물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모든 것에 오염된 세상을 만든데 있습니다.
마시는 공기며, 물이며, 먹는 음식물에 이르기까지 오염이 안된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인간의 자위적인 행위에서 비롯된 결과들입니다.
<봉해진 우물>을 야곱이 자위적 행동으로 열어 제쳤던 것 처럼, 오늘 모든 공해 물질이 인간의 편리함과, 자기만족 추구에서 온 결과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과학이 우리에게 생활의 편리함을 주었지만, 그리고 다량생산이 우리에게 경제적인 부를 가져다 주었지만, 그것으로 공해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영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빛이요 소금이어야 할 교회가 경계선이 무너졌습니다.
교회의‘거룩성’이 세상적인 것들로 오염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세속의 물결이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 분별하기가 어려워 졌습니다.
세상의 사고방식이 교회에서 적용되고, 사회적 관행이 교회 안에서도 구별 없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심각한 오염으로 더 이상 교회 안에서 순수성을 찾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 한 사람의 일주일간의 생활을 보십시오.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불신, 시기, 폄론, 배척, 편당 이런 것들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이 없어졌습니다.
어느 때 보다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2. 봉한 샘의 특징이 무엇이겠습니까?
순수함을 의미합니다.
정결함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오염이 되지 않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수에 비유하였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갈하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생수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순수하게 전해야 할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함에 자기 본위적인 행위들을 삼가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뜻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복음 이외에 것을 첨가하거나, 인위적인 자기 자랑이나, 세상적인 것들로 가미된 복음이라면 그것은 오염된 물과 같은 것이란 것입니다.
요즘 오염된 생수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생수라고 하지만 의심스러울 정도로 다른데서 퍼오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포장이나 용기가 그럴 듯 하다고 그 내용물도 순수한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가짜들 일수록 외모는 더 화려하게 꾸밉니다.

요즘 코메디들이 설교라고 하는 형식으로 전달되는 경우들을 봅니다.
물론 전달 방법으로서의 하나가 코메디적 일수가 있겠지만,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순수성이 사라짐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나라>로 오염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설교 내용에서 <하나님 나라>가 사라져 간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전함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사라진 강단은 오염된 강단입니다.
윤리적 강해, 세상 교양, 합리적 사고 방식으로 전하는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사라졌습니다.
물질의 풍요로움이 하나님 나라보다 세상나라를 더 크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헌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우리 교회’가 되어 버리면서 우리 교회를 위한답시고 갖은 세상의 오염된 것을 다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거짓됨의 과장들이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 버렸습니다.
성도의 교제가 교회의 중추를 이루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예배 찬송보다는 복음성가가 교회의 분위기를 좌우하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기대보다는 현세에서의 성공과 출세만을 위한 소원들이 커져가게 되었습니다.

3. 생수를 공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까?
봉한 우물 관리를 잘 해야 하겠습니다.
생수를 함께 공유하려는 노력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먼저 믿는 성도들의 생활입니다.
먼저 믿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오염을 방지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가 <말씀>으로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자기를 보는 사람들에게 생수처럼 진실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보여져야 합니다.

요즘 교회 안에까지 물량주의 사상이 팽배해져 있습니다.
교인 숫자만 늘리려고 합니다.
덮은 우물을 너무 쉽게 열어 제치고 있습니다.
우물이 오염되고 생수가 흐려지는 것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습니다.
싸구려 상품권을 발매하듯 그렇게 부풀려 통계를 발표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야곱처럼 자기 기분대로 우물을 열어 버리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이런 행위는 주차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식사 시간에서도 볼 수 있고, 교회의 모든 봉사 생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내가 중심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며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런 마음의 순수함이 생명입니다.
그리고 계속 생수를 공급하는 곳이라야 합니다.
그것을 위하여 성령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힘이 아니면 오염된 자신을 정결케 보존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강단 없이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가 그 마음속에서 흐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김 이 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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