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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레 11:1-3)

  • 잡초 잡초
  • 2005
  • 0

첨부 1


서론

어느 교회에 가보니 성도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교회 목사님이 돼지는 부정한 짐승이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하셨다.”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레위기 11장 7절에 나와 있습니다.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그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레위기 11장 7절 말씀을 근거로 해서 돼지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돼지의 주검을 만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먼저 레위기 11장 말씀을 나누기 전에 이 문제를 분명히 해야겠습니다. 모세는 백성에게 율법을 줄 때에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엄격한 규정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한 것이요, 이것은 부정한 것이다.”라는 명확한 한계를 그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먹고 마시는 것에 대단히 조심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우리 기독교에는 먹고 마시는 문제에 관해서는 제한이 철폐되었습니다. 완전한 자유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돼지고기 없어서 못 먹고 안 줘서 못 먹지 왜 못 먹습니까?

1. 음식규정의 한계

사도바울과 베드로는 이 문제에 관해서 명백한 해답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사도 베드로가 욥바에서 피장 시몬의 집에 거하였습니다. 그가 제 육시가 되었을 때에, 우리 시간으로 열두시가 되었을 때에 피장 시몬의 집의 지붕에 올라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할 때에 환상 중에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왔습니다. 보자기 안에는 각색 짐승과 기는 것과 각가지 곤충들이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베드로가 보니 부정한 짐승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답을 합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니까 하늘에서 세 번이나 소리가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가 체험한 환상, 들은 음성에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구원의 반열로 받으시기 시작하셨다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모세의 율법에 있는 음식제한에 관한 규정은 완전히 철폐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디모데 전서 4장 4-5절에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니라.” 어떤 음식이든지 감사함으로 기도하며 먹으면 우리 성도들에게는 다 정결한 것이요 못 먹을 음식은 아주 없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음식 문제에 관해서는 완전한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16절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먹는 문제를 가지고 폄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골로새서 2장 17절에 “이것들은 장래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음식규정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타당한 것이고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이방인과 유대인에 관한 규정도 철폐되었고, 음식제한에 관한 규정도 완전히 철폐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음식규정에 관한 제한은 더 이상 우리 신앙에 관해서 종교적인 구속력을 전혀 갖지 않는다는 것을 먼저 확신하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물론 영양학이나 위생학적인 측면에서는 레위기 11장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이런 말씀이 구속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복잡한 음식규정을 주신 것입니까? 여기에는 예표적인 목적이 있고, 교육적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교육하기 원하시는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음식규정을 주신 하나님의 교육적인 목적을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2. 음식 규정 그 자체

먼저 음식규정 자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식물에 관해서는 어떤 제한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동물에 대해서는 철저한 제한을 두셨습니다. 동물은 하나님이 세 종류로 나누셨습니다. 창세기 1장 20절에 보니까 하나님이 하늘에 나는 새를 창조하셨습니다.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세기 1장 21절에는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다섯째 날에 하늘을 나는 새와 물고기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섯째 날에 땅의 생물들을 모두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4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그대로 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음식은 세 종류입니다. 하나는 하늘을 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물속에 사는 것이고 또 하나는 땅 위를 걷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공군과 해군과 육군, 삼군을 창설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밥상위에 이 삼군이 다 오르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세 종류의 음식 중에 무엇이 정한 것이고 무엇이 부정한 것입니까? 먼저 육지의 짐승들 가운데에서는, 안으로 새김질을 하고 밖으로 굽이 갈라져서 쪽발이 되어서 걷는 짐승이 정한 짐승이라고 했습니다. 안으로 새김질도 하고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된 짐승은 소나 양이나 염소와 같은 짐승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정한 것이므로 먹어도 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그런 짐승도 된다고 했습니다. 또 물고기 중에서는 지느러미가 있고 비늘이 있는 것이 정결하여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느러미도 요리에 얼마나 많이 쓰입니까? 중국집에 가면 중국 사람들은 상어 지느러미 요리를 먹지 않습니까? 그것이 얼마나 비쌉니까? 바다낚시를 하는 사람들도 말하는 것이 바다생선 가운데 회를 먹을 수 있는 생선은 비늘이 있는 생선이라고 말합니다. 비늘이 없는 것은 기생충도 쉽게 들어가서 먹기가 어렵고 위생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바다에 있는 생물 가운데는 지느러미와 비늘 이 두 가지가 있는 것이 정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하늘을 나는 새 가운데는 부정한 새의 목록이 13절부터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독수리와 솔개와 어응과 매와 매 종류와 까마귀 종류와 타조와 다호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올빼미와 노자와 부엉이와 따오기와 당아와 올응과 학과 황새 종류와 대승과 박쥐니라.” 이런 것들을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기는 동물원에 가야 볼 수 있는 것인데 어떻게 먹습니까? 저는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 가운데는 꿩이나 참새와 같은 것들이 정결한 것이니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곤충들이나 땅에 기는 것은 대부분 부정하되 곤충 중에서도 날개가 달려 있고 뛰는 다리가 있는 곤충은 정결하다고 했습니다. 그런 곤충이 무엇입니까? 메뚜기입니다. 메뚜기 종류는 정결하여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메뚜기 튀긴 것은 얼마나 맛있는 영양간식입니까?  메뚜기는 먹을 수 있는 음식입니다. 우리가 레위기 11장을 보게 되면 이런 음식규정들이 쭉 규정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런 음식규정, 복잡한 규정을 왜 주셨습니까?

3. 음식규정을 주신 목적

그 목적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목적은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철저하게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의 구별은 지금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담이 허물어졌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철폐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에는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구별되어 살아야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진 유일한 백성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서 기록, 보존한 유일한 백성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거룩함이 무엇이고 거룩한 예배가 무엇인가 하는 개념을 가진 유일한 백성이었습니다. 또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도록 되어 있었고,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실 모판이 되는 백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신앙이 섞이고 혈통이 섞이고 믿음이 섞이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실 모판이 더러워지고 오염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유대인과 이방인이 철저히 구별되어서 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어떤 종교든지 음식규정을 가진 종교인들은 다른 종교로 넘어가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단종교에서도 음식규정을 가진 종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번 빠지게 되면 나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음식에 관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종교나 공동체에서 먹는 것들이 부정하다고 여겨져서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음식규정을 가진 종교는 대단히 강력한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식규정이 있기 때문에 다른 종교의 제사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종교의 제사에는 주로 돼지가 나오지 않습니까? 한국 사람들도 제사를 지내면 제일 많이 등장하는 짐승이 돼지입니다. 그러니 돼지는 부정한 짐승이라고 알고 있는 유대인들이 그런 짐승이 있는 제사의식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또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방인 여자가 들어오면 이방음식을 할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음식인데 어떻게 먹겠습니까? 그러나 이방 여인들은 그렇게 배웠으니 어떻게 합니까? 새우를 튀기고 오징어를 볶고 김치찌개에 돼지고기를 넣는 것 밖에 안 배웠는데 유대인에게 시집을 갔다고 해서 그것을 고치겠습니까? 그러므로 유대인은 이방인과 결혼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이방인과 사회적인 교제를 나눌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교제를 나누려면 음식을 놓고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데 부정한 음식을 놓고 교제를 나누어야 하니 그것도 가능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음식규정을 주셔서 유대인들을 철저하게 이방인들과 구별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정결을 유지시켜서, 그들을 통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나오도록 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음식규정이 오늘 우리 성도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불신자들과 구별되어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불신자와 똑같을 수 없습니다. 예수 믿기 전과 믿은 후가 똑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똑같을 수가 있습니까? 사람의 영혼이 죽었다가 살았는데 어떻게 똑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성도들이 불신자와 구별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음식규정을 주신 목적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불신자하고 똑같이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예수 믿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며 교회의 존재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구별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돌감람나무였던 우리는 참감람나무인 그리스도에 접붙인 바가 되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구별되어 살았던 것처럼 죄인들, 불신자들과 구별되어 살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면 무엇으로 구별되어야 합니까? 우리의 입는 옷으로 구별되어야 합니까? 아니면 우리의 말하는 표현으로 구별되어야 합니까? 아니면 어떤 의식으로 구별되어야 합니까? 스펄전 목사님은 성도들이 다섯 가지 영역에서 불신자와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인생의 목적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재물을 많이 벌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디에 쌓기 위해 벌어야 합니까? 하늘에 쌓기 위해 벌어야 합니다. 우리가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누구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부요해 져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에 부요해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의 인생의 목적을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의 인생의 목적은 분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 이외에 다른 목적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그 목적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신자들은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다.’는 꿈과 목적을 갖습니다. 그런데 저 푸른 초원도 하루 이틀이지 맨날 살면 초원도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림 같은 집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거기서 살면 싫증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사랑하는 님과 한 백년을 어떻게 삽니까? 삼사십년 살면 헤어지고 죽음으로 인해 갈라지는 것이지요. 불신자들의 삶의 목표는 기껏해야 일시적인 것이고 영원한 가치를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인생의 유일한 목적을 가지고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 성도들은 불신자와 영혼의 상태가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의 영혼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것입니다. 인생계획에 하나님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자 하는 동기도 전혀 없고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그 영혼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영혼을 가리켜서 죽은 영혼이라고 합니다. 죽은 영혼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은 영혼은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신자의 영혼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의 영혼은 분분초초 하나님을 의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시각각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행하는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정결한 것이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부정한 것이냐.’를 생각하고 정결한 것을 시시각각 택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것
이냐 멀어지는 것이냐를 의식하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도록 노력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 성도들의 삶의 원리는 불신자들의 삶의 원리와 구별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따라갑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 자기들도 그렇게 합니다. 그것이 불신자들의 삶의 원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런 원리를 가지고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넓은 문으로 들어가서 넓은 길로 행한다고 해서 그 길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따라가게 되면 그 마지막은 멸망인데 우리가 왜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까? 여러분, 비록 좁은 길이고 적은 사람이 가는 길이라고 해도 신앙의 길, 옳은 길을 따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의로운 길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금방 이 땅에 생명을 마친다고 할지라도 정의로운 길을 따라가겠다고 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삶의 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우리 성도들은 불신자들과 행동양식도 구별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빛이 되라,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은 빛을 내고 소금은 맛을 내야 합니다. 빛이 “나는 내일 빛을 낼께, 오늘 낼께.” 하고 빛을 내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빛입니까? 소금이 “일주일 뒤에 짠맛을 내겠습니다.”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 성도들은 빛을 내야하고 행동양식도 달라야 합니다. 불신자들과 똑같은 행동양식을 가지고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도 말만 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도들의 행적을 ‘사도언전’이라고 하지 않고 ‘사도
행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다섯째로 우리의 언어도 달라야 합니다. 불경건하고 불신앙적인 언어가 아니라 단 한마디를 하더라도 경건하고 신앙적인 언어를 말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28살에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예수를 믿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왜냐 이 성경 말씀이 너무나 정결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십계명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안 믿으면서도 성경을 가지고 다니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술을 먹으면서도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술집에서 제 친구들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가 “나는 예수도 안 믿고, 성경도 안 믿는다. 말도 안 되는 말을 안 믿는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 때 그랬습니다. 비록 술 취한 상태였지만 “네가 그렇게 못살면 못 살아서 미안하다고 하지 성경말씀에 어디 하나 잘못된 것이 있다고 네가 성경을 비판하느냐?” 그렇게 야단을 쳤는데 하나님이 그 말을 들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를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우리가 말 한마디라도 말씀의 편,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해야 합니다. 한마디라도 불신앙, 불경건한 말을 하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음식규정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것을 먹을까 말까 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유대인을 구별하기 위해서 이 규정을 주신 것이고 그것은 오늘 내가 구별된 삶을 살라고 이 말씀을 주신 것이로구나. 오늘부터 나는 불신자와 같이 살지 말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겠다.’하는 결단이 여러분 안에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음식규정은 죄에 대한 실물교육입니다. 우리가 온통 세상을 보면 부정한 짐승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돼지를 보게 되면 아무리 깨끗이 씻겨도 자기가 나온 더러운 곳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그것을 볼 때에 ‘인간본성은 저런 것이구나. 인간 본성은 어쩔 수 없이 아무리 닦아도 죄를 짓는 존재이구나.’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돼지를 보면 인간본성의 타락성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개를 보면 어떻습니까? 개는 토한 것을 다시 먹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개가 토하였던 것을 다시 먹는 것처럼, 죄로부터 벗어나서 다시 죄로 돌아가는 사람은 개와 같은 그런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구리를 보게 되면 얼마나 능글능글합니까? 구덩이에 있으면 쏙 들어갔다가 나왔다합니다. 그것을 보며 우리는 ‘은밀하고 능글능글한 것을 죄로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쥐를 보면 더러운데 있다가 나와서 그 눈도 반짝반짝 하면서 교활하고 간교하게 남의 것을 훔쳐 먹고 더러운 병균을 옮기지 않습니까? 아 그러니 쥐를 보게 되면 ‘나는 쥐처럼 살지 말아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당나귀도 부정한 짐승입니다. 물을 먹이려고 끌고 가면 당나귀는 목에 힘을 주고 안 끌려가려고 합니다. 그러면 ‘고집 센 것도 죄구나 당나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뱀을 보면 속에 독을 가득 품고 똬리를 틀고 있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공격을 해가지고 물어서 독을 퍼트리고 죽이려고 합니다. ‘아하 저렇게 사악함과 교활함과 간교함이 백의 특징이구나. 우리는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정한 짐승을 통해서 무엇이 죄인가 하는 것을 실물교육으로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 주변에 만연해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되면 죄의 구렁텅이가 온 사방에 널려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십자가 밑에 거하여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이 음식규정을 주셔서 끊임없이 죄에 대한 경계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목적입니다.

세 번째는 음식규정을 통해서 거룩함의 개념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거룩함이라고 하는 개념은 유대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헬라말도 거룩함이라고 하는 단어는 히브리어에서 따온 것이고 영어의 ‘holiness’도 히브리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거룩함은 첫째로 정결함(cleanness)입니다. 깨끗해야 거룩한 것입니다. 불결하고 더러운 것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영혼도 깨끗하고 우리 육신도 깨끗해야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영육의 더러운 것에서 언제나 씻음 받고 깨끗하게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거룩함은 완전함입니다. 부족한 것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완전해야 거룩합니다. 여기 짐승 중에도 보면 안으로는 새김질을 하고 밖으로는 쪽발이 되어야 거룩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신앙도 안으로는 말씀을 새김질하는 신앙이 있어야 하고 밖으로는 바르게 행하는 행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행실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요 신앙 없는 행실은 헛된 행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안으로는 신앙이요, 밖으로 바른 행실, 이 두 가지를 가질 때에 완전한 것이고 그것이 거룩한 것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약대나 사반이나 토끼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했으므로 부정하다고 말합니다. 돼지는 굽을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은 못하므로 부정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안팎으로 하나라도 부정하면 부정한 것입니다. 두 가지가 완전할 때에 그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세 번째로 거룩함은 정상적인 것입니다. ‘normality’입니다. 비정상적인 것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레위기 18장과 레위기 20장은 특별히 거룩한 성도덕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레위기 18장 22절을 보면 동성연애에 관해서 말합니다. 동성연애는 땅을 더럽히는 부정한 일로 동성연애 하는 자는 그 땅에서 끊쳐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동성연애는 왜 부정한 것입니까? 정상적이 아니기 때문에 부정한 것입니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여보, 당신” 하며 사는 것이 정상적입니까? 여자가 여자와 더불어 부부처럼 산다면 정상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호주에서 오신 스티브 로제로 목사님께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시드니는 동성연애가 어느 정도입니까?” “아주 심합니다. 동성연애자들이 국회의원을 다 차지하고 목사도 됩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장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동성연애자도 다 사랑하시고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짓입니다. 죄는 죄입니다. 동성연애는 땅을 더럽히고 땅에서 끊쳐질 죄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런 죄에 빠지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레위기 18장 23절에 보면 짐승과 교합하는 수간은 부정한 것으로 백성 중에 끊쳐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짐승과 교합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얼마나 부정하고 비정상적인 일입니까? 그런 것들을 끊지 않았기 때문에 인류에게는 에이즈나 매독과 같은 것이 만연하게 된 것입니다. 에이즈도 원래는 원숭이의 병입니다. 그런데 어떤 자가 원숭이와 교합을 하고 그것을 사람에게 퍼뜨려서 인류의 재앙이 되지 않았습니까? 매독도 그것이 사람의 병이 아닙니다. 말의 병입니다. 그런데 어떤 자가 말과 수간하여 인류에게 그런 나쁜 병을 퍼뜨리게 된 것입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것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은 정상적인 것입니다.

네 번째로 거룩한 것을 구별되는 것입니다. 섞인 것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부정한 것은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레위기에 보면 한 밭에 쌀과 보리를 함께 섞어 뿌린다든다 조와 팥을 섞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함은 분리성인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거룩함은 헌신성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께 드려져야 거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만이 거룩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음식 규정은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것을 먹어라, 먹지 말라.” 하는 의미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불신자와는 구별되어서 거룩하게 살아라. 온 세상에 죄가 가득했으니 죄는 언제나 경계하며 살아라. 그리고 거룩한 것은 깨끗하고 정결하고 정상적인 것이니 거룩한 삶을 살아라.” 하는 목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결론

짐승들도 이렇게 구별되는데 인간도 언젠가는 정한 자와 부정한 자가 구별될 날이 올 것입니다. 양과 염소가 갈라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이 구별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할 것입니다. 악인들은 밖에 쫓겨나 어두운 곳에서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부정한 자입니다. 우리는 부정한 자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원래 부정한 자입니다. 그런데 부정한 우리가 어떻게 의인의 반열에 설 수 있고 어떻게 정한 자에 끼일 수가 있겠습니까?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고, 예수 믿어 구원받아 정결함을 얻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믿는 길만이 부정한 자가 정결한 자가 되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가련한 사람이요, 불쌍한 사람이요,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지금은 섞여 살지 몰라도 언젠가 분리될 때에 주님으로부터 “영영히 타는 불 못에 들어가라.” 하는 소리를 들을 날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 말을 우습게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 목사가 무슨 소리로 큰 소리를 치는가? 저는 제 소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정한 자이지만 예수 믿으면 정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악인이지만 예수 믿으면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한 자, 의인의 길에 서서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모든 음식규정을 주신 목적은 11장 44-45절입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바 기어 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찌어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니 우리도 거룩하게 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죄와 가까워지셨습니까? 다시 죄와 멀어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셨습니까? 하나님께 다시 가까이 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속으로 말씀을 되새김질하며 말씀이 여러분 마음속에 역사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다시 말씀공부로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외부적인 행실이 바른길, 옳은 길, 믿음의 길을 걷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길을 행하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다시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안팎으로 정결한 길을 따라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 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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