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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화 사랑 (10)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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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 평화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그 설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시고 경청을 하시며,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려고 애쓰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평화는 우리의 제일가는 관심과 기도는 아니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일반적인 의미의 형통과 축복 보다는 역시 평화에 대한 관심과 기도가 우리의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것이 틀림없다는 약간은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평화를 설교하는 저 자신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에 대한 중요성을 잘 알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설교를 집중적으로 하고 있지만, 저에게 있어서도 평화는 관심과 기도의 일 순위는 아닙니다. 저 자신이나, 저 보다 더 중요한 제 자식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언제나 그 일 순위는 평화가 아니라 형통과 축복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지 않으십니까?

형통과 축복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옳은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형통과 축복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야만 합니다. 그것을 경하게 여기고 천히 여기는 것은 영적으로 교만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평화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하여야만 합니다. 본능적으로는 잘 되지 않지만 의도적으로라도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여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일반적인 의미의 형통과 축복만으로는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삶의 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일반적인 의미의 형통과 축복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되어 버린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우리의 경험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고 하여도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의 평화가 깨어진다면, 순식간에 그 이루어진 모든 것들은 마치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되어 버릴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좀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한 것이지만 그것들은 마치 정말 배설물과 같은 것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형통과 축복보다는 당연히 평화에 대한 관심과 기도를 더 우선시 하여야 할 것입니다.

평화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 이루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관심과 기도로 인하여 저와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교회 안에 주님의 평화가 늘 넘쳐 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평화의 반대는 불화입니다. 불화의 원인을 찾아 그 원인을 해결한다면 평화가 우리의 삶 속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불화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평화를 잃어버리고 불화하며 살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를 꼽으라면 그것은 불안입니다. 불안은 참으로 불안정한 것입니다. 평화를 안정이라는 개념으로 정의 할 때, 불화를 불안정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할 때 불화의 원인은 불안입니다.

불안은 우선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내적인 평화를 깹니다. 불안으로 인하여 우리의 내적인 평화가 깨어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것은 외적인 평화를 깨는 것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불안으로부터 모든 내적, 외적인 평화가 깨어지기 시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외적으로 평화를 누리며, 내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의 복을 받고 살려면 무엇보다도 불안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불안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불안의 원인은 두 말 할 것 없이 우리 인간의 한계와 무능입니다. 우리 인간의 한계와 무능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언제나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운명적인 불안 때문에 내적인 평안과 외적인 평화를 얻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여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어 바벨탑을 쌓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은 정말 하나님이 없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겉보기에는 참으로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부자도 되고, 하나님 없이 출세도 하고, 하나님 없이 자신의 꿈과 소원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직한 무의식과 본능은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와 절대적인 무능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 불안 때문에, 그 불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좀 더 부자가 되고, 좀 더 출세를 하고, 좀 더 세상 적으로 성공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리고 그와 같은 노력을 통하여 대부분 그 문제를 해결하지만, 그 문제가 해결 되어도 여전히 불안의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을 느낍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불안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불안해지고, 그와 같은 행동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평화가 점점 더 깨어져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안한 심리 상태가 필요 이상으로 부자가 되려고 하고, 비정상적으로 출세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착취를 당하게 되고 짓밟힘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평안입니다. 그 평안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능력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평안과 평화를 위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안과 불화는 우리의 운명이며, 우리의 팔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그 운명과 팔자를 깨트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운명과 팔자를 깨트리고 참 자유와 평화를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정말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으로, 아버지로 믿고 영접하고 고백하는 순간 불안의 문제가 해결 됩니다. 무지와 무능 그리고 삶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나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시고, 나는 어리석지만 하나님은 지혜로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그의 사랑 안에서 덧입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운명적인 불안과 불화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증거가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 속의 다윗입니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걱정이 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삶 속에는 불안이라는 것이 없어서 자신의 삶을 표현하자면 마치 푸른 풀밭에 누워 있는 것 같다고 고백합니다. 물가가 있는 아름다운 곳에서 편히 쉬고 있는 것과 같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이 너무 행복하고 감사하여 언제나 자신의 삶의 잔은 만족함으로 넘친다고 고백합니다.

이 아름다운 삶의 고백은 정말 축복입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최고의 축복입니다. 이 놀랍고 아름다운 축복이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이 이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신다는 확실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신뢰하고 의지하였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철저히 자신의 무능과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을 신뢰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목자라고 표현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목자라고 고백한 것은 자신을 힘없고 무지한 양과 같다고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양은 무지하고 무능한 동물의 대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은 누워서 자지 못하는 동물 중에 하나입니다. 세상에는 누워 잘 수 있는 동물과 누워 잘 수 없는 동물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동물이 누워 잘 수 있고, 어떤 동물이 누워 잘 수 없는지를 아십니까? 강한 동물만이 누워 잘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백수 중에 왕자라고 하는 사자는 사냥하여 배가 부르면 누워 잡니다. 아무리 깊이 잠이 들어도 누가 공격할 동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 노루, 토끼, 사슴과 같은 약한 동물은 절대로 누워 자지 않습니다. 양이 풀을 뜯어 먹고 배가 부르다고 누워서 잠이 든다면 그것은 자살 행위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절대로 그렇게 자지 않습니다. 저들은 언제나 도망갈 수 있는 자세로 잠을 잡니다. 자다가도 바스락 소리만 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갑니다.

양은 절대로 누워 자지 않습니다. 양은 약한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푸른 초장에 누이신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양이 눕지 못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다윗은 자신의 삶을 푸른 초장에 누워 자는 양에 비유하였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비유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이유를 단 한마디로 간단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양은 제가 알기로 아마 혼자서는 집을 찾지 못하는 동물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내 버려두면 제 멋대로 돌아다니다가 위험에 빠지게 되는 동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양은 혼자 내버려두면 백발백중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지는 그런 동물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이 마치 그와 같은 양과 같다라고 표현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조금도 불안하거나 염려가 되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길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늘 자신을 바로 인도해 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지팡이와 그 막대기로 자기를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을 선한 목자로 믿고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평안과 평화는 믿음으로부터 옵니다. 누구나 다윗처럼 하나님을 믿으면, 누구나 다 다윗처럼 주의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푸른 초장에 눕고 쉴만한 아름다운 물가에서 쉬는 것과 같은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평화는 물질과 지위와 권력과 같은 세상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우리보다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자신의 목자로, 자신의 아버지로 철저히 믿고 신뢰하는 믿음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신뢰하는 다윗에게도 삶은 힘들고 어렵고 위험했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일생을 성경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누구보다도 힘들고 험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위험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수도 없이 많은 죽음의 위험에 처했었습니다. 그는 가장 힘들고 위험하고 어려운 전장에서 그 일생의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평안이 편안함에서부터 오는 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편함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다 줄 만큼 좋은 것도 아닙니다. 편함은 편함일 뿐 절대로 우리를 평안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편함은 돈으로 살 수 있습니다. 권력으로 살 수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편하고 돈이 없으면 불편합니다. 권력이 있으면 편하고 권력이 없으면 불편합니다, 어제도 텔레비전 뉴스를 보니 어느 지방 경찰청장님이 출근할 때 교통경찰들이 신호를 조작해 주고 교통을 차단해 주어 몇 십 분이 걸리는 출근을 십분도 안 되어 한다고 합니다.

권력은 참 좋은 것입니다. 편한 것입니다. 그것이 없는 사람은 출근 시간에 꽉 막힌 거리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만 하는데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 권력을 이용하여 꽉 막힌 출근길을 뻥 뚫린 고속도로처럼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그것은 그와 같은 권력으로 편함은 얻을 수 있지만 절대로 평안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평안은 그와 같은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편함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가난과 권력 없음이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우리가 궁극적으로 평안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너무 그것에 연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있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그것이 없다고 기죽을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있으면 좋은 것이고 없어도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없어서는 아니 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뿐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세상 것 다 가지고 있어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계신다면 세상 것 다 잃어버린다고 하여도 그 또한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돈 갖고 싶다고 내 마음대로 갖게 되는 것 아닙니다. 권력 갖고 싶다고 누구나 다 갖는 것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내 맘대로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포기하기 전에는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만 믿으면 됩니다. 믿음은 내 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져 보았자 별것도 아닌 것에 목숨 걸지 말고, 우리를 언제나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목숨을 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한 것이 전혀 없으신 전능자이십니다. 말씀 한 마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어렸을 때 친구들에게 전도하면 친구들이 비아냥 거렸습니다. 예수님이 물위로 걸으셨다는 것을 가지고 비아냥거리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친구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해 주곤 했었습니다.

“네가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이고.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이다. 사람이 물위로 걸어갔다면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지. 그런데 그것보다 더 말이 안 되는 소리가 있다. 그것이 뭔지 아냐? 그것은 하나님이 물에 빠지셨다는 것이다. 야, 임마. 예수님이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물에 빠지실 수가 있냐? 하나님이 물 위를 좀 걸으셨다는 게 뭐가 그렇게 문제가 되냐?”

사람들은 홍해가 갈라진 것과,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과 같은 성경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의심합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언제나 그런 일을 꼭 해야 할 필요는 없으나 그것이 필요할 때 그것도 하지 못하는 하나님을 나는 믿을 마음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은 믿는 자에게 예외 없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저는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를 저 보다도,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저는 우리 예수님께서 저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하셨으면 지금도 얼마든지 저를 위하여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믿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은 제 마음 속에서 모든 의심과 불안을 빼앗아 갑니다. 저도 때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는 것 같은 때가 있지만, 힘들고 어렵고, 외로운 때가 있지만 하나님을 생각하면 불안이 없어집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하나님의 평강과 평안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평안이 평화의 씨가 되어 내가 살아가는 가정과 세상과 교회에 평화로 열매를 맺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다윗은 세상 때문에 불안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때문에 평안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시고, 하나님 때문에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처럼 푸른 초장에 누으시고, 쉴만한 물가에서 행복한 쉼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너희에게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아멘. 
(김 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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