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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리와 제자 (마 8: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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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무슨 제목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영화의 한 장면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동네 꼬마 소년들 수십 명이 중국의 어느 큰 절 대문 앞에 찾아와서 쿵푸를 배우는 제자가 되겠다고 하면서 스승이 자기네들을 받아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문 앞에서 좌우로 나란히 줄지어 서서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대낮의 햇볕이 뜨거워지자 참지를 못하고 한두 명씩 돌아가기 시작했고 오후에 한 줄기의 소나기가 내리자 또 한 무리의 소년들이 돌아갔습니다.
  그래도 예닐곱 명의 소년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끈질기게 기다렸는데, 밤이 되어서야 겨우 그 대문이 열리면서 그들을 절 안으로 넣어 주었습니다.
  몇 가지 예비 시험을 거쳐서 또 얼마가 탈락되고 마지막 몇 명이 드디어 그 쿵푸 스승인 노승을 마주 대하고 자리에 앉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밥상이 차려지게 되는데, 온종일 피곤과 허기에 지쳤던 소년들은 자기 앞에 음식이 오자말자 곧 먹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중에 단 한 명만은 자기 음식에 손을 대지 않고 스승이 먼저 수저를 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노승은 다른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다 돌려보내고 그 한 소년만 남겨서 자기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비록 영화이기는 하지만 훌륭한 스승은 자기 제자를 뽑는 방법에서부터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상 깊은 장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시던 당시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실상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허다한 무리’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뽑힘을 받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갈릴리에서 산상보훈의 설교를 하시고 병자를 고쳐 주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제 갈릴리의 본거지에 해당되었던 가버나움을 떠나서 본문에 기록된 대로 “건너편 가다라 지방”으로 가시게 됩니다.
  그 여행 도중에 예수님께서는 과연 어떤 사람은 무리 가운데 그냥 남게 되고 어떤 사람만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따르는 듯이 보이는 많은 무리 중에서도 특별히 저와 여러분이 이 왕 중의 왕, 주 중의 주님이실 뿐 아니라 또한 스승 중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자랑스러운 제자가 되는 길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무리는 말씀만 듣고 돌아가지만 제자는 기꺼이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습니다.

  18절부터 20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 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서기관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대적하던 자들이었지만, 본문에 나타난 그 어느 서기관은 일단 칭찬할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생님” 즉 자기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고 하면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도 따라가고 싶습니다.”라고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마도 예수님의 산상보훈 등의 설교에 큰 감명을 받았던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서기관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율법학자인데,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처럼 정식 학자 교육을 받지 않은 분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율법의 깊고도 참된 의미를 오묘하게 설파하시는 것을 보고 스스로 두 손 번쩍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어쨌든 유대 사회에서 율법에 있어서는 최고 전문가라 할 서기관인 사람이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머리를 숙이고 찾아온 것은 대단한 결단을 요하는 일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겸손하고도 열정적인 제자 지망생을 향하여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일견 동문서답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서기관에게 주시는 하나의 테스트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서기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유대 사회의 다른 유명한 랍비의 제자가 되는 것과 비슷한 것인 줄로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보훈을 듣고 “아, 내가 이 분을 스승으로 모시면 율법에 대하여 더 깊은 진리를 배울 수 있겠구나.”라는 정도의 동기에서 예수님 제자 되겠다고 찾아온 것을 예수님께서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랍비들이었다면 그 정도만으로도 그를 자기 제자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겠지만 예수님에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딴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인격을 흠모하면서 제자가 되기를 자원하는 그 서기관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나는 어디를 가도 머리 둘 곳조차 없는 몸이다.”라는 말씀으로 일차 테스트를 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사람이 자기 집이 없다는 것은 이미 고생문이 훤한 인생입니다.
  즉 이 말씀은 바꾸어 말하자면 “네가 내 제자가 되려면 아예 처음부터 고생할 각오 단단히 하고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 고생이란 단순히 의식주의 불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머리 둘 곳 없다’는 말은 안정된 거처가 없다는 뜻 외에도, 항상 대적들로부터의 공세 때문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는 의미 또한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육체적 고난뿐 아니라 사방의 원수들로부터 핍박과 박해를 당하면서 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그 서기관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그는 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까 영화의 예처럼, 스승이 대문도 열어 주지도 않고 먼저 밖에서 햇볕과 비바람을 맞게 함으로써 쿵푸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고생스러운 것인지를 보여 주니까, 일찌감치 포기하고 떠나버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 말씀에는 은혜를 받았지만 예수님과 함께 고난 받는 길을 걷는 것은 그 서기관만 엄두를 못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중에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무리의 대부분이 다 그랬던 것입니다.

  오늘날 역시 대부분의 교인들은 신자가 된다는 것을 그 서기관이 생각하는 정도의 수준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목사 설교도 듣고 살면 좀 더 교양인이 될 수 있을 것 같고 내 자식도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성경 배우게 하면 좀 더 훌륭한 사람 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자’의 자세가 아니라 ‘무리’의 자세입니다.
  그저 주일 하루 정도 교회에 출석하면 내 인생 풍요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멀찌감치 따라다니면서 배부른 떡만 받아먹고 제 귀에 좋은 말씀만 몇 마디 즐기겠다고 하는 구경꾼의 속셈인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선생이라면 자기의 말만 흠모해 주어도 족하게 여기겠지만, 우리 예수님은 그처럼 호락호락하게 제자로 받아 주시는 분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너는 나의 가르침을 존경하는 정도가 아니라 나의 걸어가는 고난의 길을 너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올 각오가 되어 있느냐?”라고 반드시 먼저 물어 보시는 스승이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 같은 스승께서 우리 같이 못난 제자들에게 당신과 같이 고난을 나누자고 말씀해 주시는 자체가 이미 황공무지하기 짝이 없이 고마운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디베랴 언덕에서 산상보훈에 고개만 끄덕이다가 돌아간 무리 같이 되지 말고, 그 귀한 복음의 말씀을 위해 함께 고난 받는 자기 십자가까지 기꺼이 지고 주님을 좇아가는 참된 제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무리는 자기 인생이 더 급하지만 제자는 예수님 따라가는 것만이 최우선입니다.

  본문 21절과 22절에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나타나는 사람은 “제자 중에 하나”였습니다.
  아마도 열두 제자 중의 하나라기보다는 좀 더 넓은 의미의 제자, 즉 풀타임으로 예수님과 같이 다니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있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가 자기 부친을 장사하러 가기를 예수님께 요청한 것은 두 가지 상황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예수님께서 다른 곳으로 떠나가시려 하는 바로 그 즈음에 자기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 제자는 “예수님, 제 아버지께서 지금 막 돌아가셨다니 일단 장례식에 다녀와야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른 민족도 그렇지만 유대 사회에 있어서도 자식이 돌아가신 부친을 장사지내는 것은 최우선 중의 최우선에 해당되는 의무였으며 또한 사망한지 24시간 내에 꼭 치러내어야 할 일이기도 했습니다.

  둘째 해석은, 자기도 예수님 제자가 되고 싶기는 한데 예수님을 따라서 여러 지방으로 돌아다니는 일은 현재로서는 부모를 모셔야 하는 형편 때문에 곤란하니, 일단 지금은 작별하고 부친이 돌아가실 때까지만 기다렸다가 그 후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풀타임 제자가 되겠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즉 자식으로서의 의무에서 해방되면 그때 가서 예수님 따르는 일에 전력을 다하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쪽 해석을 택하더라도 전자나 후자나 근본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예수님 제자가 되는 것은 좋은데 당장 급한 일부터 먼저 처리해 놓은 후에 오겠습니다.”라는 말이나 “정말 예수님 제자 되기를 바라고 함께 고생할 각오까지 되어 있지만 지금은 곤란하고 일단 연기해 두었다가 나중에 시작하겠습니다.”라는 말이나 오십보백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요청하는 “제자 중 하나”에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참 이상한 말씀 아닙니까?
  사실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일은 아직 살아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장사지내는 사람들을 가리켜 “죽은 자들”이라고 표현하시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분명히 ‘영적으로 죽은 자’라는 뜻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는 제대로 효도하지 않다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 시체 처리하는 일을 두고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는 사람은 실로 영적으로는 죽은 자들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떤 식으로 장례를 치르더라도 어차피 곧 썩어 없어질 시체에 대하여 가지는 열성이 예수님을 따라서 천국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보다 더 큰 사람이라면 그 자신도 이미 죽어 있는 자와 방불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도대체 무엇이 아쉬우셔서 그런 사람까지 자기 제자 삼으려고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자기 인생의 최우선 순위는 다른 데다 두고 예수님 제자 되는 것은 제2지망쯤으로 여기는 ‘무리 교인’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워낙 장사가 잘 되어서 바쁘니까 주변 일이 좀 정리되고 차분해지면 그때 가서 열심히 교회 나오겠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글쎄요, 사업 잘 될 때에 교회 나올 ‘시간’ 못 내던 사람이 사업 망할 때 교회 나올 ‘마음’은 낼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일단 입시 공부에 전념하게 하고 나중에 대학 붙고 나면 자식도 주일예배에 데려오겠다고 하는 부모들도 꽤 자주 봅니다.
  글쎄요, 예수님 제자 되는 것보다 자기 부친 장례 치르는 것이 더 급하다는 사람을 가리켜서도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라고 책망하셨는데, 살아 있는 자기 자식을 예배에 참석시키는 것보다 공부 몇 시간 더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부모를 가리켜서는 도대체 무어라고 하시겠습니까?
  한번 여러분께서 스스로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르기는 하지만 ‘죽은 자’라는 말 정도로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랄 것 같지 않습니까?

  일단 돈부터 벌어 놓고 보는 일이, 우선 내 자식 대학교 입학시켜 놓고 보는 일이 예수 믿는 신자가 되고 제자가 되는 일보다는 좀 더 급한, 그것보다는 분명히 한 단계 더 우선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이미 ‘영적으로 죽은 자’처럼 취급하고 계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 말씀 그대로 평생토록 죽은 자들이 하는 일에만 매일 바삐 쫓아다니다가 인생 끝나고 말 것이 틀림없습니다.
  항상 자기 인생사는 일에만 마음이 바쁘고 일단 그것부터 먼저 해 놓고 예수 믿겠다는 사람은, 농사짓느라고 바쁘고 추수하느라고만 바빠하다가 미처 자기 영혼을 위해 예비할 시간도 없이 죽게 되었던 그 ‘부자’처럼 그 인생의 끝날이 도적같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쿵푸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아이가 저녁 때 집에서 엄마가 부른다고 해서 되돌아 갈 정도라면 벌써부터 싹이 노란 것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서도 먹고 사는 일, 자식 키우는 일, 노후대책 세우는 일에 더 마음이 급한 사람은 제자 입문에서 탈락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죽은 자’나 마찬가지라고 아예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부고를 내고 계시는 줄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인생에만 급급해하는 ‘살았으나 죽어 있는 무리’들과 함께 쫓아다니지 말고 오직 예수님 믿고 섬기는 것만을 최우선으로 하는, 항상 예수님 뒤를 바짝 좇아가는 제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무리는 곧 흩어지지만 제자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신앙이 계속 자라게 됩니다.

  23절 이하 27절에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무리들과 헤어지고 제자들만 데리시고 배에 올라 예정하셨던 건너편 ‘가다라 지방’을 향하여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23절에 “제자들이 좇았더니”라고 기록된 것은 아까 18절에서 언급된 ‘예수님을 에워싼 무리’와는 의미심장하게 대조됩니다.
  디베랴 언덕에서 산상보훈을 들었던 무리의 대다수는 이미 다 흩어졌지만 오직 예수님의 제자들만 이미 앞에 나온 두 가지 예비 시험을 통과하고서 지금 이 배에 같이 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이 타고 가던 배에 갑자기 폭풍이 닥쳐왔던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사실 큰 호수에 불과하지만 갑작스런 폭풍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그런 폭풍을 당하자 갈릴리 바다에서 뼈가 굵었던 제자들까지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태평스럽게도 뱃전에서 주무시고 계셨는데, 아마도 계속되는 전도사역으로 몹시도 피곤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급하게 된 제자들은 “예수님, 우리 이러다가는 다 죽겠습니다.”하고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 없는 사람들아, 왜 무서워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것이 믿음 없는 일이었겠습니까?
  지금 분명히 주위에서 자기네 목숨을 한 순간에 앗아갈 수 있는 바람과 파도가 세차게 몰아치고 있는데 그것을 보고 걱정하는 것이 어떻게 해서 믿음 없는 일에 해당되는 것이겠습니까?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기네 주변의 모든 상황을 완전히 컨트롤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상, 그 배는 결코 뒤집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아직도 살아서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그 배에 타고 계신 한에는 절대로 그 배가 침몰할 수는 없는 일이었는데, 제자들은 그런 믿음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믿음이 없는 제자들 대신에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고” 잔잔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하면서 “기이히” 여겼습니다.
  사람으로서는 제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자연을 마음대로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제자들에게도 너무나 확연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그 사건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그저 좋은 말씀만 가르쳐 주시는 선생 정도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만물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고 믿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디베랴 언덕에 모였던 무리들과는 달리 오직 당신의 제자들에게만 이런 기적을 행해 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앞으로 그 어떤 일을 당해도 당신만을 철저히 의지하고 따라오도록 특별교육을 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그 갈릴리 바다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그래도 예수님 좀 가까이 따라가겠다고 애쓰는 신자에게도 인생의 폭풍은 닥쳐오기 마련입니다.
  신앙생활 시작한 후에도 때로는 집안에 어려운 일도 생기고 사고도 나고 병에도 걸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면 우리에게도 “예수님, 제게 이런 시험이 닥쳐오는데 왜 주무시고만 계십니까?”하고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고 싶은 생각까지 들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이미 예비 테스트를 다 통과한 자들이 이제 예수님의 완전한 제자가 되기 위한 최종 테스트를 받고 있는 순간인 줄로 깨달아야 합니다.
  많은 쿵푸 제자 지망생들 중에서도 오직 음식물을 눈앞에 두고서도 오히려 스승만을 의식하고 예의를 지킬 줄 알았던 한 사람만 최종합격된 것처럼, 제자 테스트의 마지막 단계 역시 환난과 위험이 눈앞에 몰아치는 와중에서도 끝까지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할 줄 아는 신자만이 제자로서 최종합격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제자가 된 이상,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깜빡이라도 잊고 계시는 시간이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아니합니다.
  그 어떤 환난이나 위험이 닥치더라도 예수님께서 우리 제자들과 같이 동행해 주시는 한에는 절대로 우리가 탄 배가 뒤집어질 수는 없습니다.
  아직도 당신의 제자들이 전도해야 할 생명들, 아직도 당신의 제자들이 세우고 지켜야 할 교회들, 아직도 오직 당신의 제자들만이 할 수 있는 세계선교의 사명이 남아 있는 한에는, 우리 주님께서는 절대로 그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하실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찌되었든지 간에 그 배에만 타고 있으면, 즉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몸 되신 교회 방주 안에 타고 있기만 하면, 좀 같이 풍랑도 만나고 좀 개인적으로 마음이 약해지는 일도 있다 하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그것이 다 제자 교육이요 신자 성화의 과정이 되는 것을 깨닫고 체험할 줄 알아야 합니다.
  쉽게 끓어오르다가 또 금세 식어버리고 흩어지는 무리가 아니라, 한번 따르기 시작한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가는 가운데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오히려 그 때문에 주님 의지하는 믿음이 더욱 새롭고 굳건하게 성장하는 원숙한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오늘 본문의 첫 절을 다시 보시면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모습 아닙니까?
  당신 좋다고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어서 당신 주위를 가득 에워싸고 있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 무리들을 피하듯이 떠나버리셨습니까?
  연예인 같으면 그런 인기를 못 누려보아서 안달할 것이고, 정치가 같으면 ‘노사모’나 ‘박사모’ 따위의 지지 세력을 확보하게 되었다고 입이 벌어질 것인데, 왜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런 대중의 열성적인 추종을 오히려 회피하셨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무리’였지 ‘제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 듣고 고개 끄덕이면서 은혜 받았다는 말은 할 줄 알지만 예수님 뒤를 자기 십자가 지고 따라가는 것에 대해서는 아예 손을 내젓는 무리들인지라 예수님께서도 피하셨던 것입니다.
  항상 자기 할 것 먼저 다 해 놓고 그 다음에 시간 좀 나면 예수님 따르겠다고 하는 무리 역시 예수님께서는 당신 편에서 먼저 떠나가 버리십니다.
  떡 줄 때는 좋아하면서 우리 왕 되어 주십사 하면서 쫓아다니다가도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는 그 얼굴색이 싹 바뀌어 버리는 표리부동한 무리들이 당신을 에워싸기 이전에 예수님 편에서 먼저 몸을 빼어서 건너편으로 떠나버리시는 것입니다.

  오직 그 무리들 중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뽑힌 자들만이 예수님과 한 배를 탈 수 있습니다.
  아무나 다 쉽게 될 수 있는 것이 예수 제자라면 별로 자랑스러울 것도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무리 가운데서도 실제로는 떨어지는 사람들이 많고 합격되는 사람은 적은 까닭에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름과 자격은 실로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성경 좀 안다는 머리만 가지고 제자 노릇하려 하지 않고 오직 스승이 먼저 가신 십자가 고난의 길을 기쁨으로 본받으려 하는 제자, 아무리 급하고 중요한 일들이 있다 해도 늘 예수님 제자 사명에 최고 우선권을 두는 제자, 쉽게 표리부동하지 않고 꾸준히 주님 따라가면서 계속 진보하여 결국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그 믿음이 성장하는 제자 - 오직 이런 성도들만이 오늘도 우리 주님과 동행하는 제자의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경기장이나 연주회장에 운집한 관중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선수나 연주자를 향해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내기는 하지만 그 시간이 끝나면 그뿐, 그 이후에는 다들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에 바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코치로부터 야구를 배우고 마스터에게서 레슨을 받고자 하는 제자들은 자기 스승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늘 스승을 따라다니면서 그 스승이 가르쳐 주는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자들입니다.

  오늘도 대부분의 교인들이 주일 아침에만 우르르 모여들었다가 또 쫙 흩어지는 ‘무리 교인’ 중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처럼 잠시 모여서 당신을 먼발치에서만 바라보면서 그저 찬송 몇 곡 부르고 아멘 몇 번 하고는 집에 돌아가기에 바쁜 ‘구경꾼 무리’에게 둘러싸이는 것은 우리 예수님 편에서도 즐겨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고난과 핍박 받는 것을 감수하고 당신께로부터 배우는 일에 모든 시간과 힘과 물질까지 최우선으로 투자하고 늘 당신과 동행하면서 희로애락 간에 믿음이 계속 성장하고 있는 ‘내제자’들과는, 풍랑에 흔들리는 배안이라도 같이 계시기를 기뻐해 주시는 것입니다.

  실로 ‘무리’와 ‘제자’는 얼마나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당신의 몸 되신 교회에 그런 ‘관중 교인’의 숫자만 높아지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시고 오직 철저히 교회 중심으로 당신의 ‘참된 제자’ 되기를 원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너무나 흔하고 가치 없는 ‘예수 무리’ 가운데 남지 말고, 스승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제자, 스승 예수님 모시는 일에만 전심전력을 다하는 제자, 날이 갈수록 스승을 더 사랑하고 더 신뢰하고 더 의지하고 더 잘 믿는 ‘예수 제자’ 가운데 이름을 올리고 함께 끝까지 따라가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 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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